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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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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저작】
(2018.07.16. 02:38) 
◈ 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 보고
1. 임실 진구사지 출토유물과 그 의미 / 이제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임실군 내 사지는 34개소에 달한다. 임실군 임실읍에 8개소로 가장 많고 오수면에 5개소, 삼계면에 4개소, 덕치면·신덕면에 3개소 등 임실군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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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임실 진구사지 출토유물과 그 의미

 
이제까지의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임실군 내 사지는 34개소에 달한다.77) 임실군 임실읍에 8개소로 가장 많고 오수면에 5개소, 삼계면에 4개소, 덕치면·신덕면에 3개소 등 임실군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안타깝게 이들 사지와 관련된 문헌이 거의 없고, 아직까지 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사지의 창건 시기와 그 성격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진구사지의 경우만 유일하게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사지의 창건 시기와 함께 그 변천과정이 심층적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여기서는 임실 진구사지를 중심으로 임실군의 불교문화78)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에 임실 진구사지가 있다. 임실군 신평면과 신덕면, 운암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봉우리에서 약간 곡선으로 흘러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이다. 이 사지의 남쪽에서 섬진강이 거의 국자모양으로 흐르고 있는데, 신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거의 U자형으로 휘감아 도는 그 안쪽에 사지가 있다. 본래 임실 용암리 사지로 불리다가 1992년 발굴조사 때 珎丘寺 명문와가 출토되어, 그 이후부터 진구사지로 불린다. 진구사는 『삼국유사』에 고구려 승려이자 열반종주로 알려진 보덕의 제자 적멸과 의융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600년대 후반 통일신라로 추정되고 있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을 보호하고 사지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1992년 시작된 발굴조사79)는 중기사 인법당으로 확대되면서 2001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진구사지는 크게 4차에 걸쳐 가람배치가 변화된 것으로 파악되었다.80) 창건 시기의 가람은 북창마을 민가가 들어선 곳에 있었으며, 2차 가람은 석축을 쌓아 가람의 중심이 석등 북쪽으로 옮겨진 시기로 고려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고려 말에 조성된 3차 가람은 중심 가람을 중심으로 그 영역이 동쪽으로 얼마간 확장되었다. 4차 가람은 대형 할석으로 사역을 구획하고 현재의 위치로 석등이 옮겨진 시기로 조선 중기 이전으로 파악되었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과 비로자나불, 철불, 석탑, 좌대 등을 근거로 통일신라 말에 크게 중창되었다.81) 2010년 임실 진구사지 석등82)은 용암리 석등에서 그 명칭이 바뀌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다. 호남지방 석등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화사석의 여덟 면에 모두 창을 낸 남원 실상사 석등,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상통한다. 수철이 실상사를 중창하면서 고복형 간주석과 화사석의 특징을 근거로 임실 진구사지 석등이 개선사지와 비슷한 함통 연간(860~873)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83) 그런데 통일신라 말 임실군과 그 주변지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호족세력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후백제 때 국가차원에서 중창되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완주 봉리사지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상, 완주 대아리 석불좌상의 머리가 없는데, 그 이유를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으로 보았다. 최근 후백제 석탑으로 비정된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과 친연성이 강한 장수 삼봉리 개안사지 석탑도 탑재석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임실 진구사지 석탑과 남원 만복사지 석탑도 상당수 탑재석이 유실된 상태로 일부 옥개석만 남아있는데, 석탑의 양식은 후백제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주에서 출발하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주요 길목으로 대부분 평지가람이다. 후백제와 관련이 깊었던 평지가람에서 석탑의 탑재석이 유실되거나 훼손된 주된 원인으로는 후백제의 멸망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후백제 때 창건되었거나 중창된 평지가람 내 석탑이 후백제 멸망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임실 진구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분석을 통해서도 그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유물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토기류와 자기류, 기와류, 청동기류, 철기류 등의 유물이 나왔는데,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초기청자이다. 초기청자는 선해무리굽과 중국식해무리굽, 한국식 해무리굽이 섞였는데, 유약은 그 색조가 녹갈색 혹은 황갈색 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북방 요장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초기백자84)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초기청자의 조합상과 그 속성은 임실 진구사지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거의 똑 같다.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는 백제 마돌현에 속하였던 곳으로 고려 이전까지 줄곧 임실군의 속현이었다. 후백제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신경준에 의해 편찬된 『山經表』에 실린 15개의 산줄기 중 그 길이가 가장 짧은 금남호남정맥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면서 두 강의 발원지도 함께 거느리고 있다.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남쪽 섬진강유역에 속한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에 3개소의 초기청자 요지85)가 있다.86) 이들 초기청자 요지는 구획성과 함께 그 규모가 방대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87)
 
 

