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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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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구단 " 방문기
2016년 1월 19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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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中區) # 환구단
(2019.11.21. 19:07) 
◈ " 환구단 " 방문기
직장생활하던 때 점심시간에 자주 가던 조선호텔 옆에 있는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을 소개한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청나라 북경의 천단(天壇)처럼 대한제국에서는 환구단을 황단(皇壇)이라 불렀다.
직장생활하던 때 점심시간에 자주 가던 조선호텔 옆에 있는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을 소개한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청나라 북경의 천단(天壇)처럼 대한제국에서는 환구단을 황단(皇壇)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1852∼1919)황제가 황제국 예법에 따라 남별궁터(중국사신이 머물던 소공동)에 환구단을 건축했으며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1897년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 즉위식을 올렸던 자주독립의 역사가 담긴 근대 문화유산이다.
 
환구단 북쪽에 1899년 세운 천신(天神), 지신(地神), 태조(이성계)고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皇穹宇),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동무와 서무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선현들이 배향돼 있던 곳), 향대청, 어재실, 석고각 등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
☞소공동(小公洞) 유래 :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소공주동(小公主洞)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추정 배치도
 
 
그러나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3년 환구단을 철거하고, 1914년 10월 10일 그 자리에 조선 경성 철도호텔을 개관하였으며, 현재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皇穹宇)와 석고, 삼문, 협문이 남아 있다. 황궁우는 기단 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1·2층은 통층(通層)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가 있다. 3층은 각 면에 3개의 창을 냈다. 건물의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인데, 청나라 영향을 받은 장식이 많다. 황궁우 옆에는 제천을 위한 3개의 석고(石鼓,돌북)가 있는데, 몸통에 조각된 용문(龍文)이 화려하다.
 
일제 때 철거를 면했던 재실 건물은 해방 후 "아리랑하우스"로 명명되면서 춘. 하. 추실로 구분하여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고 아울러 호텔의 정문도 환구단의 정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조선 경성 철도호텔은 해방후 운영하다 1958년 10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1967년에 아메리카 에어라인과 합작으로 웨스틴 조선호텔이 새로 건설되면서 당시까지 남았던 환구단의 정문과 재실,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은 해체되어 방매되었다. 그 중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문은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되었는데 "백운문(白雲門)"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었다. 그 정문을 2009년 수리하여 원래의 위치와는 다르지만 서울광장 좌측편에 상징적으로 세웠다.
 
2013년 황궁우 주변에 깔려있던 잔디는 한국 전통방식이 아닌 것으로 제거 후 마사토로 대체하였다. 지금은 탑과 기와 및 석축을 보수 공사 중(~ 2016. 5월 말)으로 가림막이 처져있어 황궁우를 볼 수 없으니 참고하세요.
 
무료 관람이며 7시부터 21시까지 개방한다. 아직 환구단 팜플릿이 없어 아쉽다.
 
자주독립국이라 연호와 국호를 선포했지만 환구단의 모습은 북경의 천단을 모방하였고, 열강들의 대한제국 침탈에 대한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일본의 식민지화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웠으면서도 지도자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계 흐름을 파악하는데 소홀했다. 또한
부정부패와
일본 등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혼자 부귀영화를 바라니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나라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망한 나라는 망할 만한 이유가 있는데 스스로 망하지 않으면 강한 다른 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na-;▼환구단 정문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 변에 위치하였다. 1967년 철거된 이후 소재를 알지 못하다가 2007년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문이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후 정문의 이전과 복원을 논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확정, 복원하였다. 궁금한 점은 사직공원의 사직단(社稷壇)의 현판처럼 환구단 정문에도 아름이 적힌 현판이 있었을 텐데.....
 
 
 
\na-;▼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na-;▼ 대문 현판이 없다.
 
