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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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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아록 # 이문건
(2019.11.21. 19:07) 
◈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통해 출세하려고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같다.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친다는 뜻의 입신양명은 원래는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 강했다. 그러나 입신양명의 좋은 취지는 변질돼 이미 조선에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출세주의를 뜻하게 되었다.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통해 출세하려고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같다.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친다는 뜻의 입신양명은 원래는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 강했다. 그러나 입신양명의 좋은 취지는 변질돼 이미 조선에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출세주의를 뜻하게 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거는 기대치가 클수록 부모와 자식간 갈등이 커지는 경우가 많은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할아버지가 손주를 키우는 육아일기를 보면서 아플 때의 정성, 공부 안하고 놀기를 좋아할 때 회초리로 때리는 심정, 다시 말해 손주에 대한 사랑과 정성과 아픔이 묻어 나온다.
 
조선의 양반인 묵재(默齋) 이문건(李文健, 1494년 ~ 1567년)이 손자를 키우며 1551년(명종 6)부터 1566년(명종 21)까지 직접 쓴 육아일기가 <<양아록(養兒錄)>>으로 남아있다. 갓난아기가 젖을 빨고, 일어나 앉고, 이가 나고, 기고 성장하는 생육 과정을 매우 세밀히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생활방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작가소개와 작품해설
 
서울시 문화재인 <<양아록>>은 할아버지 이문건이 손자인 이숙길(이수봉, 이원배)의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16세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1551~1561)을 기록한 일종의 육아일기이다.「양아록」은 한문 필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영인되지 않고 한글 번역본으로만 출판된 바 있다.
 
작품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41수이며, 산문은 4편, 기타 관련 기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양아록>>은 이문건의 개인문집인 『묵재집(默齋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이 씨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하고 있던 것을 1997년 국문학 연구자 이상주가 연구하여 학계에 발표한 후 세상에 알려졌다.
 
이문건의 집안은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가문이 쇠락하고 그 자신은 경북 성주(星州)로 유배된다. 또한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었으나 대부분 병으로 잃고, 둘째 아들인 이온은 6~7세 때 천연두를 앓은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가 쓴 『묵재일기(默齋日記)』를 보면 그런 둘째아들을 가르치려다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 이로 보아 이문건이 자식에 대한 기대와 가문의 복원을 위한 열망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손자 이숙길은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생긴 귀한 자손이었기 때문에, 이문건은 손자에 대한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자가 사대부로서 예법을 지키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등장인물
☞ 이문건(李文健) : 기록의 저자이자 이숙길의 할아버지. 슬하에 여러 아이들을 두었으나 어려서 병으로 잃고, 오직 둘째 아들만 남았으나 그도 역시 아들 이숙길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유배지에서 친지도 없이 살아가는 외로운 처지에 어린 손자가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며 손자에게 희망과 기대를 건다. 그리하여 갓난아기 때부터 16세가 될 때까지 손주를 기르며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히 기록한다.
 
어릴 때는 손주가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점점 성장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술까지 마시자 실망을 금치 못한다. 화를 내고 매를 때리고 벌을 줄수록 손자와 사이가 멀어지자 마음 아파하였으나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못하고 마침내 손자가 16세가 되자 기록을 맺는다.
 
☞ 이숙길(李淑吉) : 이문건의 손자. 어려서는 할아버지 글 읽는 모습을 따라 하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외출하면 늦게까지 기다리는 등 할아버지를 매우 따른다. 이처럼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나, 할아버지의 기대가 너무 큰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나 공부하기만을 강요하자 더욱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마다 매를 맞거나 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려 하지 않고 13세 때부터 술을 좋아하여 연일 음주를 즐긴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였으나, 이문건이 세상을 떠난 후 어른이 된 이숙길은 사대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아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나중에 이숙길은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우정침(禹廷琛), 윤우(尹佑)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나중에 공로를 인정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참고로, 이숙길은 1564년에 이수봉으로 이름은 바꾼다. 그런데 괴산군 읍지(槐山郡邑誌)에 수록된 기록에 따르면 이원배(李元
培)로 나타나, 또 한 번 이름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숙길, 이수봉, 이원배는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작품 줄거리
이문건은 <<양아록>> 서두에서, "아이를 기르는 일은 꼭 기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딱히 다른 일이 없고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고 가족들과 떨어져 외로우므로 손자의 노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고자 일기를 쓴다. 훗날 손자가 장성하였을 때 일기를 기록한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하여 쓴다"고 동기를 밝힌다.
 
