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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요
▪ 다큐먼트 개요
2019년 6월
2019년 6월 8일
가시리
about 고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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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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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가요(高麗歌謠)

고려시대에창작된 시가(詩歌)로 주로 민중 사이에 널리 전해진 속요(俗謠)를 뜻한다. 넓은 뜻으로는 고려시가(高麗詩歌) 모두를 포함하며 ‘고려가사(高麗歌詞)’ ‘고려가요’, 줄여서 ‘여요(麗謠)’, 또는 ‘고려장가(高麗長歌), 또는 '고속가(古俗歌)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그러나 좁은 뜻으로는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한문계(漢文系) 시가는 경기체가(景幾體歌) 또는 별곡체(別曲體)라 하고, 《청산별곡(靑山別曲)》 《서경별곡(西京別曲)》 《만전춘(滿殿春)》 《가시리》 등의 시가를 흔히 속요라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작된 시가(詩歌)로주로 민중 사이에 널리 전해진 속요(俗謠)를 뜻한다. 넓은 뜻으로는 고려시가(高麗詩歌) 모두를 포함하며 ‘고려가사(高麗歌詞)’ ‘고려가요’, 줄여서 ‘여요(麗謠)’, 또는 ‘고려장가(高麗長歌)’
 
향가 문학이쇠퇴한 후 고려의 시가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갖지 못한까닭에 사실상 정상적인 발달을 보지 못했다고들 말한다. 고려시대에는한문학이 문학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문학적 위치에서겨우 명맥만을 유지해왔고, 평민문학과 귀족문학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문학을 초래했으니, 경기체가가 귀족의 문학이라면 속요는 평민의 것으로 , 두 형식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런데 경기체가와 속요는 형태상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하여, 고려시대의 시가를 전체적으로 포괄하여 가요나 장가라는 명칭보다는 ‘별곡’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즉, 신라 사람들이 자기네의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일컬은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사람들은 중국계(中國系)의 악부(樂府)니 악장(樂章)이니 하는 정악(正樂) 또는 아악(雅樂)에 대하여 자기네의 노래, 즉 속악(俗樂) 또는 향악(鄕樂)의 노래 이름을 ‘별곡’이라는 말을 붙여 지었기 때문이다. 그 형식면에서 보면 《한림별곡》이나 《청산별곡》 등은 전혀 다른 계통처럼 보이지만, 따져 보면 형태상의 특징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 음수율(音數律)은 주로 3음절이 우세하고, 둘째, 음보율(音步律)은 일반적으로 3음보이며, 셋째, 구수율(句數律)은 6구를 기준으로 하여 다소의 가감(加減)을 보이고, 넷째, 대체로 전후 양절로 구분되는데 《청산별곡》 등에서는 후렴구(後斂句)가 후절(後節)이 된다. 다섯째, 일률적으로 여러 연(聯)이 중첩되어 한 가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형은 점차 붕괴되어 변격형(變格型)을 이룬다. 이 가요의 형식은 신라시대 향가의 형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특히 《정읍사(井邑詞)》 《정과정곡(鄭瓜亭曲)》 《사모곡(思母曲)》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단련(單聯)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는 향가와 같으나 음수율에서 3음절이 우세하고, 음보율은 3음보가 우세하며, 대체로 전후 양절(兩節)로 나눌 수 있는 점이 그 기본형에 접근하고 있다. 신라 향가 《처용가(處容歌)》가 고려에 이르러서는 형식이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려시가는 향가의 발원적(發願的)인 기능이 상실된 나례(儺禮)·잡희(雜戱)·백희(百戱) 등 무대 위에서 불리는 무악곡(舞樂曲)이 요구됨에 따라서 생겨난 형식이다. 이와 같이 향가문학(鄕歌文學)이 쇠퇴한 후 고려시가는 사실상 정상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가문학(詩歌文學)의 발달이 전혀 침체된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을 따름이다.
 
