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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형이라고 있었다. 이름이 외자였기에 다들 성씨를 붙여 신만이로 불렸던 산악선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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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의 대단한 산악클럽이던 요델산악회와 어울리던 산 선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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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 우람한데다 소리 크고 성격 호탕하여 흡사 산적 같아 보이던 그런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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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형은 해병대 부사관(하사)으로 복무하며 베트남전 참전 때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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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전역하고부터 요델클럽과 어울렸다 하니 아마 66, 7년부터 도봉산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한다. (해병대 베트남 파병 6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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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주말이면 선인봉 등반을 끝내고 내려온 클라이머들이 모여 앉아 그날의 무용담을 자랑하던 할머니가게라는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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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저녁 무렵 산에서 내려올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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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곳에서 술 몇 잔 얼큰하게 걸치고 하모니카와 한두 가닥 줄 끊어진 기타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찾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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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은 늘 만장봉 낭만 길로만 올랐고 루트의 도전과 개척의 명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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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연을 즐기며 사람과 벗하는 것에만 심취하는 멋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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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무렵, 잠시 학교를 쉬며 낭인 생활을 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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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올라 도봉산 할머니가게에서 머무르며 암벽등반에 몰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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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주 중에 산에 오른 만이 형과 가게 곁방에서 함께 숙식하며 인연이 맺어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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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만남은 매 주말 등반 때마다 할머니가게에서 얼굴을 대하며 정이 쌓였고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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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산으로 돌아왔을 때부터는 해병대 선, 후배로 어울려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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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느라 그랬는지 약속을 하지 않아도 여름이면 설악산에서, 겨울이면 진부령 스키장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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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커피와 스튜 요리는 형의 단골 메뉴다. 만날 때마다 커피를 끓여내고 정성껏 스튜를 만들어 맛을 자랑하던 쉐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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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어울릴 때마다 형은 하모니카로 나는 우쿨렐레로 화음을 만들며 슈베르트의 숭어를 연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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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오르면 해병대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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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이 좋아 노래실력도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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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 해병대 찬가(Marines' Hymn /Halls of Montezuma)를 좋아하여 우렁찬 소리로 들려주던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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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내리 길 외설악 양폭산장에서 우연히 만나 술 양동이를 비우며 밤새 노래를 불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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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오름 길 내설악 수렴동 산장에서 만나 가던 산행을 멈추고 소주 몇 병을 비웠던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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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하모니카로, 나는 언제나 우쿨렐레로 마음을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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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동의 집으로 불러 클럽의 후배회원에게 나를 소개하며 만남을 주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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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번은 요델클럽의 총회모임에까지 불러내어 옵서버로 앉혀놓기도 했던 만이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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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술 좋아하며 끔찍이도 요델클럽을 사랑하고 나를 기억해 주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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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죽음의 위기를 넘긴 형은 말년에 술을 끊고 교회에 귀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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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커피포트와 스튜 요리만큼은 항상 자랑하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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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느님이 그에게 천국의 경비를 맡기려 했던지,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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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7월 초, 쉰두셋 해를 살았을 때쯤 형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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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을 오를 때면, 설악의 수렴동과 양폭을 지나칠 때면 늘 생각나는 만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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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은 천국에서 해병과 산 친구와 어울려 Halls of Montezuma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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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사병묘역 1-118-7192 군번 7215088 해병 하사 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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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s health to you and to our Corps, Which we are proud to s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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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any a strife we've fought for life, And never lost our n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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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the Army and the Navy, Ever look on Heaven’s s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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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will find the streets are guarded, By United States Mar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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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자부심으로 뭉친 해병대를 위하여, 청춘을 기쁘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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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전투에서도 해병 정신은 녹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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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과 해군이 한 번이라도 천국의 풍경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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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천국을 지키는 병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미 해병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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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델클럽의 추장 백인섭 선배는 만이 형을 이렇게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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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타기도 잘하지 못하면서 암벽에 미쳤고, 음악에 조예가 없으면서도 그것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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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무언지 모르면서 정의라면 목숨을 바치려 들었고, 술도 강하지 못하면서도 술에 미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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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슴에 '로스판쵸스 슈베르토 기타 신만 할렐루야!'라는 묘비를 남긴 요델클럽의 산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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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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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델산악회 백인섭 추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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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기인 '신 만'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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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친구가 한 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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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타고난 해병전사로서 베트남전에서 수색대 활동 중 클레이모어 지뢰에 맞아 전신화상을 입고 제대한 상이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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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베트남전 당시 주간지에 소개된 우리 요델산악회 회원모집 광고를 오려 가지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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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해서 귀국하는 날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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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요델산악회 집회장소로 찾아올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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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얼핏 보기엔 아주 무서운 전사였으나 보기와는 달리 아주 멋진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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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은 멧돼지 같지만, 마음은 곱디고운 낭만 덩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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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정신을 계속 고집해서 한겨울 엄동설한에도 종종 반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암벽등반까지 해치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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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중 틈만 나면 주머니에서 고물 하모니카를 꺼내어 ‘숭어’를 불어댔고, 야영할 때는 언제나 기타 한 대를 메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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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고음 줄이 끊어져 없고 나머지 줄도 제멋대로 이상하게 조율되어 있어 그 말고는 아무도 칠 수 없는 그런 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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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가지고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하여간 ‘로망스’ 전반부를 멋지게 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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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는 기타를 뒤집어 북처럼 치면서 ‘월남의 달밤’을 아주 구성지고 흥겹게 불러대곤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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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흥은 새벽녘이 되어야 겨우 사그라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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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특히 외상술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도봉산 아줌마(후에 할머니가게로 변함) 가게가 거덜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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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상이용사들로 들끓었던 원호병원에서 살인적인 행패(?)가 벌어질 때마다 맨몸으로 그들을 진압해서 의사들에게는 수호천사로 알려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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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이나 대관령스키장에 가면 스키 슬로프 한가운데에 눈을 까내고 군용 A 텐트를 쳐놓고는 “양노!”(길 비켜라)를 외치면서 막무가내식으로 스키를 즐기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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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보면 눈에 살기를 뿜어대며 못 참던 그, 산 밖의 세상에서는 거칠고 사나웠지만, 산에서만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면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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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의리와 산에 대한 애정 덩어리 신만. 그래서 그는 내게 둘도 없이 정겨웠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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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그에게는 내 손으로 개척해서 만든 '낭만길'과 '양지길'이 암벽등반의 전부였고, 거기서 누구보다도 행복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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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허리길'은 그에게 지상최대의 암벽길로서 베트남전보다 더한 도전이었음에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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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는 할렐루야를 외쳐대더니 아예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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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만든 그 '허리길'을 나보다 더 사랑했던 그가 신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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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허리길을 그의 영전에 바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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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봉산 선인봉 허리길 개척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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