군마(軍馬) 레클리스 병장 진급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참전국 군인들 일부가 본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미 해병 제1사단 2대대장이었던 앤드루 기어(Col. Andy Geer U.S.M.C.R) 중령은 당시 유명한 작가로 미국으로 돌아가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신문에 기고하였다.
▲ 네바다 전초 전투 후 미 해병 제1사단 부대 교체(1953년)(사진:USMC 미국해병대 사진작가)
앤드루 기어 중령은 “레클리스 병장이 현재 한국에서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공적을 많이 세운 제주마 레클리스 병장을 미국으로 당장 데려오고 싶지만, 돈이 없어 말을 데려오지 못하고 있다. 해병은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다.”라고 신문에 호소하는 글을 썼다.
앤드루 기어 중령은 한국전쟁의 전투 상황과 군마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상세하게 미국 여러 신문에 글로 전달했다. “한국에서는 전투에서 필요가 없는 말들은 즉시 상인에게 팔아버리거나, 바로 도축된다.”라고 말하며 애절한 마음으로 기자와 통화했다.
한국전쟁에서 해병대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제주마 레클리스 병사에 대한 사연이 「The Saturday Evening Post」 신문에 게재되었다. 사람들은 레클리스 병장이 많은 해병대원을 구하고, 어렵고 막막한 전투 현장에서 병사들의 의지처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눈물을 흘렸다. 연일 감동의 물결이 미국 전역을 맴돌았다.
미국 청소년들은 신문에 나오는 기사를 보고 학교 선생님에게 모금 건의를 했다. 매일 TV를 통해 해병대 말의 근황을 듣고는 부모와 선생님에게 왜 말이 미국에 올 수 없는지 질문했다.
한국전쟁 영웅 레클리스 병사 이야기가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때 처음 말의 진로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하였다. 미국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군마 레클리스 병장이 부대 철수할 때 같이 가족처럼 지낸 해병대원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요청했다.
신문 기사를 읽은 미국 시민들은 “전쟁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돈이 없어 해병대원을 미국으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항의했다. 신문 기사를 읽은 신문 독자와 해병대원들은 신문사와 미 국방성에 항의했다. 어느 날 한 선박회사 대표가 군마 레클리스 병장을 일본 요코하마 항까지 데려오면, 말을 선박회사에서 책임지고 미국 항구까지 안전하게 수송하겠다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왔다.
▲ 군마 레클리스 병장 진급(1953년)(사진:USMC 미국해병대 사진작가)
미국 국방성, 미 해병 제1사단, SS Pacific 선박회사 간의 긴밀한 협조와 회의를 통해 레클리스 병장은 한국 땅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캠프 펜들턴(Camp Pendleton) 해병 제1사단 사령부로 가게 되었다. 이제 미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가 모두 이루어졌지만, 레클리스 병장이 한국 땅을 떠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말이 필요한 사료를 준비하고, 조련사 동행 문제를 토의했다. 그러나 검역, 통관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다.
▲ 화물선 SS 퍼시픽 트랜스포트호(사진:핀터레스트)
군마 레클리스 병장은 여러 달에 걸친 힘든 과정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다. 화물선 출항 전에 일본에서 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 레클리스 병장은 1954년 10월 요코하마항에서 화물선 SS 퍼시픽 트랜스포트(SS Pacific Transport)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SS Pacific Transport 호는 1954년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훈장을 받은 군마 레클리스 병장을 데려오면서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선박 회사 SS Pacific은 상당히 오래된 해운 회사였다. Kenneth J. Blume(1948~2021)의 《미국 해양산업 역사 사전 》에 따르면 SS Pacific는 일본 항공사와 하와이 호놀룰루에 본사를 둔 Matson Navigation Company와의 화물 가격 경쟁에 점차 밀려 회사 운영이 힘들어졌다. 1954년 말에 SS Pacific 대표 폴 아이 파겐(Paul I. Fagen)은 자신의 주식을 모두 매각하고, 보유한 선박은 다른 투자자들에게 이전했다. 선박회사는 3년 후 미국 증기선 라인(States Steamships Lines)과 합병되었다.
미 해병대원 레클리스 병장은 1954년 11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거친 태평양 바닷길을 건너왔지만, 레클리스 병사는 천진난만하고 태평스러워 보였다. 통관과 검역을 모두 마친 레클리스 병장은 에릭 패터슨 중위(Lt. Eric Pedersen)와 함께 배에서 내려 당당하게 걸어갔다. 레클리스 병장은 한국 땅과 다른 온화한 기후와 신선한 공기를 느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에릭 패터슨 중위가 이끄는 대로 조용히 걸었다. 신문 기자들이 미 해병대원 레클리스 병장 사진을 찍으려고 화물선 위로 올라왔다.
▲ 에릭 패터슨 중위가 화물선에서 하선하기
에릭 패터슨 중위가 화물선에서 하선하기 위해 위에서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둘러보니 많은 동료 해병대원과 환영을 나온 샌프란시스코 시민,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 에릭 패터슨 중위와 레클리스 병사 미국 항구 도착 (사진:USMC 미국해병대 사진작가)출처. Geer, Andrew Clare.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 1955, page 120 인용
미 해병 제1사단 2대대 에릭 패터슨 중위는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입항한 후 화물선 SS 퍼시픽 트랜스포트 호에서 말과 함께 내렸다. 부두에서 새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미 해병대를 상징하는 빨간색 천을 가슴에서 꺼내 레클리스 병장을 감싸주었다.(계속)
▲ 미 해병대원 레클리스 병장과 화물선 SS 퍼시픽 트랜스포트호(사진:USMC 미국해병대 사진작가)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