고려시대에는 한문학(漢文學)이 문학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문학적(民俗文學的) 위치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고, 평민문학과 귀족문학이라는 두 가지 문학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경기체가가 귀족의 문학이라면 속요는 평민문학이었던 것이다. 속요는 시조 이외의 시가, 즉 장가의 한 형식이 되는 것으로 평민들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우리글이 만들어진 후, 성종 때에 《악학궤범(樂學軌範)》 《악장가사(樂章歌詞)》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문자화(文字化)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구전되어 온 가요가 문자화된 일례를 《정과정곡》에서 보면, 이 가요가 《악학궤범》에 전하였으나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한역(漢譯)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구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고, 그 형식이 향가의 10구체(句體)와 비슷한 점으로 보아서, 향가의 한 발달 형식으로서의 고려가요로 그 맥을 이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전되어 온 평민문학으로서의 속요는 그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음이 특징이다.
 
《청산별곡》은 작품의 세련된 면모로 보아서, 《쌍화점(雙花店)》은 기록에 힘입어 개인이 지은 시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봄 직하나 알 길이 없고, 《서경별곡》 《가시리》 등은 원래 민요였을 것인데, 궁중악곡(宮中樂曲)으로 채택되면서 다듬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귀족문학으로서의 경기체가는 대체로 작자가 알려져 있다.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의 제유(諸儒), 《관동별곡》 《죽계별곡》은 안축(安軸)이, 《상대별곡(霜臺別曲)》은 권근(權近)이 짓는 등 대체로 무신집권(武臣執權) 이후에 대두한 신흥사대부 출신의 문인들이다. 내용상 특징으로는, 경기체가가 한문에 의존한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에 빠진 듯한 느낌을 주며, 대체로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 서술하였음에 대하여, 속요는 평민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이 허식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내용은 그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문자가 없던 시대라 하더라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져, 문자로 정착될 때까지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속요의 내용은 다분히 체념적이고 해학적인 데가 있는가 하면, 세속을 초탈한 인생관이 담긴 선적(禪的)인 관조가 그대로 나타나 있기도 하다. 체념적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서정성을 지녔음이 이 속요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이 속요의 서정성은 귀족층의 가요인 경기체가가 지극히 형식적이고 음풍영월식(吟風詠月式)인 데 비하여 그 내용이 매우 함축적인 데 있다. 속요의 형식은 한 마디로 우리의 전통적인 음수율에 가까운 3·3조(서경별곡), 3·3·2조(청산별곡), 3·4∼4·4조(만전춘 등)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우리의 성정(性情)에 알맞은 율(律)로 알게 모르게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시조와 가사에서와 같은 엄격한 율조상(律調上)의 제약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불렸다는 점이 그 특징이며, 분절성(分節性)을 전형적으로 지니고 있음도 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또 행(行)과 행 사이에 후렴을 삽입함으로써 한층 흥을 돋우는 맛을 주기도 한다. 사설 가운데 ‘아소 님하’ ‘아으’ 등은 엄격한 의미의 후렴은 아니나 후렴의 구실을 하고 있고,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딩아돌아’ ‘동동다리’ 등은 해학적으로 삽입한 의성(擬聲)이 그대로 후렴이 되고 있다.
 
속요의 또 하나의 형태상의 특징은 구전과정에서 노래가 여러 모양으로 변모되어 그 원가(原歌)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현재 전하는 속요 중에서도 그 내용이 서로 섞여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정과정곡》 제3구와 《만전춘》 제3절이 그러하고, 《서경별곡》 제l2절과 《정석가(鄭石歌)》 끝연에 나오는 것도 같은 구절이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의하면, 현전(現傳)하는 《서경별곡》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서경과 대동강(大同江)의 노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경별곡》 전반은 서경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고, 후반에서는 대동강변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 두 개의 비슷한 노래가 구전중에 합쳐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속요는 우리 옛 시가 중에서도 가장 함축성이 있다 할 수 있고, 이러한 함축성은 시와 산문(散文)을 구분하여 주는 좋은 요인이 되기도 한다. 현전하는 가요 외에도 가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 <악지> 등에 작품 이름만 전하는 것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문학을 대표할 만한 시가 작품이 많았으리라고 추측되나, 이제 그 자취를 찾을 길은 없다. (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및 동아대백과사전 정리)
 