 
\na-;▼ 2007년까지 우이동 그린파크호텔내 백운문으로 사용하던 환구단 정문
 
 
\na-;▼ 복원한 정문 좌측에 석고(돌북)처럼 생긴 것에 환구단 시민광장이라고 표시했다.
 
 
\na-;▼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에 즉위했다. 고 돌에 새겨져 있으나, 그 당시 독립신문을 보면 10월 12일에 황제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관계기관에서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수정하였으면 좋겠다.
 
\na-;▼건축중인 원구단,1897년,독립기념관 소장
 
\na-;▼옛 사진으로 왼쪽에 황궁우(皇穹宇), 중앙에 없어진 원추형의 환구단, 그 사이에 삼문이 보인다.
 
 
 
\na-;▼조선호텔에서 바라 본 삼문과 황궁우
 
 
\na-;▼ 황제 즉위식 기록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
 
 
 
☞ 현대문으로 변환한 글
 
이전 남별궁 터전에 단(壇)을 모았는데 이름은 환구단(圜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 역군과 장색(匠色) 천여 명이 1달이 못 되어 이 단을 거의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3층이라 맨 밑에 층은 장 광이 영척(盈尺)으로 144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로 싸서 3자 높이를 쌓았고 제 2층은 장 광이 72척인데 밑층과 같이 돌로 3자 높이를 쌓았고 맨 윗층은 장 광이 36척인데 3자 높이를 돌로 둥글게 싸서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고 맨 밑층 가로는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 서 남 북으로 황살 문을 하여 섰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라 이 단은 금월 십이일에
 
황제 폐하께서
친행 하사 거기서 백관을 거느리시고
 
황제 위에 나아가심을 하나님께 고 하시는 예식을 행 하실 터이라 그 자세한 절차와 예식은 후일에 기재하려니와 대개 들으니 그 날
황제 폐하께서 황룡포를 입으시고 황룡포에는 일 월 성 신을 금으로 수놓았으며
면류관을 쓰시고
 
경운궁(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거동하실 터이요 백관은 모두 금관 조복을 하고
어가를 모시고
 
즉위 단에 가서 각각 층계에 서서 예식을 거행할 터이라더라 이 예식이 마친 후에는
대군주 폐하께서
대황제 폐하가 되시는 것을
 
천지신명에게 고 하시는 것이라 조선이 그날부터는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며 조선 신민이 모두 대 조선 제국 신민이라 조선 단군 이후에 처음으로
 
황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이 경사로움과 기쁨을 조선 신민들이 측량없이 여길듯하더라 이름으로는 세계에 제일 높은 나라와 동등이 되었거니와 이제부터 실상을 힘써 각색 일이 외국에서 못지않게 되도록 신민들이 주선을 하여야 제국 신민 된 본의요 남에게 실상 대접을 받을 터이라 사람마다 오늘부터 조선이 남에게 지지 아니할 방책을 하여 외국들이 조선이
 
황제국 된 것을 웃지 않게 일들을 하여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사람들이 실상 일을 하여야 외국들이 조선을
황제국으로 승인들도 할 터이라 이 계제들을 타서 사람마다 자주독립할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대황제 폐하를 모시고 세계에 대접을 받고 나라를 보전할 획책을 생각하며 사람마다 조선이 남에게 의지한다든지 하대 받지 않도록 일하는 것이 왕국이 변하여 황국이 된 보람이 될 듯하더라.
 
[네이버 지식백과]
 
\na-;▼ 경성철도호텔(옛 조선호텔). 오른쪽 황궁우는 호텔에 비해 규모가 작아 보인다. 경성철도호텔은 독일 건축가의 설계로 지하 1층, 지상 4층의 580평 건물로 총 52객실로 1914년 10월 10일 개관했고 1958년 10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na-;▼ 석고(石鼓, 돌북)
1902년에 세운 제천을 위한 3개의 석고(石鼓)가 석고각내 있었는데, 지금은 황궁우 옆에 있고 몸통에 조각된 용무늬가 화려하다.
 
