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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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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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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 # 이도백하
【역사】
(2019.12.19. 19:03) 
◈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백두산·장백산 전혀 다른 산임에도 중국 영토야욕에 지명 왜곡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백두산·장백산 전혀 다른 산임에도 중국 영토야욕에 지명 왜곡
 
 
우리 일행을 실은 기차는 밤사이 굽이굽이 돌아 달려 새벽녘에 이도백하에 닿았다. 두 해 전보다 시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곳곳에 도시 개발의 흔적이 보인다. 더구나 이듬해 아시안게임 때문에 북경에서도 도시 미화작업이 한창이었다. 도로도 포장돼 있었고 택시의 수가 많아지고 우마차의 통행도 뜸하다. 백두산에 가기 위해 택시를 수소문한 끝에 30대 후반ㅇ 의 기사를 만나 짐을 싣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두 번째 가는 백두산이라 내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하늘은 잔뜩 찌푸린 상태로 이슬비가 내리기도 한다. 두 해 전 묵었던 추억이 깃들었던 나무로 지은 초대소는 없어진 모양이고 부근에 새로 지은 호텔만 보인다. 11시경 백두산 등산로 초입에 닿아보니 등산하려는 인파가 제법 많아 보인다.
 
입장권을 구입해서 우리 일행은 택시로 기어가는 뱀처럼 이어지는 백두산 능선 길을 따라 현명봉에 오르니 제법 비바람이 몰아친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구름 안개가 몰려온다. 흰 먹구름이 천지 위를 온통 차지해 바람에 실려 지나가니 천지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두 해 전에 봤던 천지의 위용을 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우리 일행은 우중에 사진을 찍고 하산했다. 계곡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 보니 날씨가 어느덧 개여 햇볕이 나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바깥은 오히려 비가 그치고 맑아 천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나서 운전기사에게 다시 현명봉에 오르자고 하니 운전기사는 현금을 더 달라고 한다. 우리는 적당히 타협해 다시 현명봉에 오르니 하늘은 개여 있고 바람이 구름을 재빠르게 몰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구름사이로 짙푸른 백두산 천지의 또 다른 위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비 온 후의 천지 모습은 맑디 맑은 신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찍은 구름 속의 천지 모습 사진이 나의 가장 빼어난 작품이 됐다.
 
백두산 천지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백두산 산신령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반만년 넘게 섬겨온 이 아름다운 민족의 성산을 두고 이미 천지 반을 중국에 빼앗겨 버렸으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청(淸)의 강희제와 목극등의 야심이 바로 이 백두산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청의 강희제는 장백산에 치제를 하는 등 백두산 일대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
 
실제 강희제가 치제를 지낸 곳은 백두산이 아닌 계림합달령 부근이었다. 심양에서 백두산까지 치제를 지내기 위해 왕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그래도 중국인들은 강희제가 백두산에 와서 치제를 지냈다고 주장한다. 이때 중국인들은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 주장한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르는 이유가 300여 년 전 세워진 백두산정계비 사건 때문이다.
 
본래 백두산과 장백산은 같은 산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산임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영토 야욕과 자신들이 백두산 일대의 지명을 왜곡시킨 것 때문이다. 청의 강희제가 각라무묵눌을 파견한 곳도 삼도구 지역인 환인 부근으로 숙종3년(1677년)이었다. 그 후 숙종 11년(1711년)에 늑초 일행이 이곳 3도구 일대를 답사하다가 조선의 월경자들과 충돌해 일으킨 사건이 ‘삼도구 사건’이다.
 
이에 양국은 봉금지역에서 벌어진 범월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 벌어진 이만건 사건으로 인해 백두산정계비가 1712년 세워지게 됐다. 이때 목극등은 3도구 일대와 비슷한 지역이 백두산 일대임을 알고 백두산 분수령에 임의로 비를 세우게 되었지만 정계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목극등 일행은 이 비를 세우기 위해 조선의 대표인 박권과 이선부의 동행 요구를 거부하고 역관과 군관만을 데리고 갔다.
 
목극등이 환인지역과 백두산 일대의 유사성은 압록강과 토문강의 흐름의 유사성이다. 환인지역의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흐르는 강 물량과 강폭이 더켰다. 환인의 뒤산인 계립합령에서 발원하는 휘발하의 상류 지명이 토문했다. 이 휘발하는 송화강으로 유입되는데 백두산의 오도백하 역시 송화강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청에서는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지명을 바꾸어 버린다.
 