 

1.1. 속요(俗謠)

상층문화권의정통가요인 가곡(歌曲) 혹은 시조 등에 비해, 정제되지 못한 노래나아정(雅正 : 아담하고 바름)함을 잃은 노래. 일반적으로는 정가(正歌)와대립되는 노래, 곧 잡스럽거나 속된 하층문화권의 노래라는 뜻으로 속가(俗歌) 또는 잡가(雜歌)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속요’라는 명칭은 경기체가(景幾體歌)와 더불어 고려시대 가요의주요한 몫을 차지하는 특정한 장르 명칭으로 통용된다. 즉 조선 후기에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창출된 잡가(속가)와는 별개의장르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속요라 하면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경기체가와 더불어 공존하였던 노래들을 가리키며 속악가사를 통해 그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때 고속가(古俗歌)나 장가(長歌)로 불리기도하였으나 별로 쓰이지 않고 있다.
 
한편 속요와유사한 개념으로 ‘속악가사’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 둘은 구별된다. 속요는 특정한 형식적 구조와 담당층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장르 명칭이다. 이에 비하여, 석악가사는 ≪고려사 高麗史≫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에실려 있는 모든 가요를 비롯하여 ≪악학궤범 樂學軌範≫·≪악장가사 樂章歌詞≫·≪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 등의 악서(樂書) 또는가집(歌集)에 실려 있는 노래 가운데 고려의 궁중속악으로 쓰인 가요를총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속악가사에는 속요를 비롯하여 향가·불가(佛歌)·무가(巫歌)·경기체가·지방민요계통의 노래 등이 포괄된다.
 
〔형성〕
 
속요가 언제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존작품의 구조와 음악과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형성과정을 추정하는 견해가있다. 이는 현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상당수의 작품이 별곡(別曲) 혹은별사(別詞)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데 주목하고, 이 별곡체의 형성과정의하나로 속요의 생성을 밝히는 방법이다.
 
즉, 별곡 혹은별곡체 가요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宋)나라로부터 대성악(大晟樂)이들어옴에 따라 고려의 전통가악(歌樂)에 일대변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생성되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외래음악인 대성악이 전래되면서전통가악과 몇 단계의 융합되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별곡 혹은 별곡체가요가 생성되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① 처음에는외래악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그 가락에 알맞은 재래의 사설을 찾아 새형태의 우리말 사설이 지어졌을 것이다. ② 재래의 사설과 새로 들어온가락이 맞지 않을 때 그 조절을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했을 것을예측할 수 있다. ③ 나아가서 새로운 가락에 맞는 사설이 창작되어 정형률로서토착화하는 과정의 3단계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하여 〈청산별곡 靑山別曲〉·〈서경별곡 西京別曲〉·〈만전춘별사 滿殿春別詞〉 같은 속요는 제2단계에, 즉 새로 들어온 가락에 재래의 사설을 합성하여조절하고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가령 〈청산별곡〉은 〈청산곡〉이라 할 만한 재래의 사설과 〈바犬노래〉라 부름직한 재래의사설을 새로 유입된 어떤 새 가락에 맞추어 합성함으로써 생성된 노래로볼 수 있는 것이다. 〈서경별곡〉 또한 제1연의 서경에 관련된 4구체민요형의 사설과 제2연의 당대에 유행하였던 민요사설 및 제3연의 대동강에관련한 재래의 민요사설을 합성하여 재편성함으로써 생성된 노래로 본다.
 
