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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박물관 방문기
2016년 6월 16일
about 문화재·역사·전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양주시(楊州市) # 회암사지 박물관
(2019.11.21. 19:07) 
◈ 회암사지 박물관 방문기
조선은 유교국가로 불교를 배척하였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건국에 무학대사의 역할을 인정하여 왕실 사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중의 이태조와 왕사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양주 회암사(檜巖寺, 전나무가 많았는지 전나무 "檜"자를 쓰고 있음)는 조선 전기에 가장 큰 사찰이었습니다. 조선중기로 가면서 폐사되었던 그 곳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회암사지 박물관이 2012년 10월 19일 개관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기와 등 건축 관련 궁궐 유물을 볼 수 있는 좋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 불교를 배척하였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건국에 무학대사의 역할을 인정하여 왕실 사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중의 이태조와 왕사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양주 회암사(檜巖寺, 전나무가 많았는지 전나무 "檜"자를 쓰고 있음)는 조선 전기에 가장 큰 사찰이었습니다. 조선중기로 가면서 폐사되었던 그 곳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회암사지 박물관이 2012년 10월 19일 개관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기와 등 건축 관련 궁궐 유물을 볼 수 있는 좋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회암사는 조선초에는 태조(太祖) 이성계,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비), 문정왕후(文定王后,종중 계비) 등의 왕실인물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하여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고 또한 행궁으로써의 역할로 궁궐 건축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 중기로 가면서 폐사지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습니다.그러다가 19세기 초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된 작은 회암사(조계종 소속으로 봉선사 말사)가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찬란했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절터에 남아있는 유구를 통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2014년 10월 회암사지 박물관 방문기와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na-;▼무학대사, 지공선사, 나옹선사
 
\na-;▼지공선사(指空禪師)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 提納薄陀, 禪賢)이다. 8세 때 나란타사(Nallanda, 那爛陀寺) 율현(律賢)에게 출가해 19세에 졸업하고 인도 각 처와 원(元)의 수도인 대도(大都)를 거쳐 고려의 개경·금강산·회암사 등에 머물며 불법을 전파했다. 이 후 다시 원의 대도로 돌아가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지공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na-;▼ 나옹선사(懶翁禪師)
나옹의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출가한 뒤 회암사에서 수도하며 깨달음을 얻고, 1346년(충목왕 3)부터 원의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에게 수학했다. 이후 15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중창불사를 단행했다. 나옹은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도입해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했다.
 
 
 
\na-;▼무학대사 (無學大師)
삼기(三岐: 합천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朴)씨, 휘는 자초(自超),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출가해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고, 1353년(공민왕 2) 원의 연경(燕京, 북경)으로 가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건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 거처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도 회암사는 무학이 주석함으로써, 최고의 왕실사찰로서 위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na-;▼조선 전기에 열린 왕실 불교의식
 
 
 
 
\na-;▼용두
 
 
 
 
\na-;▼토수
 
 
\na-;▼동물형 석상 머리편과 보주(寶珠)
 
 
 
 
▼행렬 모형
 
 
 
 
\na-;▼청동 금탁(靑銅 琴鐸,건물 추녀 끝에 다는 종으로 풍령,풍탁이라고도 함)
2000년 6월쯤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호칭이 새겨진 대형 청동 풍탁(건물 추녀에 매달던 종)이 발견되었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15자(字)가 새겨져 있어서 새삼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근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잡상(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 무장형 잡상
 
 
\na-;▼동물형 잡상
 
 
\na-;▼회암사지 출토 왕실 자기
 
 
▼출토된 청기와
 
 
 
 
\na-;▼기와
 
 
 
 
 
 
 
 
 
 
\na-;▼용문기와
 
 
 
 
 
 
 
 
 
 
 
 
 
 
 
 
\na-;▼불상
 
 
\na-;▼불상 머리편
 
 
\na-;▼용두편
 
 
\na-;▼ 금동불 입상
 
 
\na-;▼"회암"명 청동발
 
 
\na-;▼회암사 약사삼존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회암사에 있었던 조선 중기의 불화.
ⓑ1565년(명종 20년) 경 작. 세로 54㎝, 가로 30㎝.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감지(紺紙)에 금니(金泥)로 윤곽을 그리고 본존의 육계(肉髻)·입술·약합(藥盒) 등에만 채색을 가한 금니화(金泥畫)이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그 아들 명종의 병세 회복과 건강 그리고 세자의 탄생을 기원하여 석가·미륵·아미타·약사여래의 화상을 각각 금화로 50점, 채화(彩畫)로 50점 등 도합 400점을 제작하여 회암사 중 수경에 개안 공양(開眼供養)한 불화 중의 한 폭임을 알 수 있다.
 
 
 
\na-;▼온돌시설이던 서승당
 
 
 
 
★배치도
 
 
\na-;▼회암사지 유구터
 
 
\na-;▼회암사지 건축 모형
 
 
 
 
 
 
 
 
 
★찾아가기
☞대중교통 : 1호선 덕정역에서 하차하여 역 앞에서 78번으로 환승 후 회암사지 정류장에서 하차 (약10분 소요, 10분~15분 배차간격, 입장료 2000원/대인, 월요일 휴관)
 
\na-;출처: 회암사지박물관, 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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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화계사 방문기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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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