2. 2.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와 후백제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의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88)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吳越國에서 이주한 공인집단89) 및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90)되어 그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초기청자91)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월주요로 오월은 越州窯의 후원을 토대로 번영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고려정부가 주도적으로 중국 청자 장인들을 데려와 수도권 일대에서 양호한 입지를 선택하여 요장을 설립하고 초기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92)도 있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길이 40m 이상 되는 대형의 벽돌가마[塼築窯]로 상징된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지 않고 건조된 그릇에 유약을 입혀 한 번만 굽는 단벌구이가 그 특징이다.93) 경기도 용인 서리94)와 시흥 방산동95), 황해도 봉천 원산리96) 등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전축요는 길이 40m, 내벽의 너비 200cm 내외로 측면에 출입구와 선해무리굽완이 상징적인 유물이다.97)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에서 밝혀진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대체로 중국 절강성 월주요와 긴밀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진안 도통리는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대형 전축요의 분포양상과 그 특징을 근거로 전축요의 축조기술과 청자의 제작기술이 중서부에서 남서부로 확산된 견해98)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주 중암리와 서산 오사리, 대구 진인동, 칠곡 창평리, 진안 도통리 등은 요지의 길이가 절반으로 축소되었고,99)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완을 생산하다가 소멸되었다100)는 것이다. 이른바 中先南後說101)로 우리나라의 중서부가 남서부보다 전축요가 흙가마[土築窯]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102) 그런데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는 대형 전축요에서 문양이 없는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점에서 이곳만의 강한 지역성이 입증되었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로가 그물망처럼 잘 구축된 곳이 새만금103)이다. 선사시대부터 천혜의 교통망을 살려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고, 마한에 이르러서는 패총의 보고이자 해양문화의 거점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동진강하구의 가야포 등 새만금 거점포구를 통한 국제해상교류도 활발하였다. 백제의 웅진·사비기 때는 백제의 대내외 관문이자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104) 어찌 보면 군산과 군산도는 선사시대부터 줄곧 천혜의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잘 구축된 문물교류의 허브였다.105)
 
해상왕 장보고 선단에 의해 사단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는 새만금 해역을 장악하였던 후백제가 오월과의 국제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쳤다. 견훤은 892년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900년 후백제를 선포한 뒤 오월에 사신을 다시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106) 900년 전주로 도읍을 옮긴 견훤은 새만금 거점포구를 출발해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918년 후백제가 사신과 더불어 말을 오월에 보내자, 927년 오월국 사신인 班尙書가 서신을 갖고 후백제를 방문하였다. 중국 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가장 왕성하게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러나 고려는 918년 나라를 세우고 그 이듬해 오월에 사신단을 한 번만 파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견훤이 그토록 큰 비중을 두었던 오월과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 제작기술이 최초로 후백제에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견훤이 45년 동안 오월과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선진문물인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에 전파된 것이 아닌가 싶다. 후백제 때 축성된 전주 동고산성과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의 출토품 사이에 서로 조형적인 유사성과 친연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107) 이제까지는 전주 동고산성 출토품을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는데,108)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109)
 
반면에 중국 오대십국의 혼란기 때 중국인 장인집단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본 주장110)도 있다. 그런데 월주요의 장인집단은 오월로부터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의 망명보다 오히려 국제외교를 통한 후백제로의 파견 내지 유입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초기청자 요지 중 진안 도통리 경우만 유일하게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진안 도통리의 운영주체와 운영시기를 추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의 경우에는 초기청자와 초기백자를 함께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후백제 도읍인 전주와 인접된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이자 도자문화의 중심지이다. 진안고원에서 도자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는 오월의 첨단기술 전파로 후백제 때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부터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던 새만금 거점포구로 오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로 유입된 것 같다.111) 오월의 반상서가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를 방문할 때 오갔던 吳越과 後百濟의 使行路를 초기청자의 전파경로112)로 추정된다. 당시의 경로를 복원해 보면, 항주에서 월주를 거쳐 명주에 다다르고 주산군도에서 사단항로로 군산도를 경유하여 만경강 내륙수로로 전주까지 손쉽게 도달한다.
