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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의 정자 (2013)
임실의 정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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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 # 양요정
【향토】
(2018.07.16. 02:38) 
◈ 23. 양요정(兩樂亭) - 운암면 입석리
양요정(兩樂亭) 중수(重修) 운(韻)을 차운하여 / 이 정자는 우리 선조(先祖) 진사공(進士公)이 남겨주신 유적(遺蹟)이다. 대대로 지키고 수리해서 삼가 갱장(羹墻)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세대가 멀어질수록 비바람으로 인한 훼손을 입게 되었다.
목   차
[숨기기]
양요정은 양요당(兩樂堂) 최응숙이 지은 정자로 운암면 입석리 국사봉 아래 요산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 양요정에 올라서 바라보면 좌측 조금 높은 곳에 최근에 세워진 운암 망향탑이 있고 정자 앞으로 펼쳐진 호수와 함께 붕어섬을 이어주며 자연스럽게 서있는 입석(立石)이 있으니 이 바위의 이름을 따서 입석리(立石里)라 이름 부르고 있다. 자연히 이곳에 오르면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절경을 맛볼 수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이며, 지붕은 팔작 기와지붕이다. 그리고 정자 안에는 바람을 피하고 겨울에도 책을 볼 수 있는 환도실(環堵室)이 있다.
 
최응숙은 1546년 성균관 진사가 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환도실 벽에 그려진 벽화 중에 하나는 호가공신(扈駕功臣) 양요당이 선조를 가마에 태우고 호종하는 그림이다. 일산(日傘)이 보이며 몇 명의 부하들이 앞뒤로 호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그림으로는 3명의 노인이 바둑을 두는 장면, 산보를 하는 모습, 자연을 감상하는 장면 등이 빙 둘러서 그려져 있다.
 
양요당 최응숙은 임란 후 정세가 어지럽자 임실 입석리로 내려와 살면서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정자 이름에 그의 호인 양요를 붙였다. 즉 양요(兩樂)는 요산(樂山)과 요수(樂水)를 말하는데 ‘인자요산(仁者樂山)이고,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나온 말이다.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하여 산천초목의 변화와 동물이 어떻게 번식하는가를 아는 것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여 물이 어떻게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가를 아는 것이다. 정자의 풍광과 정자 주인의 뜻을 잘 표현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옥정호가 수몰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아래 옥녀동천과 학암리에서 내려오는 운암천이 만나는 곳에 지어져 있었으나, 1965년 옥정댐 준공으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보전되고 있다. 정자 옆에는 양요당 이건비와 최응숙의 묘비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상전벽해라는 옛말이 있다. 그 말은 어떤 뜻인가를 지금에야 알았고, 촌락이 매몰되고 산천이 변모하여 그 참상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양요정에서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시를 짓고는 양요정 동유록(同遊錄)이란 편액을 붙였는데, 이곳에는 14개의 현판이 있어 여기에는 임실군수 박시순, 사인(士人) 이동의, 전 주사(前主事) 이현구, 사인 최현익, 사인 최봉조, 전참봉 이현의, 진사 이병의, 사인 최봉기, 사인 최봉길 9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양요정 편액은 예서로 썼는데 이 지역에 보기 드문 명필의 글씨이다. 낙관이 찍혀있어 판독을 해보니 청풍 김규행(金奎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 선비는 한말인 1891년 41살에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가름해 볼 수 있다. 예서로는 편액을 잘 쓰지 않는데 다부진 필획과 빈틈없는 결구로 잘 짜여져 있다. 양요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137호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兩樂亭重修韻

此亭卽吾先祖進士公之遺
躅也 世守嗣葺 謹寓羹墻
之義 而世代愈久 亭亦有風
雨之患 故又於今春合力而重
新之舊制備矣 謹追先世重
修韻 感而續吟
 
水抱山回別有天 亭含淑氣蘸晴川
危巖磊磊餘千尺 古木蒼蒼護幾年
修葺棟樑因舊制 逍遙杖屐挾飛仙
吾家基業留於此 正合承垂世世傳
癸亥 維夏日 後孫鳳信謹稿
 
양요정(兩樂亭) 중수(重修) 운(韻)을 차운하여
 
이 정자는 우리 선조(先祖) 진사공(進士公)이 남겨주신 유적(遺蹟)이다. 대대로 지키고 수리해서 삼가 갱장(羹墻)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세대가 멀어질수록 비바람으로 인한 훼손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봄에 힘을 합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삼가 선조의 중수운(追先世重修韻)에 따라서 느낀 대로 시를 짓고 노래한다.
 
