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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스쳐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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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바람처럼 스쳐간…

▣ 바람처럼 스쳐간…     바람처럼의 지식창고 2018.06.13. 02:10 (2018.06.13. 02:08)

설악아 잘있거라!

2012년 2월 2일부터 5일까지 3박 4일 동안
열린캠프 등산학교 마지막 교육, 24기 겨울학기 5주차 집중훈련의 기록
 
-겨울 설악산 천불동 죽음의 계곡 등반기-
 
프롤로그
 
며칠 전부터 이어진 한파가 계속된다. 추운 날씨가 등반에 장애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오경부터 훈련센터에 모여 장비와 식량을 나누고 배낭을 꾸린다.
 
다리 부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정 8)전용준 님, 등반 참가는 못 하더라도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훈련센터에 들렸다.
갸륵한 마음이 느껴진다.
 
노승헌, 이종옥, 김기용, 정진현 대원, 배분받은 식량과 공동장비를 두고 저울질하며 눈치를 살핀다.
김기용 대원, 2년 전 집중훈련 때 고전했던 기억 때문인지 중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용준 님에게 분배와 중량 체크를 맡기고 슬쩍 물러섰다.
 
등반 참가 여부가 불확실하던 이인희 대원의 연락이 왔다. 직장 일이 잘 처리되어 훈련에 어울릴 수 있단다.
지방출장으로 어제 대전에 내려갔다가 귀경하는 중이다. 지금 천안을 지나고 있으며 조금 지연되겠다는 전갈이다.
박성배 대원이 늦어져 신경이 쓰인다. 24기 수련생으로 겨울을 처음 경험하는 대원이다.
 
준비물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데 시간 여유가 그리 없다.
출발 예정시각을(오후 세 시) 30분쯤 넘겨 박성배 님이 도착하고
미리 와서 기다리던 이인희 님 SUV와 함께 두 대의 차량에 대원과 장비를 나눠 서울을 떠난다.
 
설악에 들어가기 전에 오래전 보아둔 원통 맛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음악을 전공한 여주인의 피아노 연주가 감칠맛을 더한다.
 
비선대 도착 오후 아홉 시,
집중훈련에 합류하기로 약속한 설악동 산악인 김경미 님이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산악인 김경미,
20여 년 전에 등반을 시작했지만, 설악동으로 시집와 가정을 가꾸노라 한동안 활동을 접었던 주부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인 몇 년 전부터 다시 산악활동을 시작했으며
최근 대한산악연맹에서 주관하는 등산 강사 자격에 도전할 정도로 열심히 등반하고 있다.
 
남편인 이성후(설악산 한산 구조대 대원) 님과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우리 등산학교를 잘 알고 있으며,
몇 차례 입교 신청을 했었으나 이번에 기회가 닿아 집중훈련에 참석하게 되었다.
 

 
첫날
 
비선대 산장은 아무도 이용하는 산악인 없이 텅 비어있었다.
매년 겨울학기에 이용할 때마다 산악인으로 들어차 잠자리 펼치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는데 신기한 일이다.
부담 없이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대원소개와 인사를 나눈다.
 
금세 도착할 것 같던 세 명의 대원이 이상하게 늦어진다. 한 시간쯤 지나 김기용 대원이 산장으로 들어선다.
왜 늦어졌는지 물어봤지만 굳은 표정으로 대답이 없다. 뒤따라 도착한 이종옥 대원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빅성배 대원이 스톡을 차에 두고 오는 바람에 되돌아 가져오느라 늦었단다. 대원들이 겨울 수련을 무척 쉽게 판단하는 듯싶다.
 
열린캠프의 겨울 수련은 악천후 속에 생사를 걸어야 하는 등반이다.
예정한 일정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는 대원 개개인이 최선의 능력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사전준비와 시간 계획에 충실하고 리더의 지시에 절대 따라주어야 팀을 안전하게 이끌 수 있다.
 