〈만전춘별사〉도새로운 악곡에 맞는 가요로 생성괸 것으로 보여딘다. 각 연마다 표현방법이다르고 형태 및 어법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여러 형태의 재래사설을 새로운 가락에 맞추어 이것저것 합성한 뒤 맨 끝에 “아소 님하원倨평沂(遠代平生)애 여힐基 모犬督새”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와같이속요 중 상당수는 새로 유입된 외래악곡에다 재래의 민요사설을 대입하여합성, 조절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별곡이나별사 계통의 속요는 그 생성의 상한선이 12세기초 예종대의 대성악 수입이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로로 생성된 속요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제3단계인 창작가요로서 토착화되는 시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곧 〈한림별곡〉 같은 경기체가 양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속요가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거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동동 動動〉의 경우는 애초에 ‘달거리노래’라는 지방 민요가 있었고, 그것이장생포(長生浦) 지방의 군악(軍樂)으로 수용된 다음 다시 궁중의 무악(舞樂)으로재편성되는 경로를 밟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자층및 수용자층〕
 
속요는 대부분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속요의 장르 생성이 재래의 민요를새로운 궁중무악(宮中舞樂) 혹은 연악(宴樂)으로 재편하여 수용한 데에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속요의밑바탕을 이루는 민요는 하층민의 집단적인 공동작품으로 작자를 알수 없는 것이 당연하EK. 그러한 민요사설을 고려 후기에 왕실의 주변인물인권문세족(權門世族)이 궁중악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속요가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어느 개인이 뚜렷한 창작의식을 가지고 창출한 개인창작가요가아닌 바에야 어느 특정인을 작가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때속요를 민요와 동일시하여 그 작자층을 고려시대의 민중층으로 이해한적이 있었다. 그것은 속요의 대부분이 민요 특유의 구조(반복과 병치의원리에 의한)와 표현(공식적·관습적 표현과 전형적 상징 사용), 언어(민중의 일상어·속어·비어·비문명어), 보편적율격(3음보격 중심의 율격)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데에서 의심의 여지가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모든속요가 일률적으로 민요일 수는 없으며, 그 가운데에는 〈한림별곡 翰林別曲〉의작자층에 못지않은 상층 지식인의 작품도 있을 수 있다는 이론(異論)이제기되었다.
 
가령 〈청산별곡〉의경우 그 이미지가 관용적이 아니고 구성에 있어서 동적이면서 논리성을일관하고 있으며 고도의 상징과 긴장감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그 작자가 민중층일 수는 없으며, 지식인의 개인창작가요일 가능성이크다는 것이다.
 
또한 〈쌍화점 雙花店〉의 경우 제2연이 ≪고려사≫ 악지에 〈삼장 三藏〉이라는 제목으로한시화(漢詩化)되어 있다. 〈삼장〉은 충렬왕대의 행신(倖臣)인 오기(吳祈)와김원상(金元祥), 그리고 내시인 석천보(石天補)·석천경(石天卿) 등이 관기(官妓)나 관비(官婢) 혹은 여무(女巫) 중에 노래 잘하는 이를뽑아 가르쳐 궁중에서 부르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해설을근거로, 역시 이들 지식인 계층이 관여한 개인창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주장이 나왔다. 나아가 이보다 더욱 극단적인 견해로는 오늘날 전하는모든 속요는 궁중악으로 쓰여진 가요였으므로, 민간계통의 노래일 수는결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속요는 ≪고려사≫ 악지의 속악조를 비롯하여 ≪악학궤범≫·≪악장가사≫·≪시용향악보≫ 같은 궁중악을 수록한 문헌에 채록되어 있으므로 그 담당층은 왕과 권문세족을중심으로 하는 상층 지식인 계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요가 비록궁중악으로 소용된 가요였다 할지라도 그 사설의 원천은 민요에 있으므로본래의 작자층은 민중층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창작하여향유한 왕실과 그 주변인물인 권문세족은 수용자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하겠다.
 
