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둘러보고 점심은 석모도에서 강화도로 오는 도로변에 있는 식당을 이용했다. 점심시간보다 조금 늦게 갔더니 손님들이 다 빠지고 한가해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몇 번 갔었던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에 가려고 동문 주차장(주차료 2,000원)에 도착했다. 매표소(3,000원/성인) 안내판에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기와 교체 공사 중이라 외관은 볼 수 없다고 한다. 무슨 인연인지 16년 전에 갔을 때도 대웅보전 공사를 했던 것 같은데... 정족산성(삼랑성)이 품고 있는 전등사는 진종사(眞宗寺)였으나 고려 때 옥등(玉燈)과 대장경(大藏經)을 받아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na-;▼좌측이 전등사 매표소(남문과 동문만 있음)이고 정면에 보이는 문이 정족산성(삼랑성, 사적 130호)의 동문(東門)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산성의 남문과 동문으로 공격했지만 패퇴한 장소다. ☞삼랑성(三郞城)이란 명칭은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정족산(鼎足山,222m)은 3개 봉우리가 세발달린 솥(鼎)의 발(足)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na-;▼일제 강점기 사진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동문이 3시 방향에 보인다
\na-;▼아치 형태의 동문(매표소에서 전등사 방향, 성곽 높이는 4~5m)으로 차량이 다닌다. 동문 성곽부터는 흙길이다.
\na-;▼전등사 안에서 매표소 방향으로 보이는 동문의 좌측은 북문 방향의 달맞이 고개이고, 우측으로 조금 가면 남문(종해루)이 나온다.
\na-;▼양헌수 승전비각(梁憲洙 勝戰碑閣)은 동문으로 들어가 약 10m 전등사 방향의 우측에 있다.
☞양헌수 장군이 1866년 11월(고종 3) 9일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해 강화군민들이 세운 비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1972년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26호) ☞1873년(고종 10)에 세움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 있음 ☞비 앞면에 "순무 천총 양공헌수 승전비(巡撫 千摠 梁公憲洙 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천총은 정 3품 무관직(武官職)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군이 점령한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은 양헌수 장군이 호랑이 잡던 산포수 출신의 약 500여 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김포에서 강화 정족산성으로 잠입해 프랑스 군의 동태 파악하고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때 조선군들은 전등사 대웅보전 내 기둥에 전투 승리와 무사귀환(無事歸還)을 적은 이름 등이 아직 남아 있음 \na-;▼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66년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도 탄압과 학살(병인박해)에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을 말한다.
\na-;▼조선군들이 대웅전 내부 기둥에 적은 이름들
\na-;▼남문(南門)은 1793년 문루(門樓)를 세워 종해루(宗海樓)라 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의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 군을 격퇴해 승리한 곳으로 1976년 복원함
☞조선군 화력이 프랑스 군 보다 절대적으로 열세(화승총 사거리 50m, 2~3발/분)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①호랑이 잡던 포수(Tiger-hunter)들로 병력을 구성해 실전에 강했고 ②지형 지세를 활용한 매복 작전과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격했으며 ③ 화력이 열세임에도 죽기 살기로 싸운 조선군에 비해 프랑스 군은 대포도 안 가지고 오는 등 싸울 준비가 부족했다. 한마디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생각한다. \na-;▼포수 출신으로 구성된 조선군의 호랑이 부대기가 남문에 걸려 펄럭인다.
\na-;▼1871년 신미양요 때도 사용
☞ 정족산성 전투 패배로 사기를 잃은 프랑스 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할 때 강화 행궁과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의궤 등 300여 점의 문화재와 은괴 등을 약탈해 감 ◎19세기 지도를 보면 양헌수 승전비 위치가 현재와 다르게 전등사 쪽에 가까이 있었다.아마 1986년 이후에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양헌수(梁憲洙, 1816~1888)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경보(敬甫)다. 1848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침입한 프랑스 군대에게 승리해 한성부 판윤으로 특진하고, 어영대장,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na-;▼조선군이 프랑스 군을 격퇴한 정족산성 전투 https://www.youtube.com/watch?v=aHqqTgqSlg0 \na-;출처: 강화군청,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전등사, 네이버, 구글, 민족문화대백과,강화박물관, 유튜브,중앙일보 \na-;▼고려 궁궐터, 외규장각, 강화산성 방문기 https://jawkoh.blog.me/220374740848 ★정묘호란의 굴욕 현장, 연미정 방문기 https://jawkoh.blog.me/220375295335 ★서울 절두산 순교 성지(병인 박해) 방문기 https://jawkoh.blog.me/22137388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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