 
후백제 도읍인 전주 동쪽 진안고원은 초기청자부터 옹기까지 도자문화가 융성하였던 곳이다. 진안고원에 속한 전북 진안군에 120여 개소와 임실군에 40여 개소의 도요지113) 중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전주에서 출발해 전북 완주군 상관면 용정마을을 지나 호남정맥 마치를 넘으면 진안 도통리까지 아주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다. 진안 좌포리는 호남정맥 마치를 넘어 진안고원 방면으로 가기 위한 사람들이 섬진강을 건넜던 나루가 있던 곳이다.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와 전주를 이어주던 길은 龍井과 馬峙의 지명 속에 담긴 것처럼 그 의미가 컸던 것 같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을 따라 후백제가 구축해 놓은 외곽 방어선 안쪽에 진안고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남원 실상사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흡사한 초기청자가 나왔다. 남원 실상사114)는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한 이후 실상산문에 큰 관심을 두어 실상사 조계암 구지에 세워진 편운화상의 부도에 후백제의 연호인 正開가 사용된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견훤의 미륵신앙이 김제 금산사에서 익산 미륵사지로 바뀔 정도로 익산 미륵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115) 922년에는 익산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 무왕의 미륵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였다.116) 종래에는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117)하였기 때문에 향후 초기청자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방법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936년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茶器와 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118)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 왕실과 도읍인 전주로의 공급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진안 도통리에 설치된 강주소의 설치목적과 그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최고의 선진문물인 청자 제작기술을 가진 첨단기술 집단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해 剛朱所가 설치되었는데,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그 운영주체가 고려로 바뀐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77) 全州歷史博物館, 2007, 앞의 책.
78)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에 신흥사가 있다. 호남정맥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성왕 7년(529)에 지었다는 설과 신라 말기에 진감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내용을 더 이상 알 수 없어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79) 전북대학교 박물관, 1994, 『용암리사지 발굴조사 보고서』, 전라북도·임실군.
80) 윤덕향·이민석·고금님, 2003, 『용암리사지 발굴조사 보고서 Ⅱ』, 전북대학교 박물관·임실군.
81) 진정환, 2011, 「새로 쓰는 진구사 사적기」, 『임실』, 국립전주박물관, 174~185쪽.
82) 우리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석등으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 모두 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인 8각을 이루고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5.18m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火舍石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옆면에 眼象을 새기고, 윗면에는 커다란 꽃 장식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구름을 조각하였다. 가운데기둥은 장고 모양이며, 연꽃을 새긴 마디가 있다. 윗받침돌에도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있는 火舍石에는 각 면마다 창을 내었다. 지붕돌의 경사는 급한 편이며, 여덟 곳의 귀퉁이 마다 큼직한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露盤과 覆鉢이 놓여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물 제267호이다.
83) 진정환, 2013, 「통일신라 고복형석등과 실상산문」, 『전북사학』 제42호, 전북사학회, 73~106쪽.
84) 張南原, 2008, 「고려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동아시아 북방도자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湖西史學』 50, 湖西史學會, 338~345쪽; 2009, 「10∼12세기 고려와 遼·金도자의 교류」, 『미술사학』 23,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84~189쪽
85) 尹盛俊, 2010, 「鎭安地域 靑瓷窯址의 硏究」 圓光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86) 金英媛, 1997, 『全北의 朝鮮時代 陶窯址』 -朝鮮時代 粉靑·白磁 窯址-, 國立全州博物館, 329~331쪽. 尹盛俊, 2010, 앞의 논문, 5~15쪽.
87) 다시 말해 해증이들 강주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일정한 간격으로 아주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지방의 호족세력보다 국가차원에서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임실군과 진안군에 밀집 분포된 160여 개소의 도요지 중 전주에서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88) 李喜寬, 2011, 「韓國 初期靑瓷에 硏究의 現況과 問題點」, 『지방사와 지방문화』 14권 2호, 12~27쪽.
89) 三上次男, 1989, 『日本·朝鮮陶磁史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70~271쪽.
90) 崔健, 1998, 「靑磁窯址의 系譜와 展開」, 『미술사연구』 제12호, 3~20쪽.
