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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운수지 (2012)
임실운수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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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임실운수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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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2018.08.04. 10:25) 
◈ 18. 누・정・대・재각(樓・亭・臺・齋閣)
수암당(守巖堂) / 신안면(新安面) 연화리(蓮花里)에 있으며, 선비 오정엽(吳廷曄)의 누정(樓亭)이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의 기문(記文)이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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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지 하(下)
18. 누・정・대・재각(樓・亭・臺・齋閣)
 
 
수암당(守巖堂)
신안면(新安面) 연화리(蓮花里)에 있으며, 선비 오정엽(吳廷曄)의 누정(樓亭)이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의 기문(記文)104)이 있다.
 
환우당(喚友堂)
옥전면(玉田面) 가전리(柯田里)에 있으며, 옛날의 성균(成均)유생 홍우경(洪宇慶)의 누정이다. 운학(雲壑) 조평(趙平)의 기문(記文)과 시가(詩歌)가 있다.
 
장취루(長翠樓)
옥전면(玉田面) 발산리(鉢山里) 수구(水口)에 있으며, 옛날 판서(判書) 김개(金鎧)가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한편 장취(長翠)판서의 아들 감역(監役) 익휘(益輝) 가 이곳에 우거(寓居)할 때 지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하한정(夏寒亭)
옥전면(玉田面) 발산리(鉢山里) 시내 남쪽에 있는데, 선비 홍상원(洪相元)의 누정이며, 기문(記文) 현판이 있다.
 
반우당(飯牛堂)
구고면(九臯面) 평지리(平地里)에 있으며, 고(故) 처사(處士) 이경(李經)이 지은 것이다. 운학(雲壑) 조평(趙平)・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석호(石湖) 현감 윤복원(尹復元)・서계(西溪) 공(公)의 기문(記文)과 시가(詩歌)가 있다.
 
물우정(勿憂亭)
덕치면(德峙面) 물우리(勿憂里) 앞에 있는데, 경재(敬齋) 홍붕(洪鵬)의 누정이며, 오천(烏川)의 기문(記文)이 있다.
 
인덕정(仁德亭)
운암면(雲岩面) 여산리(汝山里) 안산(案山)105)에 있으며, 박번(朴蕃) 선생의 별장(別庄)이다.
 
관어정(觀魚亭)
운암면 여산리 인덕정(仁德亭)의 하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데, 시산 (詩山) 김영복(金永福)이 지은 것이며, 뒤에 홍정(洪鼎)의 누정이 되었다.
 
고석정(高石亭)
운암면 여산리 관어정(觀魚亭) 하류의 냇가에 있으며, 진사(進士) 신응회(辛應會)의 누정이다.
 
강 정(江 亭)
상운면(上雲面) 입석리(立石里)마을 앞에 있으며, 판서(判書)김학성(金學性)・ 임실현감 정준화(鄭駿和)・진사 최준익(崔峻翼)・이병의(李炳儀)・참판 오영석(吳榮錫)・윤태일(尹泰一)의 시가(詩歌) 현판이 있다.
 
귀암정(龜岩亭)
운암면(雲岩面) 사량동(思良洞)에 있는데, 누정 아래에 거북바위가 있는 까닭에 그렇게 부른다.
 
운수정(雲水亭)
달리 완화정(浣花亭)이라고도 부르는데, 운암면 저탄리(猪灘里) 위편에 있다. 태인(泰仁) 사람 김석록(金碩祿)이 이곳에 우거(寓居)하며 지은 것인데, 그의 아 들 경원(慶元)이 남원(南原)의 선비 이문원(李文源)에게 팔았다. 반은노인(半隱老人)의 시(詩)가 있다.
 
탄옹정(炭翁亭)
신덕면(新德面) 독염리(禿染里)에 있으며, 고(故) 영장(營將) 김익룡(金翼龍)의 누정이다.
 
장암정(塲巖亭)
신평면(新平面) 대리(大里)의 청룡산(靑龍山) 머리에 있는 명지연(明智淵) 위쪽에 있는데, 남원(南原)에 사는 습독(習讀) 최인효(崔仁孝)의 누정이다.
 
