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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의 북관(北關)은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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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북관대첩(北關大捷)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정문부(鄭文孚) 함경도(咸鏡道)
【역사】
(2021.11.23. 11:50) 
◈ 북관대첩의 북관(北關)은 어디지?
경복궁 향원정과 건청궁을 둘러보고 나오다 고궁박물관 옆에 있는 복제된 북관대첩비(유명 조선국 함경도 임진 의병 대첩비. 有明 朝鮮國 咸鏡道 壬辰義兵大捷碑)를 보았고 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경복궁 향원정과 건청궁을 둘러보고 나오다 고궁박물관 옆에 있는 복제된 북관대첩비(유명 조선국 함경도 임진 의병 대첩비. 有明 朝鮮國 咸鏡道 壬辰義兵大捷碑)를 보았고 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북관대첩의 "북관(北關)"은 함경도(咸鏡道)를 말하며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외에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때 1592년 10월 20일 ~ 1593년 2월 28일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 등이 거병해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왜군을 격파했고 함경도에 파견한 임해군과 순화군 왕자를 잡아 왜군에 받치고 항복한 국경인(鞠景仁) 등을 참수한 전투를 말합니다.
북관 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북평사(정6품 무관)로 있던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함경도 경성, 길주, 단천, 백탑 등에서 격퇴한 공을 기리기 위해 1708년(숙종 34)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머릿글은 이조참의 윤덕준(尹德駿), 비문은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현재 김책시) 임명면에 세운 전승기념비(戰勝紀念碑)로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가 13cm이며, 앞 뒷면에 1,500여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문부(충의공 鄭文孚. 1565~1624)
①본관은 해주(海州) ②자는 자허(子虛) ③호는 농포(農圃) ④서울 출신 ⑤1585년(선조 18)에 생원(生員)이 되고 1591년(선조 24)에는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다. ⑥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북 일대가 왜군에 의해 함락되고,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이 두 왕자(임해군,순화군)와 관리들을 잡아 왜장 가토(加籐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과 국세실(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에서 싸워 대승하였다. ⑦이어 쌍포전투(雙浦戰鬪)와 백탑전투(白塔戰鬪)에서 가토가 이끄는 왜적에게 승리해 관북 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⑧그러나 이러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봉작(封爵)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괄(李适 : 1587~1624)의 난(1624)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⑨숙종(肅宗) 때 오명(汚名)을 벗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⑩시호는 충의(忠毅)이며 묘는 의정부에 있다.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토벌하는 그림)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한 화첩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들어 있으며 높이 41.2㎝, 폭 31㎝ 종이에 그린 채색화로 18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대장기가 꽂힌 성루에는 정문부 장군이 앉아 있으며, 성문 밖에선 말을 타고 왜군을 추격하며 화살을 쏘는 의병들과 화살을 맞아 쓰러지고 패주하는 왜군들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구한 운명의 북관대첩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으로 함경도 지방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 여단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가 발견하였고, 이케다는 이 비석에 새겨진 일본의 패전 기록을 수치스럽게 여겨 주민들을 협박해 일본으로 강탈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는 조선에 패배한 굴욕을 씻겠다는 명목 아래 태평양전쟁 당시 A급 전범들이 안치되어 있는 동경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왔다.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북관대첩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09년 당시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이다. 그는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비석을 발견하고 『대한흥학보』 제5호에 비석이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된 비통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주목받지 못하였고, 이후 오랫동안 이 비석의 존재는 잊혀왔다.
▼조소앙 선생과 야스쿠니신사 내 방치한 북관대첩비
 
▼1926년 6월 19일 동아일보에 "북관대첩비"란 기사가 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 이생-
일본 동경에 야스쿠니신사가 있는데 일본 전사 장졸의 초혼제를 매년 봄, 가을에 거행하는 곳이다. 그 내부에 조선 고대의 갑옷, 군기, 창, 총, 대포 등과 청나라, 러시아, 독일과 전쟁 당시에 획득한 다수의 무기를 진열해 일반에게 관람시킨다. 필자도 구경 가보니 신사 정원 후면에 높이가 5척, 너비가 2척, 두께가 5촌 정도 되는 웅장한 비가 서있다. 그 비석을 정면에서 보니 "북관대첩비"라 쓰여있기에 경악해 그 비문을 자세히 보려다 헌병에게 제지 당하여 비석 내용을 보지 못했다.