일부 대원이 자신의 처지와 견해만 주장하고 등반팀 구성원으로 대원 역할을 망각하는 것 같다.
등반에 앞서 긴장을 늦추지 않게 대원에게 잠시 쓴소리를 뱉어낸다.
고용한 가이드를 따라 겨울산행을 즐기러 온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
 

 
둘째 날
 
새벽 네 시에 비선대 산장을 떠나 천불동 계곡을 오른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기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곧 발이 시리고 손가락이 얼어온다.
잦은바위골 갈라지는 곳에서 잠시 휴식한다. 예상대로 노승헌, 박성배 대원의 운행속도가 매우 느리다.
 
잦은바위골을 지나 귀면암까지 경사길은 통행 흔적이 없다. 밤새 몰아친 바람이 다져진 발자국을 덮어버린 것이다.
양폭산장까지는 쉽게 오를 것으로 기대했는데 드문드문 길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저녁보다 더욱 캄캄한 새벽이다. 헤드 랜턴의 좁은 시각으로 시야를 확보하기가 수월치 않다.
등반은 길이 없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옛 산악인의 말이 떠오른다.
 
 
칠선골(여섯 시) 접어드는 곳에서 잠시 휴식한다. 어른 키 높이의 이정표가 머리 부분까지 눈에 묻혀있다.
설악동 사람들 이야기론 올해 눈이 그리 내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산중에 자근자근 내린 눈은 예년보다 꽤 많았던 모양이다.
노승헌 대원, 40여 분 뒤처져 도착한다.
 
용소골을 지나자 날이 밝아온다.
곧이어 오련폭포를 통과하면서 사고가 생겼다.
박성배 대원이 경사진 사면 오름길에서 균형을 잃고 계곡으로 50여 미터 미끄러졌다.
뒤이어 이인희 대원의 배낭에 설 묶은 눈삽이 계곡으로 떨어져 내린다.
 
소리쳐 박성배 대원의 안위를 묻자 큰 부상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배낭을 내려놓은 이인희 대원이 눈삽을 찾으러 계곡으로 내려가는 동안 양폭산장까지 이동하여 잠시 쉰다. (여덟 시)
두 주일 전(1월 21일) 화재로 모두 타버린 양폭산장은 골격만 남은 채 검게 그을려 있다.
 
박성배 대원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김기용 대원이 마중을 나간다.
잠시 후 박성배 대원은 무릎을 절룩거리고 김기용 대원이 대신 배낭을 지고 도착한다.
박성배 대원의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다. 무릎 부딪친 곳은 큰 부상이 아니라 그럭저럭 견딜만한데 구토 증세로 매우 괴로워한다.
노승헌 대원과 함께 여기서 하산시킬까 하고 잠시 고민한다.
하지만 등산학교의 마지막 학기 집중훈련이고 유일한 24기 대원이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생각을 고쳐먹고 격려한다.
 
박성배 대원의 중량을 덜어주기 위해 배낭을 열어보니 가관이다.
웬 불필요한 것들이 그리 많은지 예비 장갑만 네 켤레에 양말, 모자, 목도리 등, 보온의류를 포함하여 5~6kg은 잡동사니로 들어차 있다.
훈련센터에서 점검해야 했는데 출발시각에 한참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살펴주지 못한 리더의 불찰이다.
절반 정도의 무게를 대원에게 분배하여 나눈다. 불평 없이 따라주는 대원이 고맙다.
 
무너미 고개와 죽음의 계곡 갈라지는 곳에 도착하여(열 시) 등반로를 살핀다.
다행스럽게 죽음의 계곡 쪽 눈길에 지나간 흔적이 있고 바람에 묻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르는 동안 이곳 통과를 계속 걱정했었는데 한시름 덜었다. 좋아! 그대로 전진이다.
(죽음의 계곡은 탐방로가 아니기에 등산로가 없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계곡을 헤쳐가는 데 무척 힘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69년 산악 10동지' 조난 추모 동판 근처에 이르자 젊은 산악인 한 팀이 내려온다. 충북대학산악연맹 팀이다.
야영지를 탐색하는 중인데 100m 폭포 입구의 바람이 세차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중이란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면 아마도 전날 희운각 대피소에서 숙박하고 죽음의 계곡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어쩐지 그 세찬 바람에 눈길이 나 있다 했더니 앞선 팀이 있어 눈길을 다져놓은 것이다. 아무튼, 행운이다.
 
