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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궁(朝鮮神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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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신궁
【문화탐방】
(2019.11.21. 19:07) 
◈ 조선 신궁(朝鮮神宮)
조선신궁이라고 들어 보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서 매우 궁금하였다. 조선 땅에 일본 신들이 사는 궁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하려고 남산 구간을 복원하려고 몇 년전 남산 분수대 밑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 건물이 한양 도성 성곽을 헐고 덮고 지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늘은 조선신궁에 대하여 사진과 함께 알아보고 앞으로 더 남산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조선신궁이라고 들어 보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서 매우 궁금하였다. 조선 땅에 일본 신들이 사는 궁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하려고 남산 구간을 복원하려고 몇 년전 남산 분수대 밑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 건물이 한양 도성 성곽을 헐고 덮고 지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늘은 조선신궁에 대하여 사진과 함께 알아보고 앞으로 더 남산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일본의 신사(神社)하면 제일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야스쿠니" 신사일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독도 영토 문제와 함께 늘 한일관계에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는 민족적ㆍ역사적 관심사로 제기되어 왔다.
 
1905년 을사 늑약, 1907년 정미 7조약에 이어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상실(경술국치) 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조선에 일본 문화를 이식하고 조선인에게 일본의 국민 의식을 심기 위해서는 조선 신궁(조선신사)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는 3·1운동의 여파를 잠재우고 일본인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1919년 7월 18일 일본 내각 고시 제12호로 조선신궁 건립을 허가하였다. 이토(伊東忠太) 도쿄제국 대학교수는 건축 설계자의 입장에서 예산을 고려하여 조선신궁의 위치, 건물의 배치와 양식을 설계하여 시각적 효과를 최대화하였다. 그 결과 1925년 식민 지배의 상징인 조선신궁이 남산에 들어섰다.
 
일제는 1925년 조선신궁에 일본 신을 모실 때 경성역(서울역)과 경성 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을 새로 개장하고 각종 이벤트를 개최하며 일본의 지배를 근대적 문명으로 포장하였다. 이렇듯 조선신궁이 남산 회현자락에 들어선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남산은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안식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신들의 공간이었다. 이러한 조선신궁에 한국인들은 강제로 참배해야 했으니 얼마나 곤욕을 치렀을까?
 
▶왜 세웠는가?
 
일제가 조선신궁을 건립한 목적은 조선인을 同化하여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일제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참배가 저조하자 1936년에는 신궁 참배를 의무화하도록 신사 규칙을 바꿨다.
 
▶누구를 모시는가?
 
메이지(明治) 일왕과 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제신으로 모셨다. 즉 일본을 위한 신사였다.
 
▶공사기간은 얼마고 남산 국사당을 옮기도록 강요한 이유?
 
일제는 1912년부터 조선신궁 건립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1919년 건축 허가를 받아 1920년에 기공해 총공사비 156만여 원을 투입해 1925년 10월에 조선신궁을 완공하였다. 준공 전 1925년 7월경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무학대사와 민속신앙을 모신 사당)을 서대문 밖 인왕산 중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국사당을 옮기도록 강요한 것은 기존 조선인의 민간신앙 장소가 일왕과 일본 시조신을 모시는 조선신궁 위에 있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것이었다.
 
▶남산을 조선신궁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그런데 일제는 왜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굳이 이곳 남산에 신궁을 세웠던 것일까? 남산 주변(회현동, 예장동, 남산동, 후암동, 용산 등)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고 관공서, 군대 주둔지 등이 있어 참배하기 편하고, 신궁에 대한 안전 관리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기를 꺾고자 선택한 곳이다.
 
①조선이 한양에 도읍할 때부터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이곳에 제사드리는 국사당(國師堂)을 세워 무학대사와 여러 수호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그 기를 꺾을 심산이 있었다. 조선의 상징에 일본의 신사를 세워 조선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고 또한 장충단(奬忠壇)을 장충단공원으로 만든 것처럼 조선을 깔고 뭉개려고 하는 의도가 많았다고 본다.
 
②일본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부터 남산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때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의 왜군이 남산 기슭에 진지를 구축했는가 하면, 이후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3·1운동 진압의 주력부대였던 조선 헌병대 사령부가, 남산의 남쪽 용산에는 국방부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및 그 예하 40여단 등이 주둔하기도 했다.
 
③남산의 북동쪽인 지금의 중구 예장동 일대에는 왜성대(倭城臺)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조선통감부와 일본공사관 역시 이곳 남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가 설계했나?
 
조선신궁은 건립 과정에서 당대 일본 최고의 신사 건축 전문가이고, 메이지 일왕을 모시는 명치신궁 조영을 감독한 이토 주타(伊藤忠太)를 초빙해 입지 선정과 설계에 다년간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 전개 과정에서 조선신궁이 갖는 기념비적 특성을 보여준다. 1925년 남산 중턱에 우뚝 선 조선신궁은 이듬해 경복궁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신청사와 더불어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을 대표하는 양대 랜드마크가 되었다.
 