비석 좌측의 안내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명천군(明川郡) 임명진(臨溟津)에 있었는데 조선과 전쟁(임진왜란)시 이붕수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한 사실을 기재하였는데 그 비문에는 대첩이라 하였지만 그때의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 여러분은 그 비문을 믿지 말라”였다. 그렇지만 우리 조선인은 예부터 패하고 이겼다고 비석을 세워 자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사실인 이상, 이 비문의 당당한 정신은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곡절로 비석이 이곳에 이전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옛 전례로 추측해 보면 일본 개인이나 단체가 몰래 강탈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 기록이 기재된 비석이 함경도 임명진에 있다가 타국 모퉁이에 방치 당하고 있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두자.
 
이후 북관대첩비의 일본 야스쿠니신사 보관 사실을 국내에 알린 분은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 선생이었다. 그는 『대한흥학보』에 실린 조소앙의 글을 접하고 야스쿠니신사 경내를 샅샅이 뒤져 비를 찾아냈다. 그가 발견할 당시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신사의 비둘기 사육장 옆에 말 그대로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한다.
▶반환운동
정문부의 후손인 해주 정씨 종친회는 비석이 확인된 직후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반환 청원서를 내고, 권궁사(權宮司)를 만나보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2003년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요청하자 남한과 북한의 협의 후 일본 정부에 공식 요청이 있을 경우, 비를 반환할 수 있다는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2005년 3월 한일 불교복지 협의회가 북한의 조선 불교도 연맹 측과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합의문 채택 결과를 주한 일본 대사관에 통보했다. 6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관대첩비 반환에 합의하였다. 2005년 10월 일본 반출 100년 만에 비가 고국으로 돌아와 일반에 공개되었고,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잠시 전시된 후, 경복궁으로 옮겨져 11월에 공식 제막식이 이루어졌다. 2006년 2월 남북 간에 북관대첩비 북한 환송에 관한 협의를 가져, 3월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어 3월 23일 원래 자리인 함경북도 길주(김책시)에 다시 복원되었고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복제비(複製碑)는 2006년 4월부터 경복궁 고궁박물관 경내, 천안 독립기념관, 의정부 정문부 묘역, 강릉 황산사에 세웠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3YibldMEKj4
▶북관대첩비 탁본과 원문 번역 -중앙박물관 자료-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그 이름을 일세(一世)에 크게 울린 것으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 공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 대첩과 이 월천(月川府院君 李廷馣)의 연안(延安)대첩이 있어, 역사가는 그것을 기록하고, 유담자(遊談者, 이야기 꾼)는 그것을 칭송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수레와 군사 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며, 곤고(困苦)하고 힘없는 가운데에서 떨쳐 일어나 도망하고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오직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쪽 땅(함경도)을 수복한 것은 관북(關北)의 군사가 그중 으뜸이라 할 것이다.
만력(萬曆, 명나라 神宗의 年號) 중에 왜의 추장(酋長)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저들의 강한 군사를 믿고 덤벼,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며 우리가 길을 빌려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宣祖)는 이미 서쪽(평안도)으로 몽진(蒙塵)하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는데, 경기도를 함락시킨 적의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행조(行朝)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은 북방을 침공하였다.
그 해 가을에 가등청정이 북도(함경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군사가 심히 정예(精銳)하여 철령(鐵嶺) 이북에서 우리 군사가 성(城)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이때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內應)한 바, 국경인은 회령(會寧)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않더니 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臨海君과 順和君)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그 지 방의 수령과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넘겨주고 정성을 보였다.
경성(鏡城)의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그의 숙부인데,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서로 무리를 지어 함께 적이 주는 관직을 받아 각각 고을을 웅거(雄據)하고 성세(聲勢)를 펴서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백성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경성(鏡城)의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나라의 어지러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흉도(兇徒)가 어찌 감히 저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피하여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쫓았던 바, 마침내 정공(鄭公)을 추대하여 주장(主將)으로 삼고, 종성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次將)으로 삼아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그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서 국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국세필이 허락하고 의병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정공이 기(旗)와 북을 세우고, 남쪽 성루(城樓) 올라 국세필을 꾀어 그가 현신(顯身)할 때 강문우에게 눈짓하여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 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明川)으로 나아가서 말수(末秀) 등을 잡아 목 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국경인을 쳐서 목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吉州) 사람 허진(許珍), 김국신(金國信), 허대성(許大成)이 또한 성원하였다.