매번 겨울 집중훈련 때는 이곳에서 취사하며 더운 음식을 먹었는데 시각이 많이 지연되었다.
식사를 거른 채 계속 등반하기로 한다.
 
이제부턴 눈에 빠지는 것을 대비하여 스팻츠와 덧바지를 입어야 한다.
안전밸트와 크램폰 착용을 지시하고 리더 먼저 부채꼴 계곡 앞으로 다가선다.
얼마나 많은 눈이 쌓였는지 바닥에서 3미터가량 높이에 걸려있던 추모 동판은 흔적이 없다,
100m 폭포는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있다. 언젠가 눈이 거의 내리지 않던 해는 새파란 빙벽으로 덮여있던 적도 있었는데….
 
바람이 더욱 심해진다.
가끔 한 번씩 몰아치는 눈보라는 눈을 못 뜰 정도로 거세고 '발라클라바'를(balaclava) 덮어썼는데도 삭풍은 칼날처럼 아리게 얼굴을 파고든다.
감히 앞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적당한 구실만 있으면 그대로 철수하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등반이고 도전이다. 그래 여기만 올라서면 위쪽 협곡은 그래도 바람이 덜하고 괜찮을 거야.
마음을 추스르고 기대를 하며 눈에 뒤덮인 100m 폭포로 발길을 내디딘다.
 
 
 
바람의 영향으로 눈이 적당히 굳어 그리 심하게 빠지지는 않는다. 100여 미터를 오르자 바람이 조금 잦아든다.
뒤따르던 이종옥 대원에게 선두를 내주고 잠시 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제야 준비를 마친 마지막 대원이 200여 미터 뒤처져 부채꼴 계곡 입구를 들어선다.
 
폭포를 올라 협곡으로 들어섰다. 경사는 더욱 심해지고 협곡은 온통 눈밭이다.
정진현, 이종옥 대원이 교대로 앞장서 눈길을 뚫어주고 이선화 대원이 뒤를 받친다.
눈에 대한 경험이 없고 집중훈련이 처음인 이인희, 김경미 대원도 지친 기색 없이 잘 따라준다.
 
어느새 오후 두 시가 가까워져 온다. 뒤처진 대원을 기다릴 겸 잠시 수프를 끓여 대원의 허기를 달랜다.
30여 분쯤 뒤에 김기용 대원이 힘겹게 올라온다. 계속 운행하기엔 무리다 싶어 여기서 야영할 것을 지시한다.
집중훈련에 매년 참석했던 대원은 아직 갈 길이 먼데 싶어 의아한 표정이다.
 
눈삽을 조립하고 경사진 눈을 파내며 캠프사이트를 만든다.
이인희 대원, 옛날 공수특전사 복무할 때 비트 만들던 솜씨를 아직 안 잊었는지 삽질이 대단히 능숙하다.
이종옥 대원과 호흡을 맞추며 잠깐 사이에 야영지를 만든다. 아마도 노가다 생활에 땀 흘리면 3대가 빌어먹는다는 속담을 잊은듯하다.
 
노승헌, 박성배 대원, 세 시가 넘을 때쯤 지친 기색으로 힘겹게 도착한다.
예비역 해병의 망신이다. 해병대가 아닌 해변대 출신으로 호칭이 바뀌고 공수특전사 출신 예비역은 득의만면 흐뭇이 미소를 짓는다.
 
