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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가족과 친족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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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 국립 중앙 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친족(親族)
(2019.11.21. 19:07) 
◈ 고려시대의 가족과 친족 알아보기
가족(家族)과 친족(親族)에 대한 개념이 혼란스럽다. 무슨 말인가? 적어도 이 강의를 듣기 전까진 나도 가족과 친족의 개념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결혼제도는 율곡 이이가 모친의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듯이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가족(家族)과 친족(親族)에 대한 개념이 혼란스럽다. 무슨 말인가? 적어도 이 강의를 듣기 전까진 나도 가족과 친족의 개념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결혼제도는 율곡 이이가 모친의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듯이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고려 시대는 여자가 재혼(再婚)하는 것은 흉이 아니며 결혼하면 신랑이 처갓집에서 장인, 장모와 함께 살아서 "장가간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부가 "시집간다"로 바뀌고 딸이 시집가면 시댁 귀신이 되라고들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부가 되면 재혼하기 어렵고 수절(守節)을 강요당하며 오죽하면 미망인(未亡人)이라 불렀을까. 상속재산도 고려 시대의 아들, 딸 구분 없이 균분 상속(均分相續)이 아닌 장자(長子)에게 많이 주는 상속제로 조상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고려사 자료에 나타난 기록은 아래와 같다.
① 일찍이 부모를 여읜 후 백숙부나 당숙부 집에서 양육된 것이 아니라 외가에서 양육된 사례(『高麗史』 卷99 列傳 12),
②출가한 딸이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서 생활하는 예(「崔婁伯妻廉氏墓誌」, 1148),
③여동생이 과부가 되어 친정 오라버니댁에 와서 생활을 한 사례(「王瑛墓誌」, 1187),
④ 8명의 아들과 1명의 사위가 함께 거주한 사례(『高麗史節要』 卷18 元宗順孝大王甲寅條),
⑤출가한 자매가 동거한 사례(『高麗史』 卷124 列傳 37 裵佺),
⑥아버지가 출가한 장녀의 집에서 사망한 사례(「延德郎君韓氏墓誌」),
⑦부모가 아들과는 별거하더라도 딸과는 동거하며 딸이 부모를 봉양한다는 사례(『高麗史』 卷109 列傳 22),
⑧고려 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들어 거기서 아들이나 손자가 성장할 때까지 지냈다는 전형적인 서류부가의 사례(『太祖實錄』 卷29 太宗 15年 春正月 甲寅條). 이들 사례는 고려 시대의 가족유형이 조선 후기에 이상형으로 생각한 직계가족과 크게 달랐음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실의 사례인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의 근친결혼
천추태후는 고려 태조 왕건의 손녀이고, 제5대왕 경종의 비이며, 제6대왕 성종의 여동생이고, 제7대왕 목종의 어머니, 그리고 제8대왕 현종의 이모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고려를 세운 왕건은 각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30여 개의 호족집안 딸들과 결혼을 했다. 그 가운데 황주 지역의 호족 출신인 황주원부인도 있었다. 황주의 황보씨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가 컸다. 황주원부인의 아들인 왕욱이 천추태후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선의왕후로, 왕건이 정덕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왕건의 자손이다. 이복남매끼리의 혼인인데, 고려 초기 왕실에서는 흔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천추태후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한,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한 평가이다. 전통을 중시하고 강한 고려를 꿈꿨던, 정치적인 야망과 능력이 탁월했던 여걸 천추태후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네이버 캐스트-
 
 
지난주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이종서교수(울산대 역사문화학과)가 강의한 내용을 포스팅한다.
 
● 가족관계
1. 솔서혼(서류부가혼)의 보편성과 거주처 선택의 자율성
고려시기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부부와 미혼 자녀를 기본 단위로 하는 소가족이었다. 주로 남성이 처가로 이동하여 장인과 사위, 외조부와 외손자와 동거하였다. 이러한 거주관행을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또는 솔서혼(率壻婚)이라고 한다.
 