물이 산을 안고 빙 돌아나가는 별천지에 水抱山回別有天
누정은 맑은 기운 머금고 비 갠 시내에 잠겼네. 亭含淑氣蘸晴川
깎아지른 바위는 쌓이고 쌓여 천 자에 달하고, 危巖磊磊餘千尺
오래된 나무는 창창하니 몇 년이나 자랐을까. 古木蒼蒼護幾年
동량(棟樑)은 옛 모습대로 수리하였는데, 修葺棟樑因舊制
지팡이에 나막신 신고 산책하니 나는 신선 같네. 逍遙杖屐挾飛仙
우리 집안 기업(基業)은 정자에 있으니, 吾家基業留於此
정히 대대로 계승하여 후손에 전해야하리. 正合承垂世世傳
 
계해(癸亥) 유하일(維夏日) 후손(後孫) 봉신(鳳信) 삼가 기록함
 
 
 

2. 2. 兩樂亭記

余旣治雲水之三年 夏登兩樂亭
而樂之 因次板上韻 略鋪湖山之
景趣 日崔君鳳朝來言曰 是亭乃
吾先祖進士公之所創建 而取知樂
水仁樂山之義而名之者也 距今三
百餘年 世經兵燹 家遭鬱攸 扁楣
記實磨滅而無餘存者 平泉花木
雖不敢以與人 河陽金根本無傳於
校讎 雲仍之齎鬱恨久矣 願賜一言 以
爲追先垂後之蹟余乃援筆浚巡
而對曰 凡天下之林園臺榭 前人已備
述矣 有因文勢而寓意者 若蘭亭
以暢敍終之 以脩短隨化 岳樓之悲
喜結之 以進退憂樂是也 有因寫
景而着題者 如多景樓之白鳥靑
林 西山寺之半江夕陽是也今夫斯亭
景物之勝 陵不變而谷不移 則猶可
以模寫其彷彿 至若記扁之寓意 不
讀其詩誦其書 則其尙論 豈可易言
乎哉 噫 崔氏家藏世譜云 進士
公 家而承殉節之志 國而參扈
駕之勳 若公者能由達道而行達德 其
仁且知矣乎 然則公之所樂好 槪可
以想知矣 上而吾君致天仁之堯大知之
舜 穆穆皇皇 垂拱無爲 下而斯民躋太
平醉飽之域 少者怡怡老者熙熙 州
縣之內學者 皆爲俊且秀 好學而力行
擴推惻隱 是非之端 而施諸事爲 天
壤之間 昆蟲草木雖微 如衛足之知
呼食之仁者 莫不遂其生 是謂仁知之極致 而亦公所心樂也 豈特取義於周流無滯厚重不遷 而寓樂於一水之勝一山之奇而已哉 鳳朝起而拜曰 斯足以得吾先祖未展之遺意矣 遂書而揭之壁 進士公諱應淑字淸之
鳳朝於公爲十二世祀孫也 丁酉五月日咸陽朴始淳 識
 
 
양요정기[兩樂亭記]
 