플라이 시트를 지붕처럼 씌워 눈바람을 막고 저녁 취사를 한다.
이선화 대원을 제외한 다른 대원은 이쯤에서 야영하는 것이 흡족하고 안심된 표정이다.
식사와 함께 몇 순배의 곡차가 돌았지만, 대원 대부분이 사양한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여섯 시쯤 모두 침낭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폭풍이 거세지고 플라이 시트가 찢어져 바람에 날려도 아무도 손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침낭 밖으로 나가는 것이 너무 괴로운 밤이다.
하지만 생리현상은 참을 수 없다. 바람의 시차를 확인하면서 잠시 잦아들 때 재빨리 침낭 지퍼를 연다.
품에 묻어둔 등산화를 꺼내 신고 일어서면 눈이 침낭 안으로 몰려든다. 신속하게 침낭 커버를 여며야 한다.
 
용변을 보는 것도 전투적이다.
잠시 방심하면 눈 속에 빠져 등산화와 양말이 젖고
한 걸음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계곡으로 수백 미터가량 미끄러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침낭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지퍼를 올리는 것도 힘겨운 전투다.
 
바람은 폭풍 수준이었으나 자정 전까지 별빛은 그리 고울 수가 없었다.
속초시의 야경은 물론이고 밤바다에 떠 있는 어선의 집어등 불빛까지 보일 정도로 맑은 밤이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폭설은 아니지만, 리더에겐 또 다른 걱정거리다. 눈이 쌓인 만큼 운행에 장애를 주고 체력을 소모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날
 
새벽 다섯 시 출발을 계획하였으나 겨울등반에 서툰 대원이 많다.
얼어붙은 장비를 챙기고 배낭을 꾸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제야 터득한다.
전날 미처 못 올린 고도가 두 시간가량 남아있는데 싶어 또다시 걱정이 앞선다.
 
여섯 시가 넘어 리더가 먼저 눈 덮인 계곡을 앞장선다. 눈은 그쳤지만, 추위는 여전하다.
발과 손이 얼어 통증이 느껴진다. 동상이 염려되어 쉬는 동안에도 계속 발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손가락을 움직이지만 쉽게 데워지지 않는다.
조금 온기가 돌다가도 다시 차가워지고 통증이 느껴지기를 반복한다.
 
어제는 무척 힘들어하며 입에 지퍼를 채웠던 노승헌 대원,
이제 기력이 회복되었는지 후미로 뒤따르는 박성배 대원에게 겨울등반의 지혜를 열심히 설명한다.
위쪽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소리쳐 제안한다. 노 교수님, 앞으로 오르세요!
눈치를 알아차린 노승헌 대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을 앞질러 선두로 올라선다.
 
눈길에서는 선두가 가장 힘든 역할이다.
뒤따르는 대원에 비해 눈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진로를 선택하느라 좌우로 많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르는 순서대로 체력소모 순위가 결정된다.
가장 뒤에 오르는 대원은 그나마 앞서 다져진 눈길을 따라 오르기에 체력소모가 가장 적다.
그런 사실을 모를 바 없는 노승헌 대원, 리더의 은밀한 구박을 알고는 토 달지 않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계속 가팔라지던 계곡이 차츰 좁아지더니 열 시쯤 좌우 능선이 맞닿는 곳에 다다른다.
암벽구간이 나타나고 등반은 더욱 까다로워진다.
 
김경미 대원, 암벽구간에서 오가질 못한 채 구원을 청했지만, 곧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올라선다.
이선화 대원, 이런 지역의 위험을 아는지라 계속 눈이 있는 좁은 '끌롸르'를(couloir) 따라 오른다.
급경사 암반에 조금 쌓인 눈이 굳지 않은 상태여서 오르기에 만만치 않은데도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돌파한다.
그런 와중에도 김기용 님은 배낭을 내려놓고 마과목 열매를 따러 가는 여유를 보인다.
 