〔형식〕
 
속요의 형식적특성은 율격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속요는특정한 정형적 형태를 충실히 따르는 ‘정격형’과 그러한 틀을 어느정도 벗어나는 ‘변격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격형은 ① 음수율이 주로 2·3·4음절로 되어 있으나, 3음절이 압도적으로우세하다. ② 음보율은 일률적으로 3음보로 되어 있으나, 가끔 4음보도끼어 있다. ③ 구수율(句數律)은 별반 통일성이 없다. ④ 대체로 후렴구를가졌다. ⑤ 일률적으로 여러 연이 중첩되어 한 가요를 이룬다는 점에서공통성을 보인다. 〈동동〉·〈처용가 處容歌〉·〈쌍화점〉·〈서경별곡〉·〈청산별곡〉·〈정석가 鄭石歌〉·〈가시리〉가 이에 해당한다.
 
변격형은 ① 음수율은 주로 2·3·4음절이 많으나 4음절이 우세한 경향을보이며, ② 음보율은 3음보와 4음보가 번갈아 사용되나 4음보가 우세한경향을 보인다. ③ 구수율은 별반 통일성이 없고, ④ 후렴구가 차차소멸하여가는 경향을 보인다. ⑤ 여러 연이 중첩되어 한 가요를 형성한다는점에서는 공통성을 보인다. 〈이상곡 履霜曲〉·〈만전춘별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속요는처음에 특정한 형태를 갖춘 정형시이던 것이 차차 시대의 변천에 따라그 정형성이 허물어지고 후렴구가 소멸되어가면서 정격형에서 변격형으로되는 과정을 겪는다. 나아가 새로운 시형인 시조에 접근해가는 양상을보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속요가 붕괴되어 시조가 발생한다는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편 속요의형식을 연의 중첩 여부에 따라, 단 하나의 연으로 된 단련체(單聯體)와몇 개의 연이 중첩되어 이루어진 연장체(聯章體)로 나누어 파악하기도한다. 연장체는 다시 그 주제가 하나로 일관되어 있는 일제연장체(一題聯章體)와각 연마다 그 주제를 달리하는 분제연장체(分題聯章體)로 다시 나뉘어진다.
 
그리하여 일제연장체로는 〈서경별곡〉·〈가시리〉·〈정읍사 井邑詞〉를, 분제연장체로는 〈쌍화점〉·〈동동〉·〈만전춘별사〉·〈청산별곡〉·〈정석가〉를든다. 단련체 속요로 〈사모곡 思母曲〉·〈이상곡〉·〈처용가〉 등이 있다.
 
또한 속요의형식을 통사론적 구성요소에 따라 앞 시대의 사뇌가 형식과 관련하여살피기도 한다. 즉, 속요의 후렴을 제거하고 문맥적 의미와 종결어미에따라 그 형식을 재구성할 경우 〈정읍사〉와 〈이상곡〉은 10구체 사뇌가형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가시리〉는 8구체 사뇌가와 같은 단순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동동〉·〈처용가〉·〈쌍화점〉·〈정석가〉·〈만전춘별사〉는 10구체 혹은 8구체 사뇌가 형식의 전체이거나 일부를 반복한 복합 형식으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요의특징적인 형식구조는 ① 연장체로 되어 있다는 점, ② 3음보격이 중심이라는점, ③ 후렴구(혹은 여음구)를 지니고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하는것이 일반적이다.
 
〔주제〕
 
속요의 주제는남녀간의 강렬한 사랑 혹은 그에 따른 이별의 애틋함을 담은 것이 주류를이루고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서경별곡〉·〈가시리〉·〈동동〉·〈이상곡〉·〈만전춘별사〉를들 수 있고, 〈정석가〉·〈사모곡〉·〈상저가 相杵歌〉·〈쌍화점〉 등도 이러한 주제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청산별곡〉의주제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상이한 견해가 맞서 있다. 어떤 이는 대부분의다른 속요처럼 ‘짝사랑의 비애’ 혹은 ‘실연으로 세상을 등진 도피의노래’로 본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삶에의 강인한 집착을 담은적극적인 현실참여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또 고려 후기의 사회상을반영한 노래로 보아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농민집단의 현실을 담은노래’로 파악할 수도 있다.
 
