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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방청 금화도감(禁火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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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도감(禁火都監)
(2019.11.21. 19:07) 
◈ 조선 소방청 금화도감(禁火都監)
소방차와 호스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화재를 진압했는지 궁금하여 조선시대의 소방에 대하여 알아본다.
내일은 식목일인데 주말에 산불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들어 안타까웠다. 인간은 불을 다룰 줄 알면서 문명이 발달해왔다. 그러나 불을 잘못 다루거나 부주의하면 화재가 발생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다. 그래서 소화기 사용법을 알고 소방시설과 피난 시설을 파악하고 불을 조심스럽게 다뤄 화재를 예방하며 화재시 소화하며 대피하는 것은 중요하다. 화재가 발생하면 재산과 생명에 직결되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방차와 호스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화재를 진압했는지 궁금하여 조선시대의 소방에 대하여 알아본다.
 
▶해치는 화재를 막는 상징물이다.
광화문 좌우에 해치(해태)가 설치돼 있는데 해치가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의 동물(神獸)이라 믿어 궁궐을 화재로부터 보호해준다고 믿었고, 지금도 소방서 심벌은 해치이며 동네 소방서 앞에 해치상도 있다.
 
 
 
 
 
▼서울 소방 심벌인 해치
 
 
\na-;▼ 1997년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용으로 화재예방을 위하여 넣었다고 알려져 있다.
 
 
 
▼경복궁 근정전에 가면 월대의 모서리에 커다란 청동 항아리가 놓인 걸 볼 수 있다. "드므(물을 담아 놓은 소화수 그릇)" 라고 불리는 이 항아리는 화마(火魔)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드므에 있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치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을 두려워하고 섬기다
조선시대 여염집의 아낙네들은 부뚜막에 불을 관장하는 조왕신(竈王神)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나쁜 말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뚜막을 발로 밟거나 걸터앉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새로 떠온 물을 그릇에 담아 부뚜막의 토대 위에 올려놨다. 아울러 새해와 명절이 되면 간단한 음식을 차려서 조왕신에게 바쳤다. 궁궐의 드므가 불을 두려워하는 증거였다면 조왕신은 숭배를 상징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일상생활에 불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려준다. 밥을 짓고 난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이 필요했지만 반대로 이 불이 크게 번질 경우 목숨과 재산을 잃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 건축물은 나무와 짚,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에 극히 취약했다. 멸화군은 이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불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이었다.
 
▶화마 속에서 금화도감이 신설되었다.
1426년 2월 15일(세종 8)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아궁이의 불씨가 밖으로 탈출하면서 불이 시작되었다. 한양은 삽시간에 화마에 휩싸였고, 전체 면적의 약 20%가 잿더미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날에도 불이 나서 수백 채의 집과 관청 건물이 피해를 입었는데 북청, 길주, 영흥 유민 7명의 방화로 밝혀져 체포 처형되었다.
 
때마침 한양 밖에 있던 세종은 보고를 받는 즉시 돌아왔다. 그리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웠다. 건물들이 밀집한 도시는 화재에 취약했으며 나무와 짚으로 만들어진 한옥들은 불에 쉽게 타곤 했다. 조선의 도읍이자 대도시였던 한양 역시 이런 화재에 극히 취약했다.
 
사실 이 날의 화재 이전에도 조선은 나름대로의 화재 대책을 강구했다. 태종 때에는 화재를 감시할 담당자를 지정해서 위험지역을 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세종 역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규칙인 금화조건을 반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는 화재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진압할 수 없다고 느낀 세종대왕은 전담 관청을 설치할 것을 결심한다. 1426년에 창설된 금화도감(禁火都監)은 화재 예방과 진압을 전담하는 최초의 관청이었다. 병조 소속이었지만 주 임무가 한성부의 화재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한성부 판사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인 1431년에는 최초의 소방대라고 할 수 있는 금화군(禁火軍)이 만들어졌다. 비록 상설조직이 아니라 한성부의 군인과 노비들 중에서 불을 끄는 임무를 맡은 이들을 편성한 비상대기조에 가깝긴 하지만 이전보다는 효율적인 화재 진압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금화도감의 설치가 나름 효과를 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화마 속에서 태어난 금화군은 세조 때인 1467년 멸화군(滅火軍)으로 확대된다. 50명의 군인들로 편성된 멸화군은 도끼와 쇠갈고리, 밧줄 등을 장비한 채 화재 현장에 출동해서 불을 껐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순찰을 돌면서 화재를 예방했고, 야간에는 종루위에 올라가서 감시했다.
 
 
 
지금과는 달리 운종가에 있던 종루는 2층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위에 올라가면 한양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멸화군은 불이 나면 물을 긷고 나르는 급수노비(汲水奴婢)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해서 화재를 진압했다.
 
사실 멸화군의 임무는 화재 진압이 아니라 화재가 더 이상 번지는 걸 막는 것이다. 멸화군이 가진 도끼와 쇠갈고리는 불이 붙은 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했다. 만약 불이 심하게 번진 상태가 아니라면 못 쓰는 휘장과 깃발로 만든 보자기와 장대 끝에 물에 적신 천을 매단 멸화자를 이용해서 불을 껐다. 멸화군은 이 밖에도 화재예방 및 감시활동도 펼쳤다.
 
한양에는 경수소(警守所, 한양도성 안팎의 도적을 방비하고 화재 등을 예방하기 위하여 좌순청左巡廳·우순청右巡廳 순라군이 야간에 거처하던 곳)라고 불리는 일종의 파출소가 있고 이곳에 순관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야간 통행금지를 단속했다.
 
멸화군들도 함께 다니면서 화재를 감시하는 등 화재 예방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멸화군의 활동으로 화재가 일어나지 않은 탓인지 이후 규모가 축소되고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었다.
 
1803년 창덕궁 화재, 1830년 창경궁 화재, 1833년 창덕궁 화재, 1857년 창경궁 화재, 1900년과 1901년 덕수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07년 1월 우리나라 소방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왕궁소방대가 처음 설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소방 망루가 설치되어 화재를 감시하였다.
 
▼ 1908년 소방 수레인 완용펌프(腕用 PUMP) - 대전 동산도기 박물관 사진-
 
 
▼드므와 완용펌프의 분사기
 
▼ 조선시대 궁정 소방대 시범 재현
 
조선시대 어떤 식으로 화재를 진압했는지 궁금해지면 서울 보라매공원에 있는 소방역사 박물관에 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na-;출처: 정명섭 (역사소설가),민족문화백과,소방역사 박물관,문화재청
 

 
※ 원문보기
금화 도감(禁火都監)
문화재·역사·전
• 장충단 비석
• 조선 소방청 금화도감(禁火都監)
• 안중근 의사 마지막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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