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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바람처럼 스쳐간…
전두성의 산과 삶의 자취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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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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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병대(大韓民國 海兵隊) # 전두성
【여행】
(2018.06.13. 09:10) 
◈ 전두성의 해병 이야기(3)
자승자박(自繩自縛) 해병 기압 빠진 전 해병, 제 꾀에 빠지다!
(진해 해군교육단 시설학교 '지휘통신 차량 운용교육' 입교)
 
주위에 부모님의 무척 가까운 친구로, 또는 집안 친척인 작은아버지까지 해병대 영관급 장교가 몇 분 있었지만,
어머니 친구인 통신감은 작은아버지가 더 가깝게 도울 것이라고 믿었고,
작은아버지는 통신병으로 보직 받은 나를 어머님 친구인 통신감(통신병과의 최고 책임자)이 어련히 보살펴줄 거라고 방임하다
나는 그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다.
 
해병대 대령으로 병과장이면 육군의 장성급 파워를 가지고 있었으나
두 분 대령의 방심과 아버지의 엄명으로 난 그 좋은 배경을 그림의 떡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통신병과의 최후 말단부대인 포항 1해병사단 22대대까지 내려와
작열하는 초여름 포항의 뙤약볕 아래 작업원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IBS(Inflatable Boat Small) 대대로(기습특공대대) 불리지만
당시 스키 대대란 타이틀을 가진 22대대는 이름만 그럴듯했지 전형적인 노가다 대대였다.
물론 겨울이면 수색대와 함께 강릉 대관령에 스키훈련을 간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건 말뿐으로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비전으로 보였다.
 
우리나라가 아직은 어지간히 못 살던 때인가 보다.
그때는 군대에서 부식을 자체 해결하기 위해 부대 주변에는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부어 호박, 가지를 키웠고, 사단 영농반에선 누에도 쳤다.
한창 뽕잎을 갉을 때면 영농반과 가까운 우리 부대에서 작업원을 차출해 순검 후까지 뽕잎을 훑는 작업을 할 때도 있었다.
 
(순검 : 해병대와 해군 특유의 취침 전 점호)
 
내가 대대에 전입하기 직전에 백령도 도서방어부대(백령도 6여단 창설 전 명칭) 증설에 따라 병력을 차출당한 22대대는
아직 증편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대 전체 병력이 250여 명 밖에 되질 않았다.
 
대대 편제의 절반도 안되는 병력으로 왜 그리 작업은 많은지?
사단 영농반 작업 지원, 오천 사격장의 침투사격 교장 건설, 사단 비행장 옆 골프장에 깔 잔디 채취,
보리수확 대민지원 등이 그 시절에 끌려나갔던 대표적 강제노역이다.
그나마 대민지원은 짬밥(군대 급식) 대신 사제 밥을 먹을 기회가 있기에 선임들이 우선순위로 가려하는 가장 선호하는 작업이었다.
 
태권도 심사일이 다가오면 며칠 동안 순검까지 비롯하여 온종일 태권도 연습을 할 때도 있었다.
그 기간만큼은 강제노역에서 벗어났지만, 뙤약볕에서 태권도 연습하는 것도 괴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21대대가 맡았던 5분 대기 중대에 병력지원으로 잠시 파견 나가지 않았더라면 해병이 아니라 노가다에 끌려왔던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훈련이라고는 10K 무장 구보, 50K 야간 행군이 전부였다.
총칼은 녹슬고 삽날은 빛났다. 당시 매일같이 우리의 처지를 자조하던 말이다.
 
바로 옆 병사에 자리 잡은 23대대가 120일 훈련 마무리로 PHIBLEX(상륙작전) 마치고 귀대하는 것을
사단 영내 도로 연변에 도열하여 손뼉 치고 부럽게 바라보면서 군인과 노무자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작업 많고 희망없는 22대대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꾀를 짜내었다.
마침 국외에서 외항선을 타던 아버님이 휴가차 귀국하여 면회를 오셨다.
이산가족 상봉을 빌미로 2박 3일 외박증을 받아 그 길로 서울로 튀었다.
위수 지역 이탈? 흐흐흐, 무엇보다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던 욕심이 앞서 그런 통제는 전혀 와 닿지 않았다.
헌병만 피할 수 있으면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해병 헌병은 부모님이나 여자친구와 같이 있는 원스타(이등병 계급을 비아냥거려 부르던 표현)에겐 말도 걸지 않았다.
혹시나 마주치면 예의 바르고 절도있게 깍듯한 경례만 보낼 뿐, 쫄병의 위신을 세워주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던 멋스런 헌병이었다.
또한, 개통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았던 고속버스는 포항의 관문 효자 검문소를 정차 없이 통과했었다.
 
외박기간 동안 표정 관리하며 아버님께 그럴듯하게 말씀드렸다.
군대생활 편하게 지내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다. 단지 군대에서도 자기 계발의 기회를 갖고 싶다.
군대 내에도 자기 발전에 도움 되는 여러 유용한 교육이 있을 텐데 그런 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식으로 말씀드린 것 같다.
 
아버님이 작은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외박을 마치고 부대에 귀대한 뒤 며칠 지나자 해군본부 인사명령으로 교육 차출 지시가 내려온 것이었다.
그 교육은 12주 일정의 "지휘통신 차량 운용교육"으로 진해에 있는 해군 시설학교에 위탁으로 진행하는 교육이었다.
 