혹은 ‘12·13세기에극렬하게 일어났던 농민·천민의 난에 가담한 하층민의 참담한현실을 담은 노래’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동〉의 경우도 단순히남녀간의 연정을 담은 것이 아니라 월운제의(月運祭儀)에 관련한 송도(頌禱)의노래로 보는 이도 있다.
 
〔표현기교〕
 
속요는 대부분그 시대의 민요가 궁중에 직접적으로 혹은 재편성되어 수용된 가요이므로, 그 표현기교 면에서도 민요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
 
먼저 민요는구비시가(口碑詩歌)이기 때문에 표현의 측면에서 속요 또한 구비시가로서의여러 가지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속요는 민요의 3대 특징인반복과 병치(橙置), 후렴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 이 중에서 병치는 반드시한 쌍의 행(行)으로 존재하며, 그 쌍은 대응되는 구조를 취한다는 특색을보여준다.
 
그 대응하는양상에 따라 속요를 나누어보면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병치되어있는 두 행의 의미가 일치하는 동의적(同意的) 병치의 경우(서경별곡·사모곡)이다. 두 번째는 앞 행의 단어 하나를 채택하여 뒤 행을 이루는 연결에 의한병치, 즉 종합적 병치(정석가)이며 세 번째는 뒤 행이 앞 행의 상황을구체화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구체적 병치(청산별곡·가시리)이다. 넷째는 운(韻)이라고 할 만한 동일한 단어의 반복 및 어미의 반복을통하여 통일된 구조를 보여주는 통사적 병치(사모곡·이상곡·만전춘별사)를들 수 있다.
 
다만 속요는그 수용자층이 왕을 비롯한 왕실 주변의 인물(권문세족·기녀등)들이었다. 또 궁중의 무악 혹은 연악으로 소용되었기 때문에 민요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범주를 선택하여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요와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민요는원칙적으로 노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고통과 현실 체험 및 애환을담은 내용이 주류를 이루면서 그것이 노동요(勞動謠)로 나타난다. 혹은그러한 고통과 비탄의 감정을 잊기 위한 생활의 지혜로 여가를 틈타향락과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유희요(遊戱謠)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속요는 이와 같은 민요와는 기능을 달리하므로 노동이나 고통스런삶의 현장에서 지어진 민요보다는 향락 자체를 추구하는 상층인의 기호에맞는 민요에 한정된 수용을 보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미의식〕
 
대부분의 고려속요는미적 범주의 측면에서 볼 때, 우아미를 바탕에 깔면서 비극미를 구현하는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읍사〉·〈사모곡〉·〈동동〉·〈서경별곡〉·〈청산별곡〉·〈만전춘별사〉·〈이상곡〉·〈가시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속요의 시대배경이 되고 있는 고려 후기의사회 현실이 투영된 때문으로 보인다. 즉, 이 시대는 잦은 내우외환으로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고, 그에 따른 삶의 파탄과 비극적인 현실은결코 현실을 우아하게만 바라볼 수 없게 하였다.
 
그렇다고 비참한삶을 의탁하고 그 고통을 이겨낼 만한 뚜렷한 신앙이나 이상적인 정신원리도확고하게 설정되지 못하였다. 불교는 그 현실적 의의를 상실한 채 타락해갔고, 신흥사대부계층에 의하여 새로이 채택된 성리학도 확고한 정신원리로작용하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나 이념을 바탕으로한 숭고미의 구현은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 시기의숭고미는 무속집단을 중심으로 한 무가계통의 궁중무악에서 구현되었을뿐이다. 단 현세적이고 유한한 사랑을 이상화(理想化)·영구화(永久化)하여현실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할 때, 우아미가 숭고미와 결합하여 표출되는예를 〈정석가〉에서 볼 수 있다.
 
