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고재완의 지식창고 문화재·역사·전
문화재·역사·전
2016년
  2016년 5월
2016년 5월 26일
2016년 5월 23일
2016년 5월 17일
2016년 5월 14일
2016년 5월 13일
2016년 5월 12일
2016년 5월 11일
2016년 5월 10일
2016년 5월 9일
2016년 5월 8일
월남(月南) 이상재
2016년 5월 3일
2016년 5월 2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추천 : 0
이상재(李商在)
(2019.11.21. 19:07) 
◈ 월남(月南) 이상재
지난주 종묘대제에 갔을 때 정문 앞 공원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78세) 동상을 만났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나라를 위해 힘쓰다 돌아가신 분으로 기억했을 뿐입니다.
지난주 종묘대제에 갔을 때 정문 앞 공원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78세) 동상을 만났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나라를 위해 힘쓰다 돌아가신 분으로 기억했을 뿐입니다. 충남 서천 출신의 이상재 선생은 주미 외교관, 의정부 참찬 등 지냈으며 일제 강점기에 몸으로 맞서 싸우며 체험한 기독교 지도자였으며 교육자, 민족 계몽의 선각자로 풍자와 해학으로 남긴 일화는 유명합니다. 1927년 신간회(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회장을 맡고 다음 달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최초의 사회장으로 시민들 에도 속애 떠나셨습니다.
 
 
▼ 종묘 이상재 동상(1986년 세움, 김경승 조각)
 
▼동상 밑의 윤보선 글, 김충현 글씨
 
 
 
▼동상 안내판
 
 
 
▼ 종묘공원 벽에 있는 이상재의 시(詩)
 
만사무구원리외(萬事無求源理外) - 온갖 일 원리 밖에서 찾지 마시오
일심자재불언중(一心自在不言中) - 한 마음 말하지 않는 속에 저절로 있나니
 
 
옥에 티라면 한시를 잘 모르는 분이 새긴 듯하고 (2줄을 3줄로) 이상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유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충남 서천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 윤치호를 부통령 · 이상재를 내부대신으로 하는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친로수구파의 모략에 걸려 17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됐지만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개최돼 이상재 등 17명의 지도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으므로 10여 일 만에 석방됐다.
 
ⓜ 1907년 4월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취임하여 당시 일제가 자국에서 파견한 동아기독교협회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분쇄하고 기독교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병합되자, 주로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며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배양하고자 했다.
 
1911년 4월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해 남궁억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청년회를 일본 기독교청년회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을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나라 망치는데 천재들이니 도쿄로 이사 가시지요"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의 종교계(宗敎界) 중진들로 일본시찰단을 조직해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들의 강대함을 자랑하려 했다. 이상재 선생도 이 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일본 각지를 두루 살피고 마지막엔 동경에 가서 대규모 군수병기창을 구경하게 되었다. 일종의 위협이자 시위였다.
 
그날 밤에 열린 시찰단 환영회에서 각자의 느낀 바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이상재 선생이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발표하게 되었다. 이상재 선생은 침통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병기창을 구경하였더니 대포와 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과연 일본은 강국의 면모에 손색이 없습디다. 그러나 나는 퍽 유감이었소. 성경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했으니 나는 일본이 혹 그리될까 그것이 큰 걱정이오."
 
함께 자리했던 일본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이 얼마나 날카로운 예견이었던가? '군국주의'의 깃발 아래 총검을 휘두르며 아시아 전체를 피바다로 만든 후, 마침내 그들 자신이 총칼에 패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상재 선생은 이처럼 말 가운데 칼을 숨기고 있던 뛰어난 웅변가였다. 웅변이란 큰 소리로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단 한 마디의 조용한 말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말솜씨인 것이다.
 
▶이상재 집터
1995년에 설치한 서울 종로구 안국역 2번 출구 가회동 주민 센터 앞에 이상재 선생이 살던 집터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재동 68번지) 이상재 선생이 1922년 말부터 1927년 3월 임종 때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2010년 한국조폐공사 인물 메달
 
 
 
 

 
다른 분은 각각 누르세요.
 
 
 
 
 
 

 
※ 원문보기
이상재(李商在)
문화재·역사·전
• 화계사 탐방기 1
• 월남(月南) 이상재
• 종묘대제 참관기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미정의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