내용을 보면 첫째 성장과정, 둘째 질병이나 사고, 셋째 아이를 교육시킨 내용과 방법에 관한 것이 주로 나타나 있다.
 
첫째, 성장과정을 묘사한 시를 보면, 이문건은 손자의 성장 발달 과정이나 특징을 세세히 기록한다. 6개월 때 혼자 앉을 수 있게 되고, 7개월 때는 이가 나서 유모의 젖꼭지를 물고, 9개월 때는 윗니가 나고, 11개월 때 아기가 일어나는 연습을 한 달 동안 하여 마침내 스스로 일어났다. 특히 말문이 트자 할아버지 글 읽는 모습을 흉내 내자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문건은 관련 시인 「학어(學語)」에서, ‘손자가 말 배우는 모습에서 늙음을 잊게 해주는 기쁨을 느낀다’고 표현하고 있다.
 
둘째, 사고나 질병과 관련한 내용의 시를 보면, 이문건이 손자가 다치거나 병을 앓는 부분에 대해 할아버지로서 어떻게 대처하였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숙길은 5세 때 숫돌을 가지고 놀다 손톱을 다치기도 하였다. 이때 이문건은 「상조탄(
嘆)」 시를 통해, 손자가 손톱을 다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두 달 후 손톱이 재생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손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솔직히 드러냈다.
 
이문건은 이숙길이 6세 때 천연두를 앓자 「행역탄(行疫嘆)」을 지었는데, 당시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할아버지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문건은 온 몸에 종기가 나고 곪아서 고통스러워하는 손자를 안고 달래며 직접 미음을 먹이고 어루만지며 병이 나을 때까지 함께 하였다. 그리고 종기의 크기와 색깔, 분포상황, 치유기간, 종기의 흔적과 크기, 후유증과 약 처방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기록하여 투병의 자료로 삼았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위험을 넘기고 건강히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손자가 밥 먹고 똥을 눌 때도 할아버지만 찾고, 멀리 나갔다 들어오면 졸음을 참으며 기다리다 반기는 모습을 보고 사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셋째, 교육과 관련한 시를 살펴보면 이문건이 손자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는지 알 수 있다. 이문건은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사대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노조탄(躁怒嘆)」이나 「경구탄(驚懼嘆)」을 보면 손자가 침착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함을 알 수 있다. 이문건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인성적으로도 성숙한 군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손자가 성장하며 9~10세가 되어 공부를 게을리 하고 놀기만 좋아하자 실망스러움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말을 듣지 않아 벌을 주고 때리면 엎드려 울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손자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거나 그네를 뛰며 놀기만 했다. 이러한 내용은 「서학탄(署瘧嘆)」, 「책아음(責兒
吟)」, 「달아탄(撻兒嘆)」에 잘 나타나 있다.
 
13세 때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날마다 과음하였으며 더욱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손자가 16세가 되자, 자주 매를 든 할아버지의 탓도 있지만,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손자와 언쟁을 하게 되었다. 손자에게 화를 낸 후 마음 아파하고 한탄하며 「노옹조노탄(
嘆)」을 지은 후 기록을 맺는다
 
기미년(1559) 3월 13일, 아이가 학문을 익히지 않아 앞에 앉게 하고 꾸짖었다. 또 살펴서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서 나가더니 아이들과 동문 밖에서 어울렸다. 곧 여종을 보내 불러들이게 했다. 뒤쪽 사립문 밖에 와서 끌어당겨도 들어오지 않아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 한참 뒤 나는 아랫집에 있다가 그 불손함에 화가 나서 직접 나가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올 때 아이의 머리통을 다섯 번 손으로 때렸다. 들어와 창가에 서게 하고 손바닥으로 그 볼기를 네 번 때렸다. 아이가 엎드려 우니 곧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양아록>>은 무엇보다도 조선 시대 유일한 양반의 육아 일기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세밀하고 정확한 기록과 정보로 인하여 당시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손자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이 매우 솔직하게 나타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na-;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유튜브,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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