사단본부에 들러 각 부대에서 차출한 교육 입소자와 함께 신고하고 사단 경리과에서 출장비 받아 북문(포항 1해병사단 정문)을 빠져나왔다.
진해까지 가는 출장비가 천몇백 원가량 되었을까?
그 돈에서 도장 값 제하고 겨우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동전은 점심 때 사단본부 PX에서 라면 한 그릇 사 먹은 것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튼, 주머니가 텅 빈 채 온종일 대구를 거쳐 삼랑진, 진해까지 가는 동안 쫄쫄 굶고,
대구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는 배가 고파 난생처음 육군 병사에게 삥땅까지 뜯었다.
외박도 한번 다녀온 터라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그만한 용돈을 지녔을 텐데 그땐 정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포항에 있는 동안 이병 월급 600원인가를 두 번 받았는데
여름 전투수영 훈련에 입을 수영팬티 값을 400원씩 공제하고
남은 돈은 라면 몇 봉지와 소주 두어 병값으로 이미 날아가 버린 터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 없는 배고픔과 서러움은 귀신 잡는 해병도 도둑으로 만든다.
그래서 긴빠이는 해병의 가장 오래된 전통문화로 자리잡혔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때까지만 해도 포항을 떠난다는 즐거움이 앞서 앞으로의 더 큰 고난을 간과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해에 도착, 막상 풍호동 시설학교에 입교하여 교육 동기생을 보니
포항, 김포, 백령도 등 각 지역 해병부대에서 근무했던 분들로 하사관 8명, 병 16명 등 모두 24명의 그룹이었다,
그중에 하사관은 78, 83, 88기 등 고참 하사관들이 네댓 명이고 하사 막내가 105기(??),
병들은 262기 상병부터 13명이 내 선임이고 동기 한 명에 후임 한 명이다.
 
그런데 오신 분들이 무언가 포스가 심상치 않거나 얼이 빠져있든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교육은 그때까지만 해도 교육 종료 후 원대복귀를 하지 않고 부대 배치를 다시 받는 교육이었다.
또한, 나처럼 해군 본부 명령으로 교육에 참가한 해병은 아무도 없고,
모두 부대에서 버리고 싶은 분들로 사고뭉치거나 악성 고문관으로 차출된 해병이 대부분이었다.
 
하사관 침실이 따로 없고 한 내무실에서 수병과 하사관 24명이 함께 생활하는 내무실,
모두 정이 들고 전우애가 생기기 전까지 몇 주는 정말 지옥이었다.
다양하고 한 가락 하는 성격들, 고참 하사관부터 사고자 선임 수병까지 전형적 꼴통 병사가 모여있는 내무반이 바로 그곳이었다.
교육을 끝내고 우리만 모이는 저녁이면 그때부터 온갖 핑계로 린치와 구타가 이어지고 후임을 괴롭히는 지혜를 짜내는 곳이었다.
 
정문을 같이 쓰는 부대로 해군 UDT 교육대가 우리 병사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고
앞쪽엔 시설학교에 입교한 해군과 해병 신병 내무실이 있었다.
주간 교육 외에 식사 때는 신병들을 데리고 식사 당번 팀장을,
저녁에는 신병과 한 조로 정문 위병 오장(조장, 팀장의 해병대식 표현) 근무를 맡곤 하였다.
 
* 당시 시설학교는 주계병 없이 선임하사(해군 하사 10호봉) 한 분이 보급을,
그리고 민간 고용인 한 분이 밥과 국을 짓는 일을 맡았고 교육생 중에서 당번을 선정하여 배식과 식당 청소 및 정리를 시켰다.
 
 
주말이면 같은 정문을 쓰는 UDT 교육생의 외출 외박이 있었다.
UDT 교육생은 대부분 해군 장교와 하사관 또는 해병대와 특전단 파견 장교와 하사관으로,
잘 단련된 체격과 빡센 훈련에 따른 근성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귀대 시각 때 우리 내무실에서 위병 근무를 맡으면 꼭 시비가 일어나고 말썽이 있었다.
나 역시 해병대 훈련 마치고 실무 경험이 석 달가량 밖에 안 되었을 때라 UDT가 뭔지 수색대가 얼마나 쎈 부대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냥 내무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대상이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내무실에선 졸병이지만 위병 근무 때는 마이가리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
해병 병장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한바탕 붙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니 사고가 없을 수가 없다.
위병 수칙을 앞세운 근무자로 원칙을 내세워 시비를 걸었고 시비는 해병과 UDT 교육생의 충돌로 이어졌다.
 
UDT 위탁교육으로 입교한 1해병사단 수색중대 출신의 해병 하사가 중재를 하면서 충돌은 수그러들었지만
그런 외형적 사고는 꼴통 내무반의 신선한 자극이었다.
또 그때만은 모두 한편이 되어 시비를 일으킨 근무자를 격려하고 보호하였다.
바깥의 그런 시비가 오히려 내무실의 결속력과 정을 쌓게 하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어쨌든 조금 편해 보고자 겨우 짜내었던 꾀는 자업자득으로 연결되었고 그렇게 국방부 시계는 12주가 더 흘러갔다.
나는 수석 수료생으로 표창장 한 장 받고, 군대 운전면허증 받으며 교육을 종료하였다.
통신학교 수석 수료까지 포함하여 벌써 두 번째 표창이지만 해병대는 내게 그 흔한 특별휴가 한 번 주지 않았다.
 
교육이 끝난 뒤 김포 여단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집이 있는 서울이 가깝다고 환호한 것은 또 한 번의 실수였다.
김포에서 더 큰 시련의 가혹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그때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大韓民國 海兵隊) # 전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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