 
 
실수는 곧 사고로 연결되는 지점으로 가파른 협곡을 따라 거의 수백 미터를 미끄러져 내리는 곳의 정점이다.
자칫 균형을 잃고 구르기라도 하면 몇 군데 부러지거나 최악에는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안전을 위해서 로프를 사용해야 했지만, 등반 속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원의 능력에 따라 리더가 판단할 몫이다. 이런 면에서 열린캠프의 겨울 집중훈련은 교육이라기보다 실전 등반이다.
 
선두로 능선에 올라선 정진현 대원, 잡목 숲에서 깊은 눈 탓으로 거의 전진을 못 한다.
아직도 화채 능선까지 오르려면 잡목 숲을 헤치며 삼백여 미터를 더 가야 한다. 대략 두어 시간은 헤쳐가야 할 것이다.
 
지형을 살펴보니 계곡을 잘못 들어섰다.
죽음의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계곡이 세 번 갈라진다.
첫 번째 나타나는 갈림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대청봉 아래로 올라선다.
두 번째 마주치는 갈림에서 왼쪽으로 올라야 '천당릿지'와(염주골과 분기 능선) 맞닿은 '화채능선' 쪽으로 올라설 수 있으며
통과하는 잡목 숲의 거리도 짧아 체력소모가 적다.
 
그러나 두 번째 계곡 갈리는 곳의 왼편은 급경사가 막아서 있어 계곡이 아닌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새벽 캄캄한 중에 계곡을 오르느라 목표한 등반로를 놓친 것이다.
예정대로 염주골을 가기 위해 무리하게 운행하다 보면 체력 소진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상으로 계획한 훈련과 야영지 찾기가 수월치 않을 것 같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고전하는 정진현 대원을 두고 잠시 생각하다 사면을 몇십 미터 가로질러 지형을 살핀다.
다행히 건너 계곡으로 뻗은 사면은 잡목이 없고 눈이 적당히 굳어있다.
염주골 하산을 고집하지 말고 원래 오르려고 했던 계곡으로 내려가며 훈련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즉시 진로를 결정하고 계획 수정을 알린다.
 
급경사 사면이고 아직 그리세이딩에 익숙지 않은 대원들이라 리더가 먼저 미끄러져 내려가며 시범을 보인다.
힘들게 올라섰던 고도를 순식간에 내려뜨린다.
10여 분쯤 내려가 계곡으로 들어서니 협곡 위아래로 경사가 대단한 눈길이 수백 미터를 뻗어있다.
'데드맨'으로(스노앵커) 확보점을 만들고 로프에 배낭을 달아 내려보낸다.
리더가 먼저 그리세이딩으로 내려오고 대원이 뒤따른다. 자연스레 그리세이딩 훈련이 이루어진다.
 
로프를 한 번 더 연결하여 백여 미터 이상을 내려온다.
30여 kg의 배낭을 메고 종일 눈 속에서 힘겹게 고도를 올리던 대원이 환호한다.
이쯤에서 설상 등반에 따른 기술교육을 했으면 싶어 여기서 야영할 것을 알린다. 벌써 정오다.
 
잠깐 사이 김기용 대원이 리더 위치를 통과하여 아래로 수십 미터를 더 미끄러져 내려간다.
가끔 리더의 지시를 못 알아들은 척 뜻대로 행동하는 대원이다.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 임의 행동은 팀 전체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울컥하는 마음에 나무람을 치려 따라 내려갔더니 제동이 되질 않아 일어난 실수란다.
 
이왕 내려온 김에 지형을 살피니 조금 아래에 계곡이 구부러지며 소(沼)가 파여 있다.
소 옆으로 휘어가는 계곡 한쪽에 쌓여있는 눈이 어마어마하다.
눈을 파내고 야영지를 다듬느니 설동을 파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
조금 고생하더라도 눈보라 속에 비박하는 것보단 좋을 것이다. 입구를 표시하고 파 들어갈 방향을 알린다.
 