즉 1711년 강희제가 내린 유시(諭示)에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향해 흐르다 바다에 들어가니 그 서남이 조선의 땅이 되고, 동북은 중국이다”고 적혀있다. 즉, “西南爲朝鮮 東北爲中國”이라는 강희제의 유시 대로 정계비를 세우려다 보니 “西爲鴨綠, 東爲土門”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목극등은 환인지역의 압록강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토문하는 오도백화로 대체하고 오도백화를 ‘토문강’으로 지명을 바꿨다. 이것이 조선과 청간에 일어났던 ‘백두산정계비’ 설치의 실상이다. 결국 백두산의 지리 정보에 어두운 조선은 영토야욕이 켰던 청의 기만전략에 그만 속고 말았다.
 
이와 같은 ‘백두산정계비’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간주하고 강희제의 치적 사실부터 왜곡해, 백두산을 자기 영토로 여기게 돼 ‘장백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이 우리의 성산인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하튼 조선과 청 사이에 사연과 곡절이 많았던 백두산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영토분쟁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 일행은 백두폭포(장백폭포)를 보기 위해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온천지대를 지나 산길을 타고 가서 천지에서 내려오는 백두폭포를 다시 보았다. 백두산이 생긴 이래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내려 우리 민족의 젖줄인 송화강을 만든 폭포가 아닌가. 비온 후의 백두폭포는 흰 물보라를 만들며 내며 변함없이 물을 토하고 있었다. 두 해 만에 만나는 폭포가 아니던가.
 
우리의 모든 하천 가운데 남한강이 북으로 향해 서해로 흘려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저 송화강도 오직 북으로만 흘려 차가운 북쪽 바다로 들어간다. 마치 남으로만 흐르는 것을 거부하는 송화강을 보느라면 불굴의 우리 민족성을 느끼게 된다. 송화강은 우리 민족의 젖줄이다. 아니 모성이 넘쳐흐르는 어머니의 강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송화강을 우리 민족의 최초의 아리수라 불렀다. 단재의 이 말은 송화강이 우리 민족 창조의 강이자 시원지임을 갈파한 것이다. 나는 이 송화강을 ‘도전(挑戰)의 강’임을 천명해야겠다. 언젠가 이 송화강이 우리 민족을 다시 부흥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두폭포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숲속으로 들어가서 나만의 백두 산신께 감사를 드리고 기원을 했다. 백두산의 작은 못인 소천지를 둘러보고 이도백하에 도착하니 다섯 시가 됐다. 이곳에 숙박하기보다는 연길에 가서 숙박하는 것이 더 났다고 판단돼 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부근의 군부대에 있는 젊은 군인이 운행 경비를 주면 연길까지 지프차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우리는 가방을 지프차에 싣고 연길로 출발했다. 군인 기사가 제법 빠르게 운전하는데 위험하게 보이는데도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용정 부근에 도착하니 9시가 넘어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젊은 군인 친구는 생마늘인 쪽마늘을 주문해 그대로 잘도 먹는다. 이 군인 친구도 마늘을 좋아하는 우리와 같은 민족성을 물러 받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길시에 도착하니 10시가 가까웠다, 허름한 빈관을 택해 숙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지금까지 안내해준 박영림 군과 아쉽게 헤어지면서 웃돈을 더 줬다. 연변대학에서 열리는 제2차 조선학 학술회의가 8월 12일부터 열린다. 이틀이 남았다. 두 해 전에 가 본 연변민속박물관을 다시 찾아봤다. 정영진 관장은 부재중이었다. 식사도 한식식당만 골라 먹었다. 발을 내려놓는 공간을 만든 새로운 식당도 보인다. 식당 주인은 서울에 가서 돈을 벌어온 우리 동포라고 했다. 지난해 서울역 지하철 복도에 노점을 벌이며 장사를 하던 중국 동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길시내 도로변에 고층 건물 건축이 한창이다. 대부분 한족이 건물주라는 소문이다. 우리 동포들은 큰돈을 모으기 힘들다고 한다. 돈을 모으는 대로 흥청망청 써버리는 버릇 때문이라니 매우 걱정스럽다. 중국은 이곳 간도지역에 한족들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1910년대의 7:3의 인구비율이 이젠 역전이 돼 한족이 더 많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조선족자치주‘ 문제가 큰 걱정이다. 지금처럼 우리 동포들이 계속 자치주를 빠져나가면 자치주의 유지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정말 “조선족자치주 문제”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우리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틀 동안 낮에는 연길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저녁에는 이틀 뒤로 다가 온 학술대회에서 내가 발표할 원고의 요지를 정리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열리는 제2차 조선학 학술대회에는 어떤 학자들과 어떤 인물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해본다.
백두산(白頭山) # 이도백하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다
• 다시 구름이 가득 낀 백두산을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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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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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