이때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를 웅거(雄據)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里)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이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정현룡은 중위장(中衛將)을 삼아 백탑(白塔)에 진을 치게 하고, 오응태, 원충서는 복병장(伏兵將)을 삼아 석성(石城), 모회(毛會)에 나누어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左衛將)을 삼아 목책(木柵)에,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右衛將)을 삼아 날하(捏河)에, 김국신, 허진은 좌우척후장(左右斥候將)을 삼아 임명(臨溟)·방치(方峙)에 각각 나누어 진을 치게 하였는데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덮쳐지며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어 적이 패하여 달아나므로, 군사를 풀어 추격하여 그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이에 원근(遠近)이 진동하여 장수와 관리들로서 도망쳐서 숨어 엎디어 있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그 수효(數爻)가 7천 명에 이르렀다.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는데, 길 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성진(城津)의 적이 임명에서 노략질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무찔렀으며, 산에 매복을 하였다가 적의 귀로를 엿보아 협공하여 크게 깨뜨림으로써 또 수백 명을 목 베고,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대로가에 널어 놓으니 군사의 형세가 크게 펼쳐지고 적은 더욱 두려워 움츠리게 되었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바야흐로 무르익을 때 편장(偏將)이 철기(鐵騎)를 끌고 적진의 옆을 풍우(風雨)같이 무찌르니 적이 세(勢)를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 군사가 그 기세를 타고 적을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端川)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를 쉬게 하자, 가등청정이 자기 군(軍)의 불리함을 알고 대병(大兵)을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白塔)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그들을 패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이붕수, 허대성, 이희당(李希唐)이 전사하였는데,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소서행장을 평양에서 격퇴시켰는데, 정공이 최배천을 시켜 사잇길로 행재소(行在所, 義州)에 승첩(勝捷)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이붕수에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고, 최배천에게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의 계급을 내렸다. 그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정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는다’하여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던 까닭으로 정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顯宗) 때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노(父老)들에게서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정문부에게는 좌찬성(佐贊成), 이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贈職)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관작(官爵)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에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지금 임금(肅宗) 경진(庚辰)에 최창대(崔昌大)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慨然)히 제공(諸公)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臨溟), 쌍포(雙浦)를 찾아 진(陣)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며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노(父老)에게 말하되 ‘섬 오랑캐의 전화(戰禍)가 몹시 심하여 삼경(三京, 즉 漢城, 開城, 平壤)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러 나라의 발상(發祥)한 옛 땅(太祖의 고향)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던고.
행주, 연안(延安)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功烈)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 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關北)은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서도 비갈 하나 없으니 어찌 여러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그렇소. 우리들의 뜻이 그러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에야’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내게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나는 적임자가 아니어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 하되 ‘이 일은 실로 공이 먼저 발의하였으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철폐하겠소.’하므로, 마침내 그 사적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을 붙인다.
남쪽에서 도적이 와 대방(大邦, 明)을 치려 드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온 나라가 화(禍)를 입었네.
높고 높다 북방이여 오랑캐 소굴 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항 없이 따르도다.
피머금은 입으로 흉한 독(毒)을 뿜을 적에
씩씩하다 우리 군사 뭇 호걸 헌걸차다.
군사란 정의가 제일, 창과 활이 부질없어
반역자 무찌르니 저 도적 못 덤비네.
병정들 북을 치니 산이 무너지듯 바다 끓듯
우리 군사 빛난 전술 흉한 적들 무너지네.
천벌을 내리게 함은 사사(私事) 아닌 정의거니
북쪽 땅 평정되어 누에 치고 농사짓네.
임금은 감탄하며 네 공보다 더 할 이 뉘더냐.
벼슬 주고 사액(賜額)하니 한결같은 은혜로다.
선비 기풍 열렬하니 백성들도 용감하고
임명바닷가에 우뚝한 돌이 있어 찬송을 거기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숭정(崇禎) 갑신(甲申, 1644) 뒤 예순다섯 해 시월
출처: 박대남, 문화재청, 유튜브, 역사스페설, 고려대,문화유산채널,중앙박물관,구글, 조선일보,한국표준영정,민족문화대백과,대동여지도,국립지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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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