내가 운수를 다스린 지 3년 되던 해 여름에 양용정(兩樂亭)에 올라가서 현판(懸板)의 운(韻)을 차운(次韻)하여 대략 호산(湖山)의 경치를 노래하였다. 어느 날 최봉조(崔鳳朝)군이 와서 말하기를,
“이 정자는 우리 선조 진사공(進士公)께서 창건하셨는데, 지혜로운 자는 산(山)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물(水)를 좋아한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300여 년 동안 세상이 병란(兵亂)을 겪고 집이 화재(火災)를 입어 편액의 기록이 실로 마멸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평천장(平泉莊)의 화목(花木)은 감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양(河陽)의 금근거(金根車)가 본래 교수(校讎)하는데서 전해짐이 없으니, 후손[雲仍]이 억울하게 생각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바라건대 한 마디 말씀을 써 주셔서 선조의 자취를 추모하고 길이 후손에 남겨줄 자취를 삼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붓을 들고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정원과 누정은 전 시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짓게 된 연유(緣由)를 서술해 놓았다. 어떤 것은 문세(文勢)를 따라서 의미를 붙인 것이 있다. 난정기(蘭亭記)에서 회포를 펼친 것은 명이 길고 짧은 것은 조화에 따른다고 글을 맺었고,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슬퍼하고 기뻐한 것은 나아가고 물러나며 걱정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글을 맺은 것이 이것이다.
어떤 것은 경치를 묘사하여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이 있다. 다경루(多景樓)는 백조(白鳥)와 청림(靑林) 때문이며, 서산사(西山寺)는 강(江)에 석양(夕陽)이 잠겨있어서 이름을 지은 것이 이것이다. 지금 이 누정의 뛰어난 경관은 (옛날에 비해) 언덕이나 계곡이 변하거나 바뀌어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 모습을 비슷하게 묘사할 수 있다.
편액에 붙인 뜻을 기록할 적에 (그 분의) 시(詩)를 읽거나 글을 송독하지 않으면 상론하여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최씨(崔氏)의 가장(家藏)의 세보(世譜)에 이르기를 ‘진사공(進士公)께서는 집안에서는 순절(殉節)하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았고, 나라에서는 임금의 호가(扈駕)에 참여한 공훈(功勳)이 있다.’고 하였다. 공과 같은 분은 능히 달도(達道)로 말미암아 달덕(達德)을 실천하셨으니, 인(仁)하시고도 지(知)하신 분이실 것이다. 그렇다면 공께서 즐기고 좋아하시는 것을 대략 상상해서 알 수 있다. 위로는 우리 임금이 천인(天仁, 천성적으로 어짊)하신 요(堯)임금이 되게 하시고 대지(大知, 크게 지혜로움)하신 순(舜)임금이 되게 하셔서, 단정하고 빛나며 팔짱을 낀 채 무위지치(無爲之治)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을 것이다. 아래로는 이 나라 백성이 태평스럽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음식을 배부르도록 먹는 지경에 이르게 하여 젊은 사람은 즐거워하고 늙은 사람은 기뻐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주현(州縣)의 학자(學者)는 다 준수(俊秀)하니 학문(學問)을 좋아하면서도 힘써 실천하고,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과 시비를 가리는 마음의 단서를 확충하여 모든 일과 행위에 했을 때 펼치게 하였으리라. 천양지간(天壤之間)에 곤충(昆蟲)과 초목(草木)은 아주 미미한 생명이지만, 발로 해를 가리는 지(知)가 있고, (닭이) 먹을 것을 보면 함께 불러서 먹은 인(仁)한 마음이 있어서 그 삶을 이루어내지 않음이 없으니, 이를 일컬어서 인(仁)과 지(知)의 극치라고 할 만하며, 공께서도 마음으로 좋아하신 바이다. 그리하니 어찌 (물처럼) 두루 막힘이 없고 (산처럼) 후중(厚重)하여 옮기지 않음이 없는 것을 취하면서 일개 물이나 산의 기이한 경치만 좋아했겠는가.”
라고 하였다. 봉조(鳳朝)가 일어나서 인사를 올리고 말하기를
“이 말씀은 넉넉히 우리 선조(先祖)에게서 듣지 못한 남긴 뜻이 될 만합니다.”
하고 마침내 써서 벽에 걸었다.
진사공(進士公)의 휘(諱)는 응숙(應淑), 자(字)는 청지(淸之). 봉조(鳳朝)는 공(公)의 12대 사손(祀孫)이다.
 
정유(丁酉)년 5월 함양(咸陽) 박시순(朴始淳)은 기록한다.
누정(樓亭) # 양요정
【향토】 임실의 정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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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