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우를 물리친 노인 이야기 - 동부면 율포 이야기
거제 동부면에 한 노인은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경치가 좋기로 소문이 나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것저것 챙겨 여장을 꾸렸답니다.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갔습니다. 산을 넘고 넘어 강원도에 도착했습니다. 어서 빨리 금강산 일만이천 개의 봉우리를 보고 싶었습니다. 또 아홉 개의 암자도 보고 빼어난 경관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일만이천 개 봉우리는 커녕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라도 보면 소원이 없겠는 걸.”
다리도 아프고 맥이 빠진 노인은 할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야 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고 있는데, 스님이 길을 가로막고 누워있는 게 아닙니까? 스님의 태도가 기이했지만 구경 못한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어 물어보기로 했지요.
“스님, 여기 금강산의 경치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어디로 가면 제대로 구경할 수 있을까요?”
“조금만 더 올라가소. 굴이 나올 거요. 그런데 절대 들어가지는 마소. 밖에서만 구경해야 한다오.”
그 스님이 일러준 대로 올라가자 정말 조그만 굴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은 빼어난 경치가 아니었습니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깜깜한 굴 안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습니다. 눈앞에는 수염을 팔자로 늘어뜨린 낯선 도사가 보였습니다. 노인은 그 도사에게 아까처럼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도사는 조금 더 올라가면 꽃밭이 나올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밖에서만 구경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정말 꽃밭이 있었습니다. 꽃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신신당부했던 도사의 말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꽃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지말라는 곳에 들어갔지만, 정작 아름다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꽃밭 구경을 하고 나오자, 초가 오두막에 홀로 앉아 바느질하는 처녀가 보였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려고 노인은 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처녀는 재주를 넘고 넘어 어느새 여우로 변했습니다. 여우는 폴짝폴짝 뛰면서 노인을 유혹했습니다. 화가 난 노인은 몽둥이로 여우를 사정 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가지고 있던 뾰족한 바늘이 닿자마자 몽둥이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깜짝 놀란 노인은 여우 앞에 납작 엎드려 빌었습니다. 그러고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면서 잠시 기다리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던 길로 급히 되돌아간 노인은 조금 전에 만났던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꽃밭에 들어가 여우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하던 도사는 혹시 적선을 베푼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노인은 남생이를 살려준 기억이 얼핏 났습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 남생이를 산 채로 매달아 불에 구워 먹으려고 했을 때 재빨리 낚아채 강가에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도사는 하얀 종이에다 무언가 긁적이더니 노인에게 건넸습니다. 바람이 불 때 종이를 강가에 던져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사가 시키는 대로 하자 어디선가 배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그 배는 노인을 바닷속 용궁의 용왕에게 데려갔습니다. 그 때 용왕 옆에 서 있던 젊은이가 노인에게 절을 했습니다. 어릴 적 구해준 남생이가 바로 용왕의 아들이었답니다.
용왕과 함께한 그 자리에 한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여우가 사람으로 환생할 때 잡아먹을 천 명의 명단을 들고 온 것입니다. 명단을 확인한 용왕은 노인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자기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노인의 이름을 뺐습니다.
바느질하는 처녀로 둔갑하고 있던 여우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일났지요. 천 명에서 한 명이 모자라는 바람에 환생은 커녕 용왕이 내린 불벼락을 맞고 죽어버렸답니다.
용왕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노인을 배웅하며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그러고는 거제도 집으로 가는 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도랑에 심으라고 했습니다. 용왕이 일러준 대로 노인은 집 주변에 천 그루의 밤나무를 촘촘하게 심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나무마다 밤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일까요? 수년 후 불벼락을 맞아 죽은 여우의 넋이 호랑이가 되어 돌아왔답니다. 호랑이는 노인을 죽이려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지요. 밤나무 수를 다 헤아려야 노인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촘촘해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앙갚음을 하려 호랑이는 헤아리고 또 헤아리는데, 그 틈새 끼어있던 잡나무가 말을 했습니다.
“나도 헤아려라, 한날한시에 심은 나무니까.”
“나도 헤아려라, 한날한시에 심었으니까.”
잡나무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다 날이 새고 말았어요. 날이 밝아지자 호랑이는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노인과 그의 자식들은 내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 밤나무개를 율포라고 부른답니다.
- 옛날 옛적 거제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0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