구곡정(九曲亭)
신평면(新平面) 상천리(上泉里) 상류의 양지바른 쪽에 있는데, 옛날의 참의(參議) 벼슬을 했던 전영달(全潁達)의 시가(詩歌)가 있다.
 
삼호정(三湖亭)
신평면(新平面) 삼호리(三湖里) 잠두(蠶頭)산 위에 있는데, 남원(南原)의 처사 (處士) 김지백(金之白)의 누정이며, 기문(記文) 현판이 있다.
 
모송재(慕松齋)
상동면(上東面) 효촌리(孝村里)에 있는데, 교관(敎官) 윤상현(尹相鉉)이 세운 재실이다. 진사 이병의(李炳儀)・참봉 이영우(李英宇)・참판 윤태일(尹泰一)의 시 가(詩歌) 현판이 있다.
 
사선대(四仙臺)
사선대 옛 사진
북면(北面) 오원(烏院)의 돌다리 위편에 있다. 큰 내의 남쪽 물가에 바위가 물 위로 뻗어 있는데, 능히 사람 8~9명이 앉을 만 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네 신선이 놀던 곳인 까닭에 사선대(四仙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벽운루(碧雲樓)
현의 치소(治所) 남쪽 1리쯤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관선정(觀船亭)
덕치면(德峙面) 고치리(高峙里) 안산(案山)에 있었는데 선비 조유원(趙有瑗)의 누정이다.
 
교열루(敎閱樓)
본래 이름은 정기정(正己亭)이며 객사(客舍)의 남쪽 100보(步) 남짓한 거리에 있다. 어느 때 창건(創建)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희(康熙) 계축년(1673)에 현 감 신계징(申啓澄)이 중건(重建)한 기문(記文)과 제액(題額)106)이 있다. 무자년 (1768)에 현감 박일원(朴一源)이 중수(重修)하고 교열루(敎閱樓)로 명칭을 바꾸어 썼으며,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의 제액(題額이 있다. 가경(嘉慶) 정사년 (1797)에 현감 이영주(李英冑)가 중수한 뒤로 그의 형 임피(臨陂)현감 이영교(李英敎)가 쓴 기문(記文)이 있다. 도광(道光) 병신년(1836)에 현감 김동헌(金東獻)이 개축(改築)하고 수리(修理)하였고 함풍(咸豊) 정사년(1857)에 현감 신석년(申錫年)이 보수(補修)하였다. 동치(同治) 기사년(1869)에 현감 원세철(元世澈)이 수리 하였고, 광무(光武) 정유년(1897)에 현감 박시순(朴始淳)이 중수(重修)하였다.
 
봉황루(鳳凰樓)
곧 관청의 문루(門樓)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에 현감 윤행엄(尹行儼)이 중창 (重創)하였으며 상량문(上樑文)과 시가(詩歌)의 현판이 있다. 동치(同治) 기사년(1869)에 현감 원세철(元世澈)이 보수(補修)하였으며 시가(詩歌)의 현판이 있다.
 
천운정(天雲亭)
객사(客舍)의 동편, 연당(蓮塘)의 서편에 있는데, 도광(道光) 임인년(1842)에 현감 정기철(鄭基轍)이 창건(創建)하고, 제액(題額)・상량문(上樑文)・시율(詩律)을 모두 몸소 지었다. 그가 체직(遞職)하여 돌아간 뒤로 지금은 고을의 노인정(老人亭)이 되었는데, 어사(御史) 정직조(鄭稷朝)・현감 정준화(鄭駿和)・현감 한기석 (韓箕錫)・현감 이문연(李文淵)・현감 조성희(趙性憙) 등이 후세에 은혜를 남긴 기 문(記文) 현판이 있으며, 그 밖에 여러 오래된 현판들이 있다.
 
불염정(不染庭)
천운정(天雲亭)의 북쪽 연못 가운데 있었는데, 현감 정동시(鄭東時)가 물 가운 데 돌을 쌓아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문을 만들어 하나의 작은 누정(樓亭)을 세웠 는데, 단청(丹靑)이 빛나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졌으 나 아직도 그 터가 남아있다.
 
홍운정(鴻雲亭)
상운면(上雲面) 광석리(廣石里) 안산(案山)에 있으며 선비 한명유(韓鳴逾)의 누정이다.
 