솔서혼 중에서는 어린 나이에 처가로 들어가 성장한 후 혼인하는 데릴사위혼도 성행하였다. 고려의 남성들은 관습상 처가로 장가를 들었지만 이후의 거주는 처가에서 평생을 살거나 친가로 이동하거나 제3의 장소로 이동하는 등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이전의 혼인 후 거주관행은 부계나 모계처럼 특정 혈연을 중시하는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사위가 처가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관행은 사위와 장인․장모의 관계를 매우 친밀하게 만들었다.
 
부모가 딸부부와 동거하는 관습으로 인하여 부모는 딸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당연히 외손의 탄생을 큰 경사로 여겼다. 외조부모와 외손 사이의 친밀감은 중국에서 소공 5개월에 불과한 외조의 상복제를 고려에서는 친조부와 동일하게 자최(1년)로 올리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 이전에는 솔서혼 관행으로 말미암아 사위와 장인, 부모와 딸, 외조와 외손간의 친밀감이 매우 높았다. 남성은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장가를 가서 처부모를 모시고, 노년기에는 딸 부부의 봉양을 받으며 외손의 재롱을 보았을 확률이 크다.
 
이러한 거주관행은 가치관이 개입된 법칙이 아니라 누적된 경험에 기반한 경향성이라는 점에서 부계나 모계 의식이 작용한 거주관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솔서혼 관행은 보편적인 관습일 뿐 이후의 거주처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혼인 후 여자가 시가로 이동하는 경우도 발생할 확률이 낮았을 뿐 솔서혼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딸 부부와 사는 솔서혼이 우세하였지만 딸이 없거나, 특수 직역을 담당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솔서혼과 반대되는 방식의 거주 또한 적지 않았고 계층별 편차도 컸다고 보인다.
 
2. 자녀간 균분상속관행
고려․조선 전기 사람들이 느꼈던 외가에 대한 친밀감은 처가 거주가 자연스러웠던 삶에 의해 형성된 개연성일 뿐, 본원적이거나 구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에 조부와 외조부, 손자와 외손자는 통념상 동일한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바탕 위에 자녀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재산을 나누는 분재문서(分財文書) 등 고려시기 생활 자료는 남은 것이 거의 없어 상속 방식과 내역은 문집과 사서(史書)에 균분상속관행을 알려주는 몇 건의 사례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인 16세기 이전 분재문서는 균분상속관행이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음과 더불어 균분의 내용과 정도를 잘 보여준다. 이들 문서는 부모의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철저하게 균분한 내역을 담고 있다.
 
조선의 기본법전인《경국대전》의 상속관계 법령도 균분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승중자(承重子.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드는 사람)에게 5분의 1을 더 주도록 규정하였지만 규정에 그칠 뿐 15세기 문서에서 이러한 예는 확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부모가 사망한 후의 분재에서는 ‘집주(執籌)’라고 하는, 제비뽑기 방식으로 재산을 나누었다. 그 결과 형제자매는 수적인 평균뿐 아니라 질적인 평균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3. 수평적 부.처관계
조선전기까지는 남자가 처가로 장가를 들었으며, 자녀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혼인은 일방이 타방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친족관계와 재산을 유지한 채 일대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혼인 전후를 막론하고 부․처의 권리 의무관계는 각자의 혈연에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1218년(고려 고종 5)에 사망한 조씨(趙氏)는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양육 되었고, 남편과 사별한 뒤 남동생의 보살핌을 받았다. 묘지명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유년기에는 외조부가 자식처럼 사랑했고, 중년에는 남동생이 어머니처럼 섬겼으며, 만년에는 아들과 사위의 봉양을 풍후하게 받았다’고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여성은 솔서혼과 균분상속 관행에 기인한 수평적인 지위와 권리를 이용하여 남편의 행위에 적극 개입하고 심지어 남편을 폭행하기까지 하였다. 고려 말에 개성윤(開城尹)을 지낸 홍수로(洪壽老)는 질투하는 부인이 휘두른 목판에 맞아 허리가 부러져 죽었다. 부인도 감옥에서 죽었다.
 