역시 이인희, 이종옥 대원은 탁월한 건설 기술자이다.
두 시간 남짓 걸려 아홉 대원이 넉넉히 몸을 눕힐 설동을 만들어 낸다.
김기용 대원은 세련된 나무꾼이다. 눈 속에 빠져드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오르내리며 쓸 만한 나뭇가지를 주워 모은다.
 
노승헌 대원은 설동 옆으로 화장실을 멋지게 만들었다.
7년 전 알래스카 데날리 봉 원정등반 때 뺑기통을 담당하고부터는 캠프의 용변 위생처리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했던 대원이다.
김기용 대원이 주워온 나무로 안전한 발 디딤까지 만들어 누구나 한 번쯤 앉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해 있을 동안 잠깐 불을 피우고 오늘 등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왜 계획을 수정했으며 깊은 눈에서 중량을 지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소요되는지,
야영지 선택의 지혜와 눈삽의 효과는 어떠한지…,
 
그사이 이인희, 김경미 대원에게는 잠시 추락활강 제동훈련을 시켰다.
눈삽을 엉덩이에 깔고 경사를 내려오게 했더니 속도가 엄청나다. 참 다양하게 쓰이는 장비이다.
 
뜨거운 라면 국물에 곁들인 술 한 잔이 일품이다.
시에라 컵에 따르는 소주는 그대로 슬러시가 되고 알코올 50도의 독주는 꿀처럼 진득하게 입술에 달라붙는다.
어지간히 추운 날이다.
 
다듬어진 설동에 들어서니 가히 환상이다. 어제 야영지와 비교를 한다면 노숙과 칠성급 호텔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모두 김기용 님의 그리세이딩 실수 덕분이라며 즐거워한다.
 
 
식단과 취사를 맡은 이선화 대원, 귀찮고 궂은일을 자신의 권리로 만들어 열중한다.
운행 중에는 수프와 라면을 끓이고 저녁이면 식사를 준비한다.
대원의 물통에 끓인 물을 담아 침낭에 넣어주는 배려와 함께 다음날 필요한 식수를 대비한다.
등산학교와 역사를 함께하며 학교에서 주도한 모든 등반에 참여한 베테랑 여성등반가이다.
타인의 단점을 포용하는 능력만 갖추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김경미 대원이 가져온 오가피 원액을 소주에 섞으니 술이 술술 잘 넘어간다.
덕분에 약간 취기가 돈 노승헌 대원, 결국 사소한 일로 이선화 대원과 언성을 높인다.
등반팀에서 목청을 높일 권리는 리더에게만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다.
 
플라이 시트로 입구에 커튼을 만들어 다니 안팎의 온도 차가 거의 20도 내외다.
랜턴을 켜자 사방이 반사경으로 불빛에 반짝거린다. 식수는 벽을 긁어낸 눈으로 녹여 만든다.
눈과 사투를 끝낸 하루를 산노래 화음으로 마무리한다.
 
 

 
넷째 날
 
설동, 그것참 희한한 물건이다.
눈보라 피할 수 있고 아늑하며, 용변 보러 갈 때나 침낭 여닫을 때도 여유롭고 불편함이 없다.
정말 푸근하고 따뜻하게 잘 잤다. 여섯 시 기상을 알렸으나 네 시 조금 지나자 대원 대부분이 일어난다.
모두 편안하고 상큼한 표정이다.
 
일어난 김에 커피라도 한잔하자며 스토브를 켜고 물을 데운다.
이선화 대원, 여섯 시 기상인데 왜들 이리 소란이냐며 불평이다.
노승헌 대원, 심통 리더의 대원 깨우는 방법이라며 거든다.
 
해뜨기를 기다릴까 하다 식사를 마친 대원의 배낭 정리가 빨라 이른 시각에 하산한다.
날이 밝기 전의 하산은 조심스럽다. 어둠 속에 지형을 가름하며 위험이 없는 곳을 살펴 그리세이딩으로 내려온다.
 