91) 韓盛旭, 2010, 「康津 靑瓷의 生産과 流通」, 『文化史學』 第34號, 89쪽.
92) 李鍾玟, 2002, 「韓國의 初期靑磁 硏究」 弘益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86~187쪽.
93) 林士民, 1999, 「韓半島 製磁業에 있어서 中國 浙江 越州窯의 影響」, 『康津靑磁國際學術會議』, 康津靑磁資料博物館.
94) 湖巖美術館, 1987,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 2003, 『龍仁 西里 高麗白磁窯』 Ⅱ.
95) 海剛陶磁美術館, 2001, 『芳山大窯』, 京畿道 始興市.
96) 김영진, 2002, 『도자기가마터 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97) 李鍾玟, 2004, 「고려시대 청자가마의 구조와 생산방식 고찰」, 『韓國上古史學報』 第45號, 73~76쪽.
98) 李鍾玟, 2003, 「韓國 初期靑磁의 形成과 傳播」, 『美術史學硏究』 240, 51~75쪽.
99) 海剛陶磁美術館, 2000, 『벽돌가마와 초기청자』.
100) 李喜寬, 2003, 「韓國 初期靑磁에 있어서 해무리굽碗 問題의 再檢討」, 『美術史學硏究』 237, 5~48쪽.
101) 吉良文男, 2004, 「朝鮮半島の初期靑磁」, 『高麗靑磁, 高麗靑磁の誕生』,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1~8쪽.
102) 李鍾玟, 2011, 「韓國 初期靑磁 生産窯址의 分布와 性格」, 『역사와 담론』 제63집, 154~158쪽.
103) 호남평야의 심장부인 김제·만경평야를 달리 ‘金萬平野’라고 부르는데, ‘새만금’은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만경·금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다(송화섭, 2009, 「전북 해양문화와 새만금」, 『전북의 역사와 문화유산』, 전라북도·전주대학교 산학협력단, 296~298쪽).
104) 李道學, 2008, 「百濟와 東南아시아 諸國과의 交流」, 『충청학과 충청문화』 7,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71~200쪽; 2010, 『백제 사비성 시대 연구』, 일지사, 258~293쪽.
105) 곽장근, 2012, 「새만금해역의 해양문화와 문물교류」, 『도서문화』 제39집,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3~32쪽.
106) 이도학, 2008, 「신라 말 후백제 진훤 세력의 성장과 남중국 교섭」, 『한국전통문화학술대회논문집』, 절강대학교 한국연구소.
107) 곽장근, 2013, 「진안고원 초기청자의 등장배경 연구」, 『전북사학』 제39집, 전북사학회.
108) 전북문화재연구원, 2006, 『전주 동고산성』, 전주시.
109) 군산대학교 박물관, 2014,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가마 시(발)굴조사 약보고서」, 진안군 참조.
110) 이종민, 2011, 앞의 논문, 172쪽.
111) 후백제 국사이자 도선의 제자인 경보가 921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임피 포구로 귀국하였는데, 만경강하구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신창마을에 있었던 신창진이 임피 포구로 추정된다(송화섭, 2013, 「후백제의 대외교류와 문화」, 『후백제 왕도 전주』, 전주시·전주역사박물관, 55~88쪽.).
112) 郭長根, 2013, 「鎭安高原 初期靑磁 登場背景과 傳播經路」, 『東亞細亞海洋文化國際學術大會』, 中國浙江大學校; 2014,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와 후백제」, 『진안 도통리 청자』, 국립전주박물관, 72~85쪽.
113) 全州大學校 博物館, 2007, 『鎭安郡文化遺蹟分布地圖』, 鎭安郡.
114)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6, 『실상사 Ⅱ』 발굴조사보고서, 262~305쪽.
115) 조범환, 앞의 책, 355~366쪽.
116) 金壽泰, 1999, 「全州 遷都期 甄萱政權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15, 283쪽.
117) 정읍 고부구읍성에서 출토된 자기류 중 해무리굽으로 그 색조가 녹갈색과 황갈색을 띠고 있는 청자류도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다(전북문화재연구원, 2007, 『井邑 古阜 舊邑城 Ⅰ』, 정읍시.
118) 이종민, 2011, 앞의 논문, 173~174쪽.
【저작】 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 Ⅳ.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문화의 공존
• 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 보고
• Ⅵ. 새만금 문물교류와 청자기술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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