질투가 심하고 사나웠던 최운해의 처 권씨(權氏)는 행패가 몹시 심했다. 최운해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옷을 찢었으며 활을 꺾어버리고 칼로 말을 찌르고 개를 쳐서 죽였다. 이어 최운해 마저 치려 하자 최운해는 도망하여 겨우 해를 면하였다.
 
홍수로와 최운해의 경우는 당시로서도 드물고 심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고위 지배층에서 부인이 남편을 공공연히 폭행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부 관계의 수평성에 기인한다. 혼인을 일방이 타방에 귀속되는 행위로 여기지 않고, 각자의 친족관계와 재산을 유지한 채 남자가 처가로 장가드는 관행으로 인해 부부관계는 사례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이렇듯 부.처가 불화하는 사례만큼이나 부.처가 서로를 극진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도 다수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부부 관계의 선택 폭이 매우 넓었음을 알려준다. 쌍방의 가족 내 지위가 대등한 가운데 부․처의 성격과 처한 조건 등에 의해 심한 갈등이나 지극한 애정이 거리낌 없이 외부에 노출되었다. 남편이 죽은 부인에게,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바친 고려시대 제문(祭文)에는 ‘창자가 끊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간 사람은 유감이 없지만 남은 사람은 오직 눈물뿐인’ 슬픔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자녀 균분상속과 솔서혼 관행을 고려하면 고려에서 한 남성이 여러 명의 처를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러 명의 처를 둔 사례가 확인된다. 가장 뚜렷한 사례로는 국왕을 들 수 있다. 역대의 고려 국왕들은 대부분 후비를 여럿 두었다. 지배층에서도 다처 사례가 확인된다. 전기에는 극히 드물게 확인되지만 후기에 크게 증가하였다.
 
그런데 고려에서 부부형태를 종교 교리나 윤리 및 이에 근거한 법제로 규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명령이나 법률에도 부.처형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고려의 부.처형태가 궁극적으로 현실조건과 개인의 성향이 작용하여 결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거주관행과 마찬가지로 개별 사례가 집적되어 보편성과 경향성을 띨뿐 일부일처든 일부다처든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국왕도 어떤 국왕들은 다처를 취한 반면, 어떤 국왕들은 일생동안 단 1명의 처만을 두었다.
 
국왕에게서 보이는 혼인 형태에 대한 불규칙성은 지배층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일부일처가 보편적인 가운데 다처 사례가 소수 발견된다는 점에서 국왕과 다르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부.처형태는 구조적으로 일부일처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는 종교이념이나 윤리, 법제 등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부부별산제와 솔서혼 관행 등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개인의 욕구와 조건에 따른 선택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그렇기에 몇몇 국왕은 후비를 한 명만 두었고 지배층 내에서도 소수는 다처를 취하였다. 고려의 부.처형태는 구조적인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의 선택 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수평적 부부관계에 기인한 구조적 일부일처제는 혼인관행에 중국의 윤리가 개입하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고려에서 과부의 재혼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혼해서 전 남편의 자식을 훌륭히 키운 여인이 칭찬을 받았다. 최고위 지배층에서도 딸의 재혼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과부의 혼인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고려 멸망 직전인 1389년(공양왕 1) 도당都堂의 건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국왕의 혼인행태 역시 조선시기 이래의 관행과 크게 다르다. 고려의 국왕들은 과부나 이혼녀와도 재혼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재혼할 때 성관계나 혼인 경험의 유무를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성관계를 맺는 것을 ‘순결을 잃는’ 것으로 여기고, 과부가 ‘수절’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면 조선에서 그랬듯 국왕은 반드시 처녀와 혼인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정조 개념이 희박했고, 재혼이 자유로웠다. 그 결과 이복형제나 이부형제(異父兄弟)를 양산하여 가족구성이 복잡해졌고, 가족구성의 복잡함은 다시 권리 의무관계의 복잡함으로 이어졌다. 가정 내에서 부․처가 각기 재산을 소유하고 처도 혼인 전의 친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므로 피가 통하지 않는 의부(義父)와 계모(繼母)의 지위는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새 남편’과 ‘아버지의 새 부인’에서 시작하였다. 이복형제는 아버지의 재산을 균등하게 분할하지만 계모의 재산에 대해서는 권리가 없었다. 이부형제는 어머니의 재산을 균등하게 분할하지만 계부의 재산에 대해서는 권리가 없었다.
 