▶면적은?
 
조선신궁의 총면적이 13만여 평에 이르렀다는데, 지금의 여의도공원 면적이 약 7만 평이므로 단순 계산으로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다. 이 규모는 1925년 인구통계를 보면 조선인은 1,854만명, 재한 일본인은 42.5만명으로 총인구의 2.2%에 지나지 않는데 조선신궁이 서울 주변 거주 일본인만 상대하기엔 엄청나게 크게 지은 것이다.
 
▶조선신궁 전경도(조감도)
 
 
▶조선신궁 평면도 : 상중하 3단의 공간과 상중하 3개의 광장으로 구성​
 
 
 
\na-;▼전경
 
 
 
 
\na-;▼2016. 3월 한양도성 보존, 정비 공사 현장과 비교
 
 
▶건물 배치는?
 
조선신궁의 경내는 서북서를 바라보는 장방형으로, 주요 건물이 있는 상중하 3단의 공간과 상중하 3개의 광장으로 이루어졌다. ⓐ상단에는 신전, 신고(神庫), 축사사(祝詞舍) 등이 있고, ⓑ중단에는 제3도리이(鳥居.신사 입구의 문), 배전(拜殿.참배 공간), 신찬소 (神饌所,제사 음식 준비 장소) 등이 있고, ⓒ하단에는 제2도리이, 신부수찰수여소(神符守札授與所), 수수사(手水舍.참배 전 손씻는 곳) 등이 있었다.
 
신전과 배전은 변형된 신명조 양식을 따랐고 지붕 은 동으로 만들어졌다. 하단은 상광장과 이어져 있었고, ①상광장에는 제2석등롱(石燈籠), 칙사전, 사무소 등이 있었고, 그 아래 ②중광장에는 제1석등롱, 제1도리이, 경찰관 출장소, 휴식소(南山亭)가 있고 동서 참배길(參道)이 만났다.
 
 
 
 
 
중광장과 하광장 사이에는 긴 돌계단이 있었다. 이 돌계단은 384단으로 길이는 231.8m, 폭은 14.5m이었고, 계단 좌우에는 문무관과 각도에서 봉납한 석등롱 14기가 있었다. ③돌계단 앞에 하광장이 있고, 경성부에서 바친 대석등롱과 입구 쪽의 큰도리이(大鳥居)가 세워졌다. 이 도리이는 철근콘크리트제로 높이가 11.3m, 가로는 15.6m이다.
 
하광장에는 중광장으로 통하는 서참도와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표참도(表參道)가 있었다. 표참도는 남대문통에서 분기하여 옛 성벽을 거쳐 하광장 큰도리이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길이 505m, 폭은 18m로 차도와 보도가 구별되어 있는 큰 도로였다. 동참도는 경성신사가 있는 왜성대 방면과 남산의 수림을 통해서 중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폭 7m, 길이는 1,070m에 달했다. 조선신궁에 속한 수림(神苑)은 약 20만 평으로 경내지에 바로 접한 내신원(內神苑)은 약 9,200평이었고 동쪽 남산공원(왜성대공원) 방면 약 10만 평은 외신원(外神苑)이었다. 이러한 신원의 주위는 철근콘크리트 기둥과 철조망으로 둘러쌌다.
 
\na-;▼관폐대사조선신궁(관폐대사란 일본의 역대 천황ㆍ황족을 기리는 국가 관리의 신사를 말함)
 
 
 
 
 
 
 
\na-;▼도리이(鳥居, とりい)는 신사의 경계 영역을 표시하는 문
 
 
 
 
 
 
 
\na-;▼배전(拜殿)
 
 
\na-;▼신고(神庫)
 
 
 
\na-;▼칙사전과 사무소
 
 
\na-;▼참집소
 
 
▶참배
 
조선인들의 감정과 달리 조선신궁은 조선내 신사의 최정점으로서 일왕이 일본을 다스린다는 것, 즉 일본의 국체를 한국인에게 주입하여 일왕에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공간으로서 작동하였다. 각종 제사가 행해지고 조선인들의 강제 참배가 이뤄졌다.
 
1936년 8월 신사 규칙을 개정하면서 조선인의 신사참배가 의무화되면서 조선신궁 참배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주민 대다수에게 ‘강요된 일상’이 되었다. 전시 총동원 체제기에 신궁 광장은 그 활용 빈도나 집회 규모가 크게 증가하여 수만 명이 참석하는 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협소한 신궁광장을 확장할 필요가 제기되어 확장공사가 벌어지는 한편, 남산의 인접 지역에 새 로이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사와 신도신앙에 대한 조선인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조선인들의 숫자는 점차 늘어났지만, 그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단체 참배를 위해 강제 동원된 학생이나 군인들이었다.
 