속요에서 풍자나해학에 의한 골계미의 구현도 찾아보기 어려운 범주이다. 왜냐하면 골계미는숭고미와 함수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골계미가 즐겨 선택되려면우선 도전과 파괴의 대상이 되는 숭고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고려 후기에는그러한 숭고한 이념 혹은 사상체계가 확고하게 군림하지 못한 사상적공백기였던 때문이다. 따라서 숭고한 것의 급격한 전락이나 타락에 의한골계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속요는왕과 권문세족 등 상층지배계층에 의하여 수용된 것이어서, 그들 자신의정신원리를 골계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골계미의 구현은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자유분방한육체적 사랑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간혹 골계미가 드러날뿐이다. 이와 같은 자유분방한 성의 추구는 윤리의 급격한 전락을 가져오기때문이다. 〈쌍화점〉에 구현된 골계미가 그 예에 해당한다. 그밖에이념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오는 모순에 의한 골계미가 〈유구곡 維鳩曲〉에서나타난다.
 
〔자료〕
 
속요는 ≪악학궤범≫·≪악장가사≫·≪시용향악보≫에정착되어 전한다. 즉, ≪악학궤범≫에는 〈정읍사〉·〈동동〉·〈처용가〉·〈정과정곡 鄭瓜亭曲〉이 전하고, ≪악장가사≫에는 〈서경별곡〉·〈청산별곡〉·〈쌍화점〉·〈정석가〉·〈만전춘별사〉·〈이상곡〉·〈사모곡〉·〈가시리〉가전한다. 마지막으로 ≪시용향악보≫에는 〈상저가〉·〈유구곡〉 등이 전한다.
 
이 가운데 〈정읍사〉는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 백제가요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같은 문헌의 ‘고려속악조’에는 고종에서 충렬왕 때의 인물인 이혼(李混)의창작이라 하였다. 이로 보아 이 둘은 제목만 같은 별개의 가요일 것이고, ≪악학궤범≫은 전자보다 후자에 관련된 가요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와있다.
 
또한 〈정과정곡〉과 〈이상곡〉은 10구체 향가인 사뇌가의 잔영(殘影)으로 보아 속요에서는제외시키고 향가에 장르를 귀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사모곡〉과 〈가시리〉는 ‘전별곡적 형태(前別曲的 形態)’의 가요라 하여, 아직 속요의 형식적구조를 갖추지 못한 한 단계 이전의 가요로 다룬다. 이 가운데 〈사모곡〉은신라시대의 잃어버린 노래인 〈목주가 木州歌〉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바 있다.
 
한편 ≪고려사≫ 악지 및 열전(列傳)·≪증보문헌비고≫·≪익재난고 益齋亂藁≫·≪동국통감 東國通鑑≫·≪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등의 문헌에는 작품이전하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속요와 관련되는 듯이보이는 가요의 제목과 유래, 내용의 일부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자료들이상당수 보인다.
 
≪참고문헌≫ 韓國詩歌史綱(趙潤濟, 乙酉文化社, 1954), 麗謠箋注(梁柱東, 乙酉文化社, 1957), 韓國歌謠의 硏究(金東旭, 乙酉文化社, 1961), 國文學槪論(李秉岐, 一志社, 1965), 古詩歌論攷(李能雨, 宣明文化社, 1966), 高麗歌謠語釋硏究(朴炳采, 宣明文化社, 1971), 韓國歌謠의 硏究(李明九, 新雅社, 1974), 高麗時代의 言語와 文學(韓國語文學會 編, 螢雪出版社, 1975), 한국고전시가론(鄭炳昱, 新丘文化社, 1977), 高麗歌謠硏究(국어국문학회 편, 正音社, 1979), 韓國古典詩歌의 硏究(金學成, 圓光大學校出版局, 1980), 高麗時代의 歌謠文學(金烈圭·申東旭 編, 새문社, 1982), 한국문학통사 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3), 古典詩歌論(權斗煥·金學成 編, 새문社, 1984), 鄕歌麗謠硏究(黃浿江·朴魯褻·林基中 共編, 二友出版社, 1985), 國文學의 探究(金學成,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987), 韓國古詩歌硏究(崔正如, 啓明大學校出版部, 1989), 高麗歌謠의 硏究(박노준, 새문社, 1990), 고려가요·악장연구(국어국문학회, 태학사,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요점정리