영매당(映梅堂)
옥전면(玉田面) 옥전리(玉田里)에 있으며 주인은 홍서주(洪舒疇)이다.
 
이월당(梨月堂)
구고면(九臯面)에 있으며 주인은 박승혁(朴承奕)이다.
 
반구정(伴鷗亭)
구고면(九臯面)에 있으며 주인은 이수민(李修敏)이다.
 
칠우당(七友堂)
강진면(江津面) 문덕동(文德洞)에 있으며 주인은 박계호(朴季豪)이다.
 
우송당(友松堂)
옥전면(玉田面)에 있으며 주인은 홍이원(洪履元)이다.
 
청계당(聽溪堂)
남면(南面) 주천리(酒泉里)에 있으며 주인은 곽후태(郭后泰)이다.
 
반구정(伴鷗亭)
일도면(一道面) 우지평(牛之坪)에 있으며 주인은 사인(舍人) 조응(趙膺)이다.
 
반운정(伴雲亭)
일도면(一道面) 굴암(屈巖)에 있으며 주인은 참봉 조원개(趙元凱)이다.
 
반송정(伴松亭)
남면(南面) 주천리(酒泉里)에 있으며 주인은 곽흥무(郭興懋)이다.
 
호산정(湖山亭)
상북면(上北面) 주천리(舟川里)의 서쪽 사선대(四仙臺) 위에 있으며, 이 마을 처사(處士) 이달효(李達孝)가 지은 것인데 누정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있다.
 
가정재(可貞齋)
상동면에 사는 여러 성씨(姓氏)들이 계(契)를 만들어 이 건물을 짓고 봄과 가을로 친선을 도모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107)를 행하였다.
 
화수정(花樹亭)
상동면(上東面)에 있는 심씨(沈氏)들의 재실(齋室)이다. 종중(宗中)의 재실을 지키는 송달수(宋達洙)가 중수기(重修記)를 짓고, 심환국(沈煥國)・심환두(沈煥斗)의 기문(記文)과 시가(詩歌)가 있다.
 
두복리수구(斗福里水口)
구고면 두복리 수구는 암석(巖石)이 험하고 기괴(奇怪)하여 모양이 마치 높이 쌓은 대(臺)와 같다. 그 가운데 폭포와 깊은 못이 있어 우리의 영혼을 맑고 깨끗하 게 해준다. 바위의 낭떠러지 위에 승지 박시순(朴始淳)・참판 윤태일(尹泰一)・이 경우(李璟宇)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또 한규태(韓圭泰)・한규엽(韓圭燁)의 이름 도 새겨져 있다.
 
은행정(銀杏亭)
상동면(上東面) 양지리(陽地里)에 있는데, 은행나무를 몇 그루 심어서 여러 해 누정을 비호(芘護)하였던 까닭에 누정의 이름을 은행정(銀杏亭)이라고 하였다. 주인은 심헌(沈櫶)이다.
 
모원재(慕遠齋)
장려동(壯麗洞)에 있으며 진주강씨(晉州姜氏)들의 고인(故人)을 추모(追慕)하는 곳이다. 심석(心石) 도사(都事) 송병순(宋秉珣)의 제액(題額)이 있다.
 
서륜재(舒倫齋)
덕치면(德峙面) 사곡리(沙谷里) 자경동(自耕洞)에 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 들의 종중(宗中) 가옥(家屋)이다. 무인년 봄에 묵은(黙隱) 이규상(李奎祥)이 비로 소 완성하고 현판을 썼다.
 
정리당(靜履堂)
성수산(聖壽山)아래에 있는데 정리(靜履) 이두연(李斗然)이 지은 것이다. 공 (公)이 말년에 여기에 은퇴하여 두서너 무리들과 경학(經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 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당동(書堂洞)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없다.
 
옥전발산재실(玉田鉢山齋室)
정세우(鄭世宇)가 건립한 것인데 옥전면(玉田面) 내의 사람들이 때로 이곳에 서 학문을 강의하고 향회(向會)108)를 열 었다.
 
