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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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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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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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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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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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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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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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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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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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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시청(이야기파주)】덕진산성 마루에 임진강과 가까운 쪽으로 10여평의 평지가 있는데 봉우리가 강가로 돌출된 형상을 하고 있어 임진강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로 이곳에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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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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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시청(이야기파주)】정확히 419년 전. 1592년 선조대왕 일행은 엄청난 폭우 속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임진나루를 건넌다. 임금은 이렇게 수도를 버리고 야반도주했지만 뜻 깊은 한 장수는 잘못된 작전에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 강을 거꾸로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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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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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감찰공(監察公) 이원수(李元秀)는 강직(剛直)하고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녹발홍안(綠發紅顔)의 청춘시대에 일찌기 강원도 강릉(江原道 江陵)에 찰방(察防)으로 있을 당시 장가를 들었으니 그 부인은 당시 명사(名士)로 경향에 이름이 쟁쟁하던 진사 신명화( 進士 申命和)의 귀동 따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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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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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황진이(黃眞伊)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徐花澤 朴淵 黃眞伊)의 하나로서 조선왕조 오백년 간의 대표적 명기(名妓)임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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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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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령산하(鶴翎山下) 금촌리는 한일합방 후 현 파주시청이 소재하고 있는 골짜기로 옛날 교하현청이 아골(衙谷)에 있을 당시 말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던 지역인 마무리(馬武里)에 10여가구가 살고 있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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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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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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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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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를 역임하고 누대 고령에서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高靈)으로 하였다. 칠세손(七世孫)인 엄헌공 신장(嚴軒公申檣)은 1382년(우왕 8)에 탄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능숙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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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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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아울러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 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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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등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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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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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군내면 백학산 준령이 서남맥으로 덕진당을 거쳐 임진강변을 끼고 내려와 삼선산(三仙山) 우뚝솟은 봉우리에서 양편으로 펼쳐진 지맥 내령끝머리 쌍태봉(형제산)이 있는 아래 한수동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옷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찬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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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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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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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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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의 일이다. 지금의 판문점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 옥화는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짝사랑에 가슴을 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옥화에게 참으로 딱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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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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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명산 동남백내력 교하면 교하리 산 1번지 끝머리는 벌판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 었는데 이 지역은 금촌 쇠곳나루(金串津)에서 배를 건너 벌판 가운데 길을 지나 이산 달걀뿌리에서 산기슭을 휘돌아 길 옆 행상독아를 지나 4km거리 옛날 교하군 청이 있는 교하리를 왕래하게 되는 큰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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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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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국 전쟁으로 어수선한 고구려 말 영양왕 시절, 부모가 늙어서 쇠약해지면 산에 토굴을 파서 죽기 전에 생매장을 하고 돌아가신 후 매장하는 일시적인 순장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늙어 병든 아버지가 있어 산에 굴을 파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토굴속에 넣어두고 지게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집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손자가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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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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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은 서기 1539년 9월(중종34) 월롱면 영태리 에서 출생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 (朴淳)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 峰 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白光勳), 이 달(李達)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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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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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면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으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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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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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탄현면 법흥 4리 벌두매 산골짜기 호장산하 오솔길 옆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피난을 가던 부부가 힘에 겨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따라오던 아이가 울며 물을 달라고 보채니 여름날씨가 너무나 짜증이 난 그들 부부가 아이를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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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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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감악산 동북맥 준령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에 옛날 이씨들이 정착 수십 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수백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인심이 후둑하여 늘 손객이 끊일 날이 없자 손님 치닥거리에 너무나 지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안오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 늘 고심하던 중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그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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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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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고장 탄현면 금산리 한록산(漢麓山) 금무봉은 월롱산 서맥으로 씩씩하게 내려와 우뚝솟은 봉우리로 아름다운 옥녀가 춤을 추는 현용이라 하여 불려진 명산이다. 주위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 삼도품을 거쳐 황해바다로 유입되고 조수물이 오르내리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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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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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적에 여러번 개성·양주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디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척박하고 토산물이 보잘 것 없어 세금과 부역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모두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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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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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탄현면 성동리 요풍동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은 나무를 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돌을 산 밑으로 굴리면서 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씨가 굴린 돌이 밑으로 굴러가 산 중턱에 있던 호랑이 굴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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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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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민간문역으로 주철(鑄鐵)사용을 완화시켰으며 도성에 육위군영을 세우는 한편 12절도를 4도호와 동서북 방어 진사, 현령, 진장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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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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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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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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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산은 옛날 경기 오악(松岳, 紺岳, 雲岳, 北岳, 冠岳)중에 하나로서 감악사(紺嶽寺), 신암사(神岩寺), 운계사(雲溪寺)등이 있었고 정상에 산신과 설인귀(薛仁貴)를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감악사(紺嶽祀)가 있었다 한다. 고려시인 임춘(林春)은 감악산의 형상을 잘 표현한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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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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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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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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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눌노천이 흐르는 하류 파평면 금파리 지역 임진강변 언덕에 궁터가 있었으니 이는 옛날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고을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현 금파리와 장파리 구역 십여리나 되는 편편한 장마루 언덕이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고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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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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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조 중종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조광원(曺光遠)선생은 월롱면 도내리에 묘가 있는 분으로써 예조참의로 있을 당시 1540년 천추사로 중국 명나라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웅주고을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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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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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말 유관(柳寬)은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급제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면서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 공신이 된 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 관사를 겸직하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좌빈객을 역임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高麗史)를 수고하는 등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대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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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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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말 조선조에 조연(趙涓)이란 충신이 있었다. 환조(桓祖)(조선 태조의 부)의 장녀 정화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87년(고려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을 호위하면서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조선 태종)을 돕는 등의 공을 세운후 좌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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