아래쪽이 희끗희끗하다 싶었더니 노출된 빙벽이다.
설면 경사와 비슷하기에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더니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지며 눈 속에 처박힌다.
 
어제저녁 우리 팀이 야영한 곳에 불빛이 보인다. 뒤이어 등반하던 팀이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중이다.
전날 눈 벽에 꽂아두고 온 두꺼비 세 마리를 회수하려 했는데 틀렸다. 조심스레 우회하여 계속 미끄러져 내려간다.
 
100m 폭포를 내려오는 동안 날이 밝아온다.
부채꼴 계곡 입구에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고 적설 상황에 따른 그리세이딩 방법과 응용을 공부한다.
이인희, 박성배, 김경미 대원은 전날에 이어 추락활강 때의 정지 기술을 훈련한다.
다음 주에 대한산악연맹 2급 지도자 겨울연수에 참여하는 김경미 대원에게는 꼭 습득해야 할 중요한 기술이다.
 
이틀 전과 달리 야영 텐트가 꽤 있다. 겨울 훈련을 위해 죽음의 계곡을 찾은 등반팀들이다.
대부분 아직 취침 중이고 주변은 식사 뒤에 버린 찌꺼기로 얼룩져 있다. 김경미 대원이 한마디 한다.
"설악동에서 15년 정도 살면서 꽤 많은 팀의 산행을 보았지만 열린캠프 등산학교 팀처럼 제대로 등반하는 분들은 처음 봐요."
 
 
 
정오쯤 비선대에 도착해 막걸리로 갈증을 축인다.
안면 있는 주인이 반기며 서비스 안주까지 가져다준다.
 
설악동으로 내려와 척산온천으로 향했다.
함께 등반한 김경미 대원의 도움에 원주민 할인을 받아 절반 가격으로 입욕한다.
문명생활을 떠난 지 나흘 만에 맛보는 풍요로움이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니 통증이 발을 찌른다. 대원 모두 동상 증세를 호소한다.
못난 리더 만난 탓이라고 했더니 노승헌 대원이 곧 말을 고쳐주며 깔깔거린다.
"못난 리더가 아니고 모진 리더 만난 탓이에요!"
 

 
에필로그
 
설악동 구조대대원의 추천으로 영랑동 해안도로에 있는 생선 횟집을 찾아 뒤풀이를 가진다.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곳이다.
속초소방서 소방관으로 근무가 없었던 (정14)라상식 님이 함께 어울리고 등산학교 마지막 수련의 감회가 이어진다.
 
소회를 말하던 김기용 대원이 울컥 눈물을 삼킨다.
선두를 거의 도맡아 진로를 열었던 정진현, 이종옥 대원,
등반 중에 위통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련을 따라준 박성배 대원, 모두 온 힘을 다한 훌륭한 대원이다,
 
 
이순 연배이지만 똘똘 뭉쳐진 지혜는 팔순으로 30대의 체력까지 가진 이인희 대원,
스스로 벌구이자 모닥불 위의 노가리라 칭하지만 늘 열린캠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노승헌 대원 덕분에 사고 없이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내 인생의 등반을 마쳤다.
등산학교 마지막 학기이기에 가급적 여유로운 수련을 갖고자 했지만, 자연이 천성을 알아주는 탓인지 끝까지 시련을 주었다.
 
등반 일정 중에 설악 대청봉의 체감온도가 영하 53도였다니 모진 리더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함께 수련한 대원 모두는 도전에 따르는 힘든 과정을 넘어섬으로 그 이상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감춰진 잠재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열린캠프를 사랑하고 어울려 등반했던 모든 가족에게 감사드리며, '잘 있거라 설악' 산노래로 작별 인사를 드린다.
【연결】http://cafe.naver.com/frcamp/1179
 
 
대원
(정 4) 노승헌
(정11) 이종옥
(정18) 김기용
(겨울) 이선화
(22기) 정진현
(23기) 이인희
(24기) 박성배
(캠프) 김경미
 
【작성】 전두성의 산과 삶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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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