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삼릉의 마지막은 공릉(恭陵, 예종비), 순릉(順陵,성종비)에 이어 영릉(永陵,효장세자와 세자빈)이다. 영릉하면 쌀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파주 영릉(永陵)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또한 영조의 장자(사도세자의 이복 형)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9살 때 연상(年上)의 조씨(趙氏)와 결혼하고 몇 달 뒤에 사망했으니 더욱 알려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자는 사망 후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고 나중에 사망한 세자빈과 함께 잠들어 있는 쌍릉이 바로 파주 영릉이다.
파주 삼릉의 마지막은 공릉(恭陵, 예종비), 순릉(順陵,성종비)에 이어 영릉(永陵,효장세자와 세자빈)이다. 영릉하면 쌀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파주 영릉(永陵)은 생소하기까지 하다. 또한 영조의 장자(사도세자의 이복 형)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9살 때 연상(年上)의 조씨(趙氏)와 결혼하고 몇 달 뒤에 사망했으니 더욱 알려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자는 사망 후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고 나중에 사망한 세자빈과 함께 잠들어 있는 쌍릉이 바로 파주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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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공릉, 순릉, 영릉 순서대로 읽기를 권하며 조선왕릉 길잡이를 먼저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 : 眞宗으로 추존)와 그의 비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의 능이다. 왕릉과 비릉(妃陵)을 쌍릉으로 두어 각각 석상(石床)만 앞에 두고 장명등(長明燈)은 그 중간에 배치하였고,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필로 능 주위를 호위하게 하였다.
추존된 진종은 1719년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정빈이씨(靖嬪李氏) 소생으로 태어났고 1724년(영조 1) 경의군(敬義君)으로 봉하고 1725년에 왕세자로 책봉하니 7살이었다. 1727년(영조 3) 9살에 연상의 풍양 조씨와 혼인하고 몇 달 뒤 1728년(영조 4)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겨우 10살에 죽으니 시호를 효장세자(孝章世子)로 하였다. 1729년(영조 5) 파주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韓氏)의 순릉(順陵) 왼쪽 산줄기의 을좌신향(乙坐辛向, 서쪽에서 북쪽으로 15도 방향)에 장사 지냈다.
정조는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으로 봉하고 시호를 온량 예명 철문 효장(溫良睿明哲文孝章)이라하고 효순현빈(孝純賢嬪)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숭하고 시호를 휘정 현숙 효순(徽貞賢淑孝純)이라하고 능호를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1908년(융희 2) 진종의 시호를 소황제(昭皇帝)로, 효순왕후는 소황후(昭皇后)로 추존하였다.
진종의 비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趙氏 1715~1751)는 좌의정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의 따님으로 1715년(숙종 41) 한성부 동부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다.
세자 나이 9살인
1727년(영조 3)년 조씨 13살애 왕세자빈에 책봉되고 1728년 왕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1735년(영조 11) 현빈(賢嬪)으로 봉하였다. 1751년(영조 27) 23년간 홀로 소생없이 지내다가 창덕궁 건극당(建極堂)에서 37세로 사망했다.
1751년 시호를 효순(孝純)이라 올리고 1752년 효장세자 왼쪽에 쌍분으로 장사지냈다.
정자각 동남쪽 20보(步)에 1752년(영조 28) 표석(길이 8척 4촌, 너비 3척, 두께 1척 5촌) 1기를 정면1칸 측면1칸 규모의 팔작지붕 비각과 함께 세웠는데 전면에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 현빈 부좌(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賢嬪祔左)라고 전서(篆書)로 쓰고,
또 다른 1기는 정자각 동남쪽 16보(步)에 표석(表石, 길이 9척 5촌, 너비 3척 6촌, 두께 1척 9촌)을 세웠는데 전면에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朝鮮國 眞宗大王永陵 孝純王后 祔左)라고 전서체로 정조 친필로 썼다.
그 오른쪽에는 1908년(융희 2)에 세운 표석 전면에 대한 진종 소황제 영릉 효순 소황후 부좌(大韓 眞宗 昭皇帝 永陵 孝純 昭皇后 祔左)라고 전서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