형성(形成)은고대로 부터 내려온 민요(民謠)에서 형성된 것으로,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이후 조선 성종대에 이르러 문자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향가(鄕歌)가 쇠퇴하면서 귀족층의 한문학(漢文學)이 고려의 문단을 이끌어 가게 되자, 이와 상대적으로 평민층에서 새로이 나타난 노래가 고려가요(高麗歌謠)이다. 이는 단순한 평민 문학이 아니라, 고려 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으며, 고려가요(高麗歌謠)가 조선 시대 유학자(儒學者)들에 의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하여 개작(改作)또는 삭제되어 현재 전하는 것은〈악학궤범(樂學軌範)〉에4편, 〈악장가사(樂章歌詞)〉에 8편,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위 두 책에 없는 것으로서 2편이 전한다.
 
특징(特徵)은 형식상 특징은대부분이 분절식(주로 3·3·2조, 또는 3·4·4조)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듬이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서경별곡', 청산별곡'에서처럼 3·3·2조의 율조가 많이 나타나고, 대체로 분절체(分節體, 분련체, 연장체)이며, 후렴구 또는 조흥구가 발달되어 있으며, 순 우리말로 구전되다가 나중에 문자로 정착되었다. 어느 개인의 독창적, 창작품이라기보다는 구전(口傳)되는 동안 집단적, 민요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내용상의 특성은주로 향락적이며, 현세적이고,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 자연에 대한 예찬, 이별의 아쉬움 등 평민들의 숨김 없는 인간성을 나타낸 것이어서 소박하고 풍부한 감정과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였고, 남녀 간의 애정을 솔직히 표현한 작품이 다수 창작 되었으나, 조선조 유학자들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문헌에 싣지 않았으나 그 점은 조선조 정책이숭유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 짐작이 되나 작품성은 인간적매력이 넘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주제는 풍류적이고 현세적이라는점이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는 우호적일수 있으나 고급 문학의 관점에서는 일정 부분 문제점이 지적될 수도있다.
 
작가층은 문자를 가지지 못한 평민 계급이고, 문학사적 위치는 표현의 소박성과 함축성, 꾸임 없는 생활 정서의 표현, 높은 문학성 등으로 시조(時調)와 더불어 우리 문학사의 대표적인 시가 양식(詩歌樣式)
 
의의(意義)는적나라한 인간성(人間性)과 풍부한 정서를 유려(流麗)한 국어로 표현하여 국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음악적으로 경쾌한 리듬을 살리는 기교 등은 고대 문학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참고 문헌
우리문자가 없어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조 성종 무렵부터 문자로 기록되었다. 기록된 주된 문헌은〈악학궤범(樂學軌範)〉,〈악장가사(樂章歌詞)〉,〈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등이다.
 
• 고려 가요의 후렴구
 
정읍사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서경별곡 위 두어렁생 두어렁셩 다링디리
가시리 위 증즐가 太平盛代(태평성대)
정석가 유덕(有德) 하신님을 여의와지이다
이상곡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사모곡 위 덩더둥셩
쌍화점 더렁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 고려 가요의 내용과 주제
 
연모(戀慕) 연군(戀君) : 동동
주술(呪術) 처용가(고려 시대의 가요)
지조(志操) 정석가
무상(無常) 청산별곡(현실 도피로도 봄)
사친(事親) 사모곡, 상저가
이별(離別) 서경별곡, 가시리
남녀상열(男女相悅) 쌍화점, 만전춘, 이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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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