 
 
 
 
 
 
 
 
 
\na-;▼지붕의 수막새 문양에서 오얏(자두) 문양과 태극을 볼 수 있다.
 
 
 
\na-;▼2016.5. 30일까지 환구단 보수공사 안내판.
 
 
 
 
 
 
 
 
 
 
 
 
 
\na-;▼ 보수 공사전 황궁우((皇穹宇, 1899년 세움. 3층 8각 건물로 천신,지신,태조고황제 위패를 모신 곳) 사진
 
 
\na-;▼ 3층
 
 
\na-;▼2층
 
 
 
\na-;▼ 1층
 
 
 
\na-;▼ 황궁우 주변에 잔디가 있었으나 2013년 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았다.
 
 
\na-;▼ 황궁우 설경
 
 
 
 
 
\na-;▼ 낮게 만들어 고개를 숙이게 만든 문
 
 
\na-;▼돌 난간
 
 
\na-;▼삼문(3 門)
 
 
 
 
\na-;▼ 벽돌로 쌓은 청나라 건축양식
 
 
\na-;▼ 천정 그림
 
 
 
 
\na-;▼조선호텔(원래 환구단 위치)에서 본 황궁우 방향의 환구단 삼문
 
 
 
 
 
 
 
\na-;▼ 모아 놓은 석물
 
 
 
 
 
 
 
\na-;▼협문
 
 
\na-;▼덕수궁내 문과 모양이 비슷하다.
 
 
\na-;▼원구단과 덕수궁 비교
 
 
\na-;▼만(萬)이라고 표기
 
 
 
\na-;▼반대 쪽
 
 
\na-;▼앞 뒤 동일한 무늬
 
 
\na-;▼세(歲)라고 표기
 
 
 
\na-;▼만세(萬歲) : 협문 양옆에 있는 벽돌 글자를 조합하니 만세다. 황궁우에서 보면 좌측에 만(萬)자가 우측은 세(歲)자다.
 
만세는 영원무궁, 축복, 승리를 의미하며 황제만이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후 격인 조선 임금은 만세 대신 "천세(千歲)"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임금에게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고, 고종이 왕이 아닌 '황제'가 되면서부터다.
 
 
 
\na-;▼환구단과 경복궁 교태전 만세 글씨 비교하면 환구단 글씨가 훨씬 공이 더 들어갔다.
 
 
 
\na-;▼ 2015년 국립고궁 박물관에서 전시하였던 자료
 
 
 
\na-;▼신의(神扆)
황천상제(皇天上帝, 하늘 신), 황지기(皇地祇, 땅 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등의 신위를 황궁우(皇穹宇)에 봉안할 때 사용한 ‘신위병풍〔신의(神扆)〕’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만든 의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에 실린 ‘신의(神扆)’ 도설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주목된다.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곡병(曲屛)으로, 용·봉황·모란 등의 무늬를 새겼으며, 각 모서리의 용머리 장식과 맞물린 부분을 보강하는 쇠붙이인 장석(裝錫)은 도금을 하여 품격을 높였다.
 
 
 
\na-;▼축판과 제기
‘환구축판(圜丘祝板)’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환구제의 축문을 올려놓는 나무판인 ‘축판(祝板)’과, 붉은색으로 ‘구(丘)’ 자를 적어 넣은 제기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할 때 사용된 다양한 그릇과 도구의 일면을 보여준다.
 
 
 
 
 
\na-;▼ 롯데호텔(좌)과 조선호텔(우)에 둘러 싸인 황궁우
 
 
 
 
\na-;출처;서울신문,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지식백과 ,고궁박물관,조선호텔 자료,유튜브
 

 
※ 원문보기
중구(中區) # 환구단
문화재·역사·전
• 광화문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 " 환구단 " 방문기
• "서울시의회 건물(옛 국회의사당.부민관)" 역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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