이러한 가족 구성은 친족 용어에도 반영되었다. 부모가 같으면 ‘동생형제(同生兄弟)’로, 아버지가 다르면 ‘이부형제(異父兄弟)’로, 어머니가 다르면 ‘이모형제(異母兄弟)’로 표기하였다. 친부는 ‘출부(出父)’로 계부는 ‘의부(義父)’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가족의 혈연관계와 권리 의무관계를 명확히 표현하는 기능을 하였다.
 
● 친족관계
1. 양측적(총계) 혈연의식
 
고려에서 솔서혼이 보편적으로 행해지면서도 궁극의 거주처가 개인의 선택에 의해 다양하게 결정되고, 자녀간 균분상속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계나 모계 등 특정한 혈연계통을 선별하여 중시하지 않고 통틀어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에서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 조직된 친족관계를 ‘양측적 친속 bilateral kindred’ 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리는 성씨를 바꾸도록 한 명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려인들도 아버지의 성씨를 따랐으므로 겉으로 보면 부계 의식이 작용한 듯 보인다. 그러나 국가에서 특정 성씨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내린 명령은 ‘외가(外家)’의 성씨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먼저 외가의 성을 따르고 부모의 성씨가 같으면 조모나 외조모를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성씨 변경은 조선후기는 물론 지금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외가의 성씨를 쓰게 하여 같은 성씨의 인물들을 다른 성씨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고려에는 부계 원리나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극히 미약했음을 판단할 수 있다. 고려인들은 성씨가 같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성씨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질지라도 그것은 부자 간의 단절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 뿐 남성으로 이어지는 전체 계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 외가의 성씨로 바꾸도록 한 것에서 모든 혈연 계통을 동등하게 인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에서 ‘후손’과 ‘조상’이라는 개념은 모든 혈연 계통에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음서제(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을 받음)는 이러한 혈연의식을 잘 보여준다. 음서제도에 작용한 양측적(총계) 혈연의식은 아들이 없는 경우에 잘 드러난다. 예종(1105~1122)은 아들[直子]이 없으면 ‘수양자(收養子)’ 및 ‘손(孫)’에게 주도록 하였다. 예종이 음서 대상으로 지정한 ‘손’은 친손자와 외손자를 포괄한다. 이후 인종(1123~1146)이 음서의 순서를 ‘아들→친손자와 외손자[內外孫]’로 결정한 이래 계속 내외손이 음서대상으로 명기되었다.
 
국왕과 공신의 자손은 영구히 음서의 수여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1253년(고종 40)의 왕명에는 태조의 후손으로 ‘협11녀(挾十一女)’까지 음서를 주라는 표현이 들어있다. ‘협11녀’라는 표현은 태조의 딸로부터 내리 11명의 여성으로 이어진 혈연계통을 뜻한다. 1282년(충렬왕 8)에는 ‘협20녀’까지 확장되었다. 이로부터 기준인으로부터 이어 내려가는 모든 혈연계통을 ‘후손’과 ‘조상’으로 여기는 인식방법을 도출할 수 있다. 피가 통하면 모두 ‘후손’이고 ‘조상’인 것이다.
 
음서규정은 조선은 물론 현재와도 판이한 ‘후손’과 ‘조상’에 대한 인식방법을 잘 보여준다. 고려시기의 통념상 ‘조상’은 ‘부→조→증조→고조’가 아니라 ‘부모→부모→부모’였고, ‘후손’은 ‘자→손→증손 →현손’이 아니라 ‘자녀→자녀→자녀’였다.
 
