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궁예왕 2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자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승복(僧服)을 입고, 맏아들을 청광(靑光)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神光)보살이라 불렀다. 그리고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 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하여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200여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경문 20여권을 자술(自述)하여 강설하기도 했는데, 석총이 그것을 사설(邪說)이라 지적하자, 궁예는 노하여 철퇴로 석총을 때려 죽였다.
궁예가 이렇듯 비법(非法)을 자행하므로 부인 강씨(康氏)가 간하자, 궁예는 오히려 자기가 독심술(讀心術)이 있다 하며, 강씨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무쇠 방망이를 열화에 달구어서는 그녀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
이렇듯 의심이 많고 잔인 무도했던 궁예 때문에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는 물론 양민들도 죄 없이 죽어 갔다. 이리하여 민심은 흉흉해져서, 마침내 궁예에게서 떠나고, 그때 시중(侍中)이었던 왕건을 새 왕으로 옹립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마침내 태봉국 정개(政開) 5년 6월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 네 장수가 왕건을 찾아가, 궁예를 폐하고 왕위에 오를 것을 권장했다. 왕건은 처음엔 완강히 거절했으나, 이 네 장수와 부인 유씨의 간청으로 마침내 거사를 결심하니 따르는 군사와 백성이 구름 떼와 같았다.
한편 궁예가 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명성산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 때 왕건군이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궁예군은 대부분 명성산 앞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쳐 부양(斧壤, 지금의 平康)에 이르렀으나, 얼마 후에 그곳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 때 미처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들은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이 산을 울음산, 곧 명성산(鳴聲山)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삼국사기》 제50권, 열전(列傳) 제10 궁예편의 다음 기록들과 관련된다.
......(前略)......夫人柳氏聞諸將之議 迺謂太祖曰 以仁伐不仁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 太祖諸將扶衛 太祖出門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前後奔走來隨者 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鼓譟 以待者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迺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 民所害弓裔 起自唐大順二年 至朱深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 抱川郡誌, 1984. >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