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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가담항설의지식창고 옛날 옛적에 인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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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에 인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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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문화】 고구려 장수왕 4년(416)의 어느 날이었다. 인도에서 온 스님 천축조사와 왕이 마주 앉았다. 왕이 먼저 말했다.
2025.08.31
【문화】 해안 매립으로 생긴 남구 용현5동, 지금은 철거된 개항 100주년 탑 부근에 작은 무인도 낙섬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바다를 매립하면서 섬 전체를 까뭉개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일제 때 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긴 제방 끝에 낙섬이 있었다. 몇몇 문헌에는 이 낙섬을 ‘잔나비(원숭이) 섬’이라는 뜻의 ‘원도(猿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2025.08.29
【문화】 1232년, 몽골군대가 이 땅을 침략하였을 때 고려 고종 임금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부를 강화도로 옮겨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2025.08.31
【문화】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고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
2025.08.29
【문화】 지루한 장마가 끝나자 강화도 하점면에 사는 한 노파가 밀린 빨래를 들고 집을 나섰다. 노파가 집 가까운 연못에서 빨래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연못 한가운데로 오색 무지개 빛이 비치고 이어 연못의 물이 솟구치면서 옥(玉)으로 만든 함이 하나 올라왔다.
2025.08.29
【문화】 예로부터 강화도에는 목장이 많았다. 전쟁 때 쓰기 위한 말을 그곳에서 길렀다. 그 중에서도 양도면 진강산의 목장은 명마(名馬)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진강산의 말은 용맹스럽고 영리한 데다 달리는 것이 바람과 같았고 온 몸은 흰색인데 비해 갈기와 꼬리는 푸르스름한 색깔을 띤 모습이었다.
2025.09.01
【문화】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2025.08.31
【문화】 남동구 구월동에 ‘오달기(또는 오닭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곳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 쪽에서 서울로 가거나 수원 쪽 방향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길가에 자연스럽게 주막이 생겨났다.
 
◈ 최근등록순
2025.09.01
【문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은 학문에 열중한 탓에 눈병을 앓아 온천물로 목욕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온천이 없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2025.09.01
【문화】 지금의 부개동은 옛 지명이 마분리(馬賁里)였다. 아마도 큰 말무덤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부평동 일대는 대정리(大井里)였는데 그 뜻으로 보면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25.09.01
【문화】 원적산은 깊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살았다. 그리고 맛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많아서 음력 삼월부터 석 달 동안 여인네들이 쑥부쟁이와 두릅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날이 지남에 따라 원추리, 취나물, 고비, 홑잎나물 등을 뜯었다.
2025.09.01
【문화】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2025.09.01
【문화】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2025.09.01
【문화】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2025.09.01
【문화】 기미년 3월, 한반도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도 3월 6일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시위를 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으며, 같은 날 강화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2025.09.01
【문화】 계양동의 다남동 마을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랑리라고도 불리웠다. 역시‘다남’처럼 남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 에서는 옛날부터 남자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
2025.09.01
【문화】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2025.09.01
【문화】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2025.09.01
【문화】 계양산 남록에 장사굴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이 있었다. 입구가 땅바닥에 붙어 있는 데다가 앞에 소나무와 관목들이 무성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구가 좁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바람이 없이 아늑하고 빛도 적당히 들어오고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2025.09.01
【문화】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대왕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에 왔다. 그가 대왕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대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거기는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였다.
2025.09.01
【문화】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 출신의 왕비를 제국대장공주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
2025.09.01
【문화】 계양산은 해발 395미터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자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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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문화】 서곶과 검단의 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게 갯벌이 드러났다. 주로 부녀자들이 이 시간에 갯벌로 나가 낙지, 게, 소라, 조개, 맛조개 따위를 잡았다.
2025.09.01
【문화】 백석동의 한들방죽은 거지방죽이라고도 부른다. 서곶과 검단의 해안 쪽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이곳도 지난날 바닷물이 드나드는 드넓은 갯벌이었다. 한들 마을 앞의 갯벌은 경사도가 낮아 썰물 때면 어머어마하게 넓게 드러났다.
2025.09.01
【문화】 검단 사거리의 옛 이름은 원현(院峴)이다. 그곳은 역참이 있었고 지난날 지방 관장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반드시 하루를 묵어갔다.어느 해 새로 부임해 오는 신관 사또가 이곳 원현에서 묵었다.
2025.09.01
【문화】 경서동에는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흙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211호)가 있다. 그리고 경서동 해안에서 서곶로 국도까지 이어진 길 좌우에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를 굽는 가마가 십여 개 있었
2025.09.01
【문화】 검암동 앞산을 허암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 전기의 강직한 관리이자 도학자이며 차(茶)와 술에 심취해 많은 일화를 남긴 정희량의 호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산의 북쪽 중턱에는 그가 찾아와 조용히 숨어 살았던 암자 흔적이 남아 있다.
2025.09.01
【문화】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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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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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