추감재(追感齋)
추감재 편액
 
상동면(上東面) 도화동(桃花洞)에 있으며 참판 윤태일(尹泰一)이 세운 것인데 기문(記文) 현판이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이봉선(李鳳善)은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아들 석용(錫庸)으로 하여금 학생들을 많이 모아놓고 1년 내 내 추감재에서 암송(暗誦)하게 하였다.
 
수운정(睡雲亭)
수운정 전경
 
신덕면(新德面) 도곡동(都谷洞)에 있으며 김낙현(金樂顯)이 세운 것이다. 그 의 아들 성철(星澈)이 보수하였으며 서울과 지방의 많은 사람들의 현판이 있다.
 
유송정(有松亭)
성가리(城街里)에 있으며 주인은 박문협(朴文協)이다.
 
지지정(知止亭)
덕치면(德峙面) 사곡리(沙谷里) 자경동(自耕洞)에 있는데 경자년 여름에 안우 제(安于齊)가 세운 것이다. 경주(慶州) 이철우(李喆雨)가 처음으로 사들여 상량 문(上樑文)과 시율(詩律)을 다 기록하였다.
 
육영재(育英齋)
지장동(智壯洞)에 있는데 신용균(申瑢均)이 세운 것이다. 현감 박시순(朴始淳)・진사 이병의(李炳儀)・도정(都正) 윤태일(尹泰一)의 기문(記文) 현판이 있다.
 
유서당(有書堂)
신덕 빙채(氷債)에 있으며 신씨(申氏) 종중(宗中)의 누각이다. 진사 최준익(崔峻翼)・홍한섭(洪漢燮)・이병의(李炳儀)의 시가(詩歌)가 있다.
 
 

 
 

1. 원문

 

1.1. 樓・亭・臺・齋閣

 
守巖堂
在新安面蓮花里士人吳廷曄亭有西歸李起渤記文
 
喚友堂
在玉田柯田古成均洪宇慶亭有雲壑趙平記文吟詠
 
長翠樓
在玉田鉢山水口古判書金鎧所創一云長醉判書子監役益輝寓居時所建云
 
夏寒亭
在玉田鉢山里小溪南士人洪相元亭有記文縣板
 
飯牛堂
在九皐平地故處士李經所築有雲壑趙平霽湖梁慶遇石湖尹候復元西溪公記文吟詠
 
勿憂亭
在德峙勿憂里前敬齋洪鵬亭有烏川記
 
仁德亭
在雲岩面汝山里案山朴先生蕃別庄
 
觀魚亭
在仁德亭下流相望處卽詩山金永福建後爲洪鼎亭
 
高石亭
在觀魚亭下流川上進士辛應會亭
 
江 亭
在上雲立石里村前判書金學性本官鄭駿和進士崔峻翼李炳儀參判吳榮錫尹泰一有吟詠懸板
 
龜岩亭
在雲岩面思良洞亭下有龜石故云
 
雲水亭
一云浣花亭在雲巖面猪灘上泰仁人金碩祿寓居所搆其子慶元今賣于南原士人李文源有半隱老人詩
 
炭翁亭
在新德面秃染故營將金翼龍亭
 
塲巖亭
在新平大里靑龍頭明智淵上南原人習讀崔仁孝亭
 
九曲亭
在新平上泉里上流之陽古參議全頴達有吟詠
 
三湖亭
在新平三湖里前蠶頭上南原處士金之白亭有記文縣板
 
慕松齋
在上東孝村敎官尹相鉉之所建進士李炳儀參奉李英宇參判尹泰一有吟詠懸板
 
四仙臺
在北面烏院石橋上大川南涯巖石揷入江上可坐八九人或云有四仙所遊故名之
 
碧雲樓
在縣南一里今無
 
觀船亭
在德峙高峙案山士人趙有瑗亭
 
敎閱樓
本名正己亭在客舍南百有餘步未知創在何時而康熙癸丑申候啓澄重建記文題額戊子朴候一源重修改書敎閱樓尤庵宋先生有題額嘉慶丁巳李候英冑重修後有伯氏臨陂倅李英敎記文道光丙申金候東獻改理咸豊丁巳申候錫年修補同治167)己巳元候世澈脩理光武丁酉朴候始淳重修
 
