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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江北區) # 화계사
【여행】
(2019.11.21. 19:07) 
◈ 화계사 탐방기 3
오늘은 화계사(수유동) 일주문, 범종각 소개에 이어 포스팅을 이어갑니다. 맑게 개인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화계사 범종각에서 제일 큰 건물인 대적광전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 좌측에 대덕광전이, 우측에는 보화루(寶華樓)가 있고 보화루를 지나 우측으로 보면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이 보이며 그 뒤로 삼성각(三聖閣)이 있습니다.
오늘은 화계사(수유동) 일주문, 범종각 소개에 이어 포스팅을 이어갑니다. 맑게 개인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화계사 범종각에서 제일 큰 건물인 대적광전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 좌측에 대덕광전이, 우측에는 보화루(寶華樓)가 있고 보화루를 지나 우측으로 보면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이 보이며 그 뒤로 삼성각(三聖閣)이 있습니다. 보화루의 "화계사(흥선대원군 글씨)현판 글씨를 감상하시고 소원을 적은 축원문을 줄에 묶어 빌어보먀 천불오백성전내 석불 500 나한상으로 갑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na-;▼보화루, 천불오백성전, 삼성각 위치
 
 
 
▶보화루(寶華樓)
 
대웅전 앞마당과 대적광전 사이에 공자형(工字形)의 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보화루(寶華樓)다.
 
 
 
 
이 건물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불상이 보이는데 곧 마루에서 바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물은 서울 근교의 왕실 원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통 ‘대방(大房)’ 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큰방’ 이라는 뜻이다.
 
보화루에는 군데군데 현판이 붙어 있는데 ‘보화루’라는 현판은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그리고 ‘화계사’ 라는 현판은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시주하여 대웅전을 중수할 때 쓴 글씨이다.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에는 좌측에 두인과 우측에 ‘대원군장(大院君章)’, ‘석파(石坡)’라는 방인의 도서 2과가 있다.
 
 
 
\na-;▼좌측 화계사 글씨는 신관호, 우측은 흥선대원군 글씨다.
 
 
 
 
 
 
본래 보화루는 대적광전에서 볼 때 단의 높이가 있어 루(樓, 2층 이상 건물)의 성격을 가졌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는 한글학회의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 보화루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43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참가자 대부분 고초를 받았다.
 
현재 보화루는 큰 방과 종무소, 그리고 다실로 사용하고 있다. 큰 방에서는 법회 이외에도 불교대학 강의, 그리고 각 신행단체의 회의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방문 당일 부처님 오신 날 대비하여 찬불가가 들린다.
 
보화루에는 관음전을 대신하는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후불탱화로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 사천왕, 10대 제자를 봉안 하였다. 보화루는 2010년 전면 개보수를 하여 새롭게 단장 하였다.
 
☞ 보화루 주련(柱聯, 건물기둥에 붙인 좋은 글귀)
 
수지왕사일륜월 誰知王舍一輪月
만고광명장불멸 萬古光明長不滅
문성공시묘무비 聞性空時妙無比
사수경입삼마지 思修頃入三摩地
무연자심부군기 無緣慈心赴群機
 
법왕권실영쌍행 法王權實令雙行
뇌권풍치해악경 雷捲風馳海岳傾
벽력일성운산진 霹靂一聲雲散盡
도가원불섭도정 到家元不涉塗程
 
부처님 계시던 왕사성 둥근 달이
만고에 꺼지지 않는 밝은 빛임을 누가 알리요.
상대 분별 떠난 본래 자리 묘한 작용 환하게 깨달으니
깊이 생각하고 닦아서 삼매에 드옵니다.
무연자비 방편 따라 많은 중생 이끄시네.
 
부처님이 방편과 실상의 이치를 쌍으로 행하니
우뢰치고 바람이 몰아쳐 바다가 침몰하고 산이 기울도다.
벼락 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모두 흩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원래부터 한발작도 떠난 적이 없도다.
 
\na-;▼ 화계사 축원방으로 소원하는 것을 적어 줄에 묶어 놓은 곳이다.
 
 
\na-;▼부처님께 축원 올리는 화계사 축원방입니다. 크고 작은 소원을 담아 줄에 묶어 주세요. 매월 초삼일간 특별 기도후 회향하는 날 불에 실어서( 살라서) 올려드리겠습니다. -종무실장-
 
 
 
축원문 작성하는 곳이다.
 
 
\na-;▼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대웅전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일명 나한전이나 응진전이라 한다. 건물 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나한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na-;▼내부는 돌로 만든 오백 나한상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나한을 모신 건물에는 흔히 ‘오백나한전’, ‘응진전’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곳만은 특이하게 천불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법당에 불상이 천 개 모셔져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오백나한상과 관음보살상만 모셔져 있습니다. 건물 이름에 천불이 붙어 있는 것은 천불전과 나한전을 겸한다는 의미이다.
 
오백 나한은 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석가모니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에서 오백나한을 위해 설법을 했다고 하고, 매달 15일 마다 오백나한들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고도 한다. 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후 중인도 마가다국 칠엽굴에서 오백 나한이 모여 불전을 편찬하였고, 석가모니 사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부의 가습미라에서 열린 제 4결집에 모인 비구의 수가 500이라 오백 나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나한은 석가모니 생존시에 따르던 500명의 제자를 뜻하기도 하고, 열반하신 뒤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에 모여들었던 500명의 나한이나 비구를 뜻하기도 한다.
 
1964년에 조성된 전각으로 내부에 봉안된 오백나한상은 최기남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십팔 나한상과 천불상, 사천왕상 등의 조각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여주 신륵사에 자신이 조성한 조각상등을 봉안했다가 이후 화계사로 옮겨와 최기남의 가족이 천불오백성전을 짓고 모시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특별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성된 오백 나한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것과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닮아 있고 해학적인 모습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백나한상 중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쯤은 찾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 천불오백성전 주련
통화현관안저심 通化玄關眼底尋
색즉공혜공시색 色卽空兮空是色
차시와석즉황금 此時瓦石卽黃金
도심맥맥의심심 道心脈脈意沈沈
 
깊고 오묘한 가르침 깊이 들어가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네
이때에 기와장이 황금이 되는 때이니
보리 구하는 마음 계속 깊이 이어가네.
 
▼삼성각(三聖閣)
 
불교의 여러 신(神)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 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신, 그리고 독성신이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모시는데, 산신은 산신각에, 칠성은 칠성각에, 독성은 독성각에 각각 모신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신을 한꺼번에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른다.
 
 
본래 화계사에는 산신각이 있었는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산신각이 너무 낡아서 1975년에 진암(眞菴)스님이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외부 벽화는 마음을 찾아가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①산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 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②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말한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祈雨)·장수·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다. 칠성각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다. 칠성각에는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③독성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 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na-;▼연등 달기
 
 
 
\na-;▼찾아 가기
 
 
 
 
 
 
 
 
 
 
 
 
 
 
 
 
 
\na-;출처: 화계사 홈페이지,문화재청,구글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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