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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의 김정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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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2019.11.21. 19:07) 
◈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1편-
여행 가길 좋아한다. 가기 전에 우선 지도상에 어디쯤인지 위치와 거리 등을 먼저 알아본다. 그리고 지도를 프린팅 하거나 스마트폰의 앱 지도나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아간다. 지도는 잘 알다시피 여행, 등산, 퀵서비스 처럼 생활의 편리함 뿐만 아니라 행정, 산업, 군사 목적 등 여러 부문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여행 가길 좋아한다. 가기 전에 우선 지도상에 어디쯤인지 위치와 거리 등을 먼저 알아본다. 그리고 지도를 프린팅 하거나 스마트폰의 앱 지도나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아간다. 지도는 잘 알다시피 여행, 등산, 퀵서비스 처럼 생활의 편리함 뿐만 아니라 행정, 산업, 군사 목적 등 여러 부문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를 예로 들면 중국에 가거나 임진왜란 같은 전쟁에서는 지도는 필수적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지도는 점점 자세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조선지도의 완결판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가 나온 지 155주년에 주인공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에 대해 우선 알아보고 대동여지도 등에 대해 추가할 예정이다.
 
김정호는 150년 전 가장 많은 지도(땅 그림)를 제작한 엄청난 지리학자로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그의 동상은 수원의 국토지리 정보원에 있고 김정호의 호를 딴 서울의 고산자路(고려대역에서 용두역을 거쳐 응봉역까지 구간 도로)와 고산자橋(다리)를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더불어 2016년에는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김정호 영화를 기대해본다.
 
▼김정호 동상
 
 
\na-;▼고산자교
 
 
 
\na-;▼ 강우석 감독,차승원 주연의 고산자 대동여지도 영화. -(주)시네마 서비스 제작-
 
 
 
김정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다. 그리고 연구가 깊어지면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제작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호는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라고 말한다.
 
▶나의 주장
김정호는 수정, 보완한 지도를 계속 만들었는데 새 지도를 만들기 위해 과거의 여러 지도를 참고해서 만들었을 텐데 그의 직업은 무엇일까? 국가가 아닌 개인이 국토 정보의 효율적 관리와 체계적 이해 목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동여지도 지도 유설(地圖類說)에 따르면 "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 오는 적을 막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이 지도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니"라고 나온다. 따라서
국가기관의 지도 전문 기술직으로 관(官)의 협조를 받아 제작. 간행했을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na-;▼조선지도의 걸작 대동여지도
▼김정호 초상 -운보 김기창-
 
 
▶김정호에 대한 잘못된 스토리
 
김정호라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산과 물의 모양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 어렵게 구한 지도를 들고 실제 모양과 비교해 보았는데 그 내용이 실제와 너무 달라 실망한 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 뒤 평생을 바쳐 조선팔도를 세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른 뒤에 완성한 것이 《대동여지도》라는 것, 그러나 그 지도를 본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될까 우려하여 지도판을 압수해 불태우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으며 결국 김정호는 옥중에서 죽었다는 내용들이다. 이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다.
 
▶잘못된 스토리 전말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대동여지도》와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사람은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1925년 《동아일보》에「고산자를 회(懷)함」 이라는 글을 써서 김정호를 소개했는데, 이 글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으며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고 수십 년을 떠돌아다녔다고 적었으나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3년 뒤에 『별건곤』에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라는 글을 쓰면서는 백두산을 세 번인지 네 번인지 올라갔었다고 하여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당시만 해도 백두산을 일곱 번 올랐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백두산에 올라가는게 쉽지 않은데 그 당시 조선 팔도를 세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일곱 번 오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김정호의 신분에 대해서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족보도 전하지 않아 『이향견문록』에 실려 있는 것 등을 보면 중인 이하로 추측된다. 당시의 교통상황이나 중인의 재력 등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굳이 백두산을 일곱번이나 오르는 것이 지도를 만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최남선은 김정호 개인의 노력을 부각시키려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듯한데, 이후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더 극적인 내용으로 각색되었고,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이어 해방후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면서, 김정호에 대한 상식으로 굳어졌다. 그 과정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올랐다고 과장되고,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을 누설한다며 지도판을 압수해 불태웠고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둬 죽게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대동여지도 목판본이 아직 존재하고 불타거나 그슬린 흔적도 없다.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법화하기 위해 만든 스토리(조선은 일본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을 못 알아본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해서 망했다)를 그냥 우리 교과서에 옮겼을 것이다.
 
 
 
 
 
 
 
▶김정호 관련 인물
고산자와 교유(交遊)하였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비변사 소장의 국가 기밀지도를 제공해 준 신헌 등이다.
 
\na-;▼최한기(崔漢綺)
1803(순조 3)∼1877(고종 16). 조선 말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이다.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의 당호도 있다. 아버지는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na-;출처: 윤희진,이기봉,이상태. 민족문화백과,파이낸셜뉴스,국립중잉도서관자료,한국표준영정,네이버. 시네마 서비스제작,문화재청.KBS,문화유산채널
 

 
※ 원문보기
김정호(金正浩)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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