鳳凰樓
卽官門樓乾隆甲辰尹候行儼重創有上樑文吟詠縣刻同治168)己巳元候世澈脩補有吟詠縣刻
 
天雲亭
在客舍東蓮塘西道光壬寅鄭候基轍刱建題額上樑文詩律幷親製逓歸後今爲邑中老人㕔有御史鄭公稷朝鄭候駿和韓候箕錫李候文淵趙候性喜遺惠記文縣刻又有諸老縣刻
 
不染亭
在天雲亭北蓮沼中鄭候東時於水中築石爲臺作橋造門起一小亭丹靑照耀景槩絶竗未幾年頹壓至今猶有遺基
 
鴻雲亭
在上雲 169)廣石里案山士人韓鳴逾亭
 
眏梅堂
在玉田主人洪舒疇
 
梨月堂
在九皐主人朴承奕
 
伴鷗亭
在九皐主人李修敏
 
七友堂
在江津文德洞主人朴季豪
 
友松堂
在玉田主人洪履元
 
聽溪堂
在南面酒泉里主人郭后泰
 
伴鷗亭
在一道牛之坪主人舍人趙膺
 
伴雲亭
在一道屈巖主人參奉趙元凱
 
伴松亭
在南面酒泉里主人郭興懋
 
湖山亭
在上北舟川里西邊四仙臺上本里處士李達孝所建亭頹址存
 
可貞齋 170)
在上東諸姓氏修稧建此宇春秋講信行鄕飮禮
 
花樹亭
在上東沈氏齋室也守宗齋宋達洙製重修記沈煥國沈煥斗有記文吟詠九臯斗福里水口巖石崎嶇奇恠如築臺像其中龍湫毓靈淸淑岩崖上有丞旨朴始淳參判尹泰一李璟宇刻名又有韓圭泰韓圭燁刻名
 
銀杏亭
在上東面陽地植文杏數株芘護多年因以亭171)名主人沈櫶也
 
慕遠齋
在壯麗洞晉山姜氏追慕之所也心石宋都事秉珣題額
 
舒倫齋 172)
在德峙沙谷自耕洞慶州李氏宗舍也戊寅春黙隱李圭祥始遂兼記縣板
 
靜履堂
在聖壽山下靜履李斗然所搆公晩年退隱于此堂與二三徒講治經學世稱書堂洞今廢
 
玉田鉢山齋室
鄭世宇所建而面內或有講誦向會
 
知止亭
在德峙面沙谷自耕洞庚子夏安于齊慶州李喆雨始搆得並記上樑文詩律
 
追感齋
在上東桃花洞尹參判泰一所建有縣刻記文里居李鳳善以好學之人使其子錫庸多聚學徒四時誦讀于此齋
 
睡雲亭
在新德金樂顯所建其子星澈修補有京鄕多士縣板
 
有松亭
在城街里主人朴文恊也
 
育英齋
在智壯洞申瑢均所建朴候始淳李進士炳儀尹都正泰一有記文縣刻氷債有書堂卽申氏宗閣進士崔峻翼洪漢燮李炳儀吟詠
 
 

 
104) 문체의 하나로, 사실을 서술하며, 건조물의 건치연혁(建置沿革)이나 산수(山水)의 유람 등을 적는다. [326]
105)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
106) 편액(扁額)의 글씨.
107) 예를 통하여 효제(孝悌)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 향인(鄕人)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예(禮)이다.
108) 향회(向會)는 향회(鄕會)의 잘못인 듯하다. 향회(鄕會)는 지방의 향소(鄕所)가 중심이 되어 그 고을의 일을 논의하기 위한 고을 사람들의 모임이다.
 
167) ‘光緖’를 역자가 ‘同治’로 바로잡았다.
168) ‘光緖’를 역자가 ‘同治’로 바로잡았다.
169) ‘云’자를 역자가 ‘雲’자로 바로잡았다.
170) ‘齊’자를 역자가 ‘齋’로 바로잡았다.
171) ‘村’자를 역자가 ‘亭’로 바로잡았다.
172) ‘齊’자를 역자가 ‘齋’로 바로잡았다.
【저작】 임실운수지 (2012)
• 17. 고적(古跡)
• 18. 누・정・대・재각(樓・亭・臺・齋閣)
• 19. 불우(佛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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