2. 사촌 범위의 방사형 친족구조
 
고려의 음서제도나 근친혼 금지규정은 양측적(총계) 혈연의식을 잘 보여준다. 혈연을 포괄적으로 존중했으므로 친족조직 역시 특정 혈연계통에 집중되지 않고 방사형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친족의 구체적인 형태와 범위는 혈연 이외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여 결정되었다. 동성 5촌과 남처럼 지내면서 이성 5촌과의 혈연관계를 강하게 인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도 혈연에 근거하여 일정 범위 내의 혈족 전원이 당위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친족관계가 있었다. 그 관계는 4촌을 한계로 동심원을 그렸다. 이러한 친족관계는 고려의 오복제와 상피제에 반영되어 있다.
 
오복제는 고대 중국에서 성립한 것으로 전근대 중국의 친족조직 나아가 조선후기 이래 한국 친족조직의 전형이 되었다. 오복제는 망자에 대한 애도의 의무를 매개로 친족의 범위와 상호간의 친밀도를 규정한 것이다. 친족범위와 친밀도는 상복의 유무와 등급, 슬픔의 지속기간으로 표시하였다. 상복은 슬픔이 큰 순서대로 참최 3년, 자최 1년, 대공 9월, 소공 5월, 시마 3월의 다섯 등급이 설정되었다. 이 다섯 등급의 복제가 적용되는 범위를 ‘유복친(有服親)’이라고 하여 친족으로 인정하고, 복제가 적용되지 않으면 ‘친함이 다했다[親盡]’고 하여 친족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오복제에서 유복친의 전체 범위를 남성을 기준으로 그려보면 고조부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부계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고종사촌이나 생질 등 일부 비부계친이 고립된 섬처럼 산재한다. 이처럼 유복친의 구성이 부계로 편중될 뿐 아니라 슬픔의 등급도 부계 여부에 따라 달리 규정되었다. 조부의 상에는 자최 1년복을 입고 외조부의 상에는 소공 5월복을 입어 혈연거리가 같더라도 부계와 비부계에 현격한 차이를 두었다.
 
오복제는 985년(성종 4)에 처음 고려에 도입되었다. 그런데 도입할 당시부터 소공 5월인 외조의 등급을 두 단계 올려 친조부와 동일하게 자최 1년복을 입게 하였다. 이 규정으로부터 4촌 범위의 친족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외조부의 복제를 조부와 동일한 등급으로 올린 것은 고려인들이 조부와 외조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등급을 달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조부와 외조부를 동일하게 여겼다면 그들의 내외손으로 구성된 친족, 즉 사촌간의 친밀도도 동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촌을 경계로 권리의무를 공유하는 친족범위는 상피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상피제도 중국에서 성립한 것으로 아버지가 감찰기관에 재직하면 아들을 피감 기관에 재직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상피제는 실제 친족관계와 친족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국의 경우 오복제가 적용되는 친족 전체가 상피 범위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고려 상피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4촌을 한계로 하면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이렇듯 친․고종․외․이종 4촌이 상피제의 경계를 이룬 것은 이 범위가 일상에서 권리 의무관계를 공유하는 핵심 친족이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통념에 따르면 4촌 이내의 혈족은 사정에 얽매어 공무를 저버릴 위험이 컸기에 국가에서 이들의 관직 분포를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5촌부터는 사정이 개입되더라도 불규칙할뿐더러 혈연 이외의 요소가 함께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에 상피제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피제에 근거하여도 모든 혈연을 포괄하는 동항렬 사촌 범위의 친족관계가 도출된다.
 
조선의 세종은 외조부와 장인의 상복 등급을 높인 고려의 오복제를 폐기하고 중국에서 유래한 그대로의 오복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외조부와 장인의 상에 주는 휴가 기간은 조부와 동일하게 1개월이었다. 또한 상피의 범위도 고려와 동일하게 규정하였다. 외면으로는 중국의 예법을 존중하였지만 일상 생활과 내면의 정서는 이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친족용어의 계통 포괄성
 
고려의 친족관계가 방사형으로 뻗어가면서 동심원을 그린 것은 양측적 혈연의식에 기인한다. 이러한 혈연의식은 고려의 친족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조부․외조’, ‘삼촌(숙부)․외삼촌(외숙)’, ‘고모․이모’처럼 혈연거리가 같아도 계통별로 형태를 달리한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것들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고려의 친족용어는 형태와 기능이 전혀 달랐다. 가장 큰 특징은 혈연계통을 구분하는 기능이 없다는 점이다.
 
