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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면 향토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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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평면 향토사 (1993)     평창군 2018.07.12. 11:39 (2018.07.11. 02:38)

二 . 봉평 문화재

 

1. 1. 봉산서재

봉평면 평촌리 산 16번지에 있는데 율곡 이이 선생과 화서 이항노 선생을 모신 곳이다.
 
(두 어른을 모시게 된 사유)
1) 이율곡의 아버지 판관 이원수공이 1526년 부인 신사임당과 함께 봉평 판관대에 임시 거주하였다. 1536년 봄 사임당께서 오죽헌 언니댁에서 머물던 중 하루밤 꿈에 흙룡이 자기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봉평으로 오니 한양에서 근무하던 남편 판관공이 와 있었다.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가을에 친정 오죽헌에 가서 12월26일에 옥동자를 낳으니 이 분이 후일자라서 동방의 성인이요, 성리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다.
 
2) 이화서 선생은 1792년(정조 16년) 2월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후진 양성을 하다가 1868년 고종 5년에 별세하였다. 선생도 성인이요 성리학자로서 구 한말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시고 변천하는 세계 열강과 대응하자면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원군의 경복궁 창건 철회를 역설하고 높은 벼슬자리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동안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 제자들이 이곳 봉평에 많이 이주하였으며 특히 이곳 학자 봉서 신범 선생도 화서 선생을 추모하였다.
 
3) 1896년 2월에 화서 문인 제자 홍재학께서 장촌에 거주하면서 봉산서재 창건을 건의하여 허가는 얻었으나 당시 나라에 정변이 있어 홍학자가 정변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시상열사의 형을 받음으로 서재 창건이 수포로 돌아갔다.
1903년 지방학자 태은 추성구, 황문진, 여청 김상섭등 8인이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 많은 애국지사의 자문을 구하여 1906년 착수하여 1907년3월에 단청을 완공하였다. 그후 오늘날까지 몇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많은 분들의 노고하에 보존되고 있다.
 
4) 서재에 모신 분들의 제향을 올릴 대책이 막연하자 1922년에 지방 유림에서 독지성금으로 평촌리 444의 2번지 372평과 평촌리 465의 7번지 301평 계673평을 구입하여 그 토지의 수입으로서 제항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5) 1984년 9월15일 극동운수 주식회사 사장 유창호씨가 부지대금중 반액을 희사함으로 평촌리 산 16번지 5,700평을 매입하였다.
 

2. 2. 효석 문학비와 물레방아

가산 이 효석은 1907년2월23일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봉평 2대 면장인 아버지 이시후씨와 강홍경 여사 사이에 1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분이 바로 근대문학에 선구자이신 저 유명한 메밀꽃 필무렵이 바로 이고장을 소재로 하여 쓴 이효석이다.
 
1991년에 문화부는 남안동을 문화의 마을 1호 지정하였으며 서울 거주하는 전상옥씨가 부지를 희사함으로서 1991년에 문학비와 터비를 세웠고 1992년에는 물레방아도 건축하였다.
 
이효석 문학의 발전을 위해 결성된 봉석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와 주민들의 협조로 매년 기념 사업,효석 백일장등을 거행하고 있으며 93년에는 효석 공원(현 성황당 일대)조성됨으로 봉평을 찾는 이들에게 문학의 향취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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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