1940년에는 특별히 일본 왕실 기원 2600년을 맞이하여 경기도 전역 3만여 아동에게 조선신궁의 도장이 찍힌 수신서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na-;▼사이토 조선 총독 참배(1925년)
 
 
 
▶ 접근로
 
참배자들은 조선신궁으로 세 가지의 길을 통해 갈 수 있었다. 먼저 현재 남산의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표참도(表參道)라고 했다. 둘째는 지금의 남산도서관 쪽에서 올라가는 서쪽 도로(서참도)이고, 세 번째는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 쪽에서 올라가는 동쪽도로(동참도)였다. 표참도로 올라오는 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표참도 앞에있는 조선신궁(朝鮮新宮) 이라고 쓰여진 사호표를 오른쪽에 두고, 신궁의 상징인 도리이(鳥居)가 있다. 이 도리이가 큰도리이인데, 이를 지나면 384단의 석계단이 있고, 이를 지나 휴게소를 지나 계속 남산을 오르면, 왼편에 참집소가 오른편에 사무소가 나온다. 사무소에서 기다렸다가 신부(神符)를 받고, 손을 씻은 다음 안으로 향하면 배전이 있다. 여기에서 본전에 있는 두 신에 대해 참배한다.
 
 
 
\na-;▼표참도
 
 
 
도로 고치기 전
 
 
 
도로 고친 후
 
 
▶해방직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한반도 각지의 신사는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8월 16일 오후 5시 조선신궁 승신식(昇神式)을 치른 일본인들은 어린이나 노약자보다 먼저 24일 비행기편을 통해 신물(神物)을 도쿄에 반납한 이후, 9월 들어 자신들의 손으로 조선신궁을 해체하기 시작해 10월 7일 소각했다. 이로써 20년간 있던 조선 신궁은 남산에서 사라졌다.
 
\na-;▼1947년 6월 3일 경향신문 만평으로 그때 도리이를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na-;▼1948년 남산의 거대한 384개 계단을 겨울에 스키장(지금의 눈 썰매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na-;▼6.25 전후에 찍은 조선신궁터
 
 
 
\na-;▼1956년 신궁터에 세워진 약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이승만 동상은 4.19 때 철거되었다.
 
 
 
▶백범 김구 동상, 이시영 등상 그리고 안중근 의사 동상과 기념관을 조선 신궁터에 만들었을까?
 
일제가 유린한 남산을 국민정신 고양을 위한 교육장으로 조성하고픈 욕구를 느끼지 않았을까? 마치 일제가 남산을 한반도 지배를 위한 황국신민화 교육장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더불어 일본의 상징인 조선신궁 자리에 일제 강점에 항거한 안중근, 김구, 이시영 동상을 세우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인이 많이 살던 남산 북쪽지역(혼마찌)을 해방후 충무공 이순신에서 딴 충무로로 정했던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남산의 조선신궁터를 발굴 조사한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에 조사한 448m 구간에서 발견된 총 189.3m의 한양도성 구간 보존상태는 1~7단까지 다양하며 비교적 양호한 상태”라면서 “안타깝게도 나머지 구간은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최근 한양도성 성곽 발굴, 보존, 복원, 정비하여 2016년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란다.
 
 
 
▶조선신궁을 마무리하며
 
남산하면 서울의 중심이지만 대부부 무관심했고,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문화재보다 사는게 우선이므로 문화재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무엇이 있는지 내용도 잘 몰랐다. 조선신궁은 한양도성 남산 성곽을 일제강점기에 덮고 헐고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키고 재조선 일본인들의 참배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계속 늘어나 1945년 전국에 약 1,000여개의 신궁이 있었고 해방후 모두 철거하였다.
 
 
남산 조선신궁터에 이승만 동상(철거), 남산 식물원과 분수대(철거), 어린이회관(현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안중근의사 동상과 기념관, 백범김구 동상 그리고 이시영부통령 동상을 만들었다. 모두 민족 정기를 불어 넣고 극일(克日)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새로 발굴, 확인된 한양도성구간을 제대로 복원하여 민족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또한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을 쉽게 넘보지 못하게 스스로 파워(군사, 경제, 외교, 문화, 정보력 등)를 키워 침략당하거나 국가를 빼앗기는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결코 되풀이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na-;출처;김대호,김백영,국성하,권기봉 ,한양도성 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민족문화연구소,서울시사편찬위원회
 

 
※ 원문보기
# 조선 신궁
【문화탐방】 문화재·역사·전
• 안중근 의사 1편(출생~ 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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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