1092년(선종 9)에 성립한 상피규정에서 ‘외족’에 해당하는 친족에 대해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표현하였다. 외조부모는 ‘어머니의 부모[母之父母]’, 외 삼촌은 ‘어머니와 부모와 같은 형제[母之同生兄弟]’, 외사촌과 이종사촌은 ‘어머니와 부모가 같은 형제자매의 아들[母之同生兄弟姊妹之子]’이 되었다. ‘외조부’, ‘외삼촌’, ‘외․이종사촌’이 있는 현재로서는 이러한 표현이 대단히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피 규정에서 이렇게 ‘설명’한 것에서 당시 외족에게만 적용되는 친족지칭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외족의 구성원을 특정할 지칭이 없었다는 점은 곧 단일한 친족용어로 ‘본족’과 ‘외족’을 포괄했음을 뜻한다.
 
고려에서는 현재의 조부와 외조부가 모두 ‘한아비(할아비)’였다. ‘고모’와 ‘이모’는 ‘아자미(또는 아찬어미)’였으며, 삼촌과 외삼촌은 ‘아자비(또는 아찬아비)’였다. 형의 아들과 누이의 아들도 모두 ‘아찬아들’이었다. 이들 고유어는 한자를 빌려 ‘대부大父 [한아비]’, ‘소위모少爲母[아찬어미]’, ‘소위자少爲子[아찬아들]’로 표기되었다. 고려인들은 ‘대부大父’를 ‘한아비’로 읽으며 조부와 외조부를 떠올렸다. 비록 한문에서 ‘외조’나 ‘외손’이 쓰였지만 그것은 외국어인 한문 작문을 하면서 중국 용어를 채택한 결과일 뿐이다. ‘소위모少爲母․소위부少爲父․소위자少爲子’는 고려말에 ‘숙모叔母[아자미]․ 숙부叔父[아자비]․질姪[아찬아들]’로 표기형태가 대체되었지만 혈연계통을 포괄하는 용법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
 
친족 지칭에 혈연계통을 구분하는 기능이 없는 것은 혈연계통을 분리하는 인식 방법이 없거나 극히 미약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족族’도 조선후기 이래의 일반적 쓰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었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조선후기에 ‘족族’은 대개 부계를 범주화하는 개념이었다. 여기에 ‘본(本)’자를 붙이면 부계집단을 한정하는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나 고려는 물론 조선전기까지 ‘본족’은 모든 혈연 관계를 포괄하였다.《경국대전》의 무자녀자 유산 상속규정에서는 그의 ‘본족’ 중 ‘사촌친’ 범위 내에서 재산을 상속하도록 규정하였다. ‘본족’에 친․고종․외․이종 사촌이 동등하게 포함됨은 위에서 확인하였다.
 
‘본족’이 모든 혈연계통을 포괄했기에 족장(族長)의 개념도 현재와 달랐다. 지금 족장은 ‘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고 대개 같은 성씨가 연상되지만 조선전기까지는 기준인과 혈연관계를 갖는 모든 존속(尊屬)에게 적용되었다. 반대말은 비속에게 적용되는 ‘족하(族下)’였다. 현재 족장은 완전히 뜻이 변했지만, ‘족하’는 ‘조카’로 고유어화하여 혈연계통을 포괄하는 기능을 일부 지속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기의 개별 친족지칭은 혈연계통을 구분하는 기능이 없었다. ‘족’도 복수의 성씨로 구성되면서 그물망처럼 연속되고 상호 중첩되는 혈연관계를 포괄하였다. 부계친을 특정하거나 범주화하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na-;출처: 이종서,민족문화백과,구글 사진,네이버,유튜브.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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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 국립 중앙 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친족(親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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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