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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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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화강([松花]江) 안중근(安重根)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하얼빈 시(哈爾賓) # 하얼빈 역
【역사】
(2019.12.19. 19:05) 
◈ 동양평화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역에서
[스카이데일리 연재]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안중근의 업적…“동양평화를 지켜낸 자”
동양평화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역에서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안중근의 업적…“동양평화를 지켜낸 자”
 
 
흑룡강대학 국제학술회의는 첫날인 7월 26일 이달순 한국외교사학회장과 서란허 흑룡강대학 총장의 기조연설로 시작되어 12개 주제를 이튿날 오전까지 끝내고, 오후 1시 30분부터는 하얼빈시 관광을 하고 오후 7시경 버스로 장춘으로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첫날 저녁 식사 후 6시경 송화강가로 나왔다. 송화강은 과연 강의 폭이 가히 1000미터가 넘는 큰 강이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이 2000리를 거쳐 하얼빈시에 이르기 전 400리 앞에서 내몽고 북부지역의 대흥안령산맥에서 발원하는 감하(甘河)강을 비롯한 여러 개의 지류를 가진 눈강(嫩江)을 부여 부근에서 만나 큰 강줄기를 형성한 후 하얼빈을 거쳐 북쪽으로 1000여리를 흘러 동강(同江) 부근에서 흑룡강 본류를 만나 수 천리를 다시 흘러 오호츠크 해로 흐르는 강이다.
 
송화강은 세칭 1712년 청의 목극등이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양국 간에 국경 분쟁을 초래케 한 토문강이 송화강의 발원지다. 그러나 정계비 설치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됐다. 중국 측은 심시비(審視碑)로 주장하기도 하는 등 국경비로 보지 않은 견해가 제기됐으며, 한국 측도 정계비 설치 과정에 나타난 강압 및 조선 대표의 불참, 토문강의 오인 등의 이유로 정계비 효력의 무효를 제기했다. 더욱 주요한 점은 백두산정계비가 국경조약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즉 압록강과 토문강이 18세기 초 이후 국경하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동문휘고(同文彙考)’ 등과 서양고지도를 통해 입증됐다.
 
또한 토문강도 최근 밝혀진 서양고지도 등 여러 지도 자료에도 휘발하 상류를 토문강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청은 강희 16년인 1677년부터 무묵늘을 보내어 삼도구 일대를 답사시켰으며, 1684년에는 늑출 일행을 시켜 휘발하 부근을 답사시킨다. 더구나 이들이 장백산으로 부르는 지명이 휘발하 상류의 ‘계림합달령’임이 밝혀졌으며, 백두산과 장백산이 동일한 산이 아님이 입증됐다. 따라서 백두산을 둘러싼 조ㆍ청 양국 간의 국경분쟁은 목극등에 의해 백두산을 차지하기 위한 토문강의 왜곡 및 조작설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여하튼 300년 전부터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송화강의 모습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송화강을 우리 민족의 최초의 아리수라고 지칭했다. 이는 송화강 부근에서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들이 탄생되었음을 의미했다. 오후 6시 경이었지만 낮이 긴 탓으로 푸른 송화강과 흰 구름이 떠있는 한 여름의 강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강안에 쌓인 모래밭에 천막집을 지어 놓고 시민들의 여름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수영을 하는 사람과 연인들이 즐거운 뱃놀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송화강변을 산책하다보니 어둠이 짙어져 우리 일행은 어느 가게 앞 탁자 주위의 의자에 앉아 캔 맥주를 들며 한담을 나누면서 북만주의 야경을 감상했다. 보이지 않은 송화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튿날 점심을 먹고 나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한 하얼빈 역을 방문했다. 한국의 기업체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만들어 기증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동상을 세우지 못하고 부근 백화점에 보관 중이라고 안내자가 설명했다. 당시 한중 수교 후 일어난 양국민 교류 간의 미묘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국민교육을 실행했다. 그러나 일제가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해 군대를 해산시키자, 북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무력배양으로 일제를 몰아낼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1908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이 돼 의군(義軍)의 창설에 성공하였으며, 수차의 국내 진공의 승리를 하였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참패해 의군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안중근 이듬해 1909년 2월에 12명의 동지들과 그라스키노(煙秋) 카리(下里) 마을에서 단지혈맹을 맺어 ‘하늘과 땅에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사수’를 맹세했다. 거사 전에 우덕순과 함께 김씨 성의 여관에 유숙하면서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를 지었으며, 우덕순은 41행의 이토조매가(伊藤嘲罵歌ㆍ이토를 비웃으며 꾸짖는 노래)를 지었다.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를 소개한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토(伊藤)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에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 안중근은 한국 병합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대한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높였다. 9월 4일 일본에 의해 간도를 청에 불법으로 넘겨준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52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안중근은 31세였고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였으니 32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만고의 의인(義人)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특히 중국 저명인사들은 안중근의 이토 척살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장태염(章太炎, 사상가·학자)은 안중근을 ‘아시아주 제일의협(亞洲第一義俠)’이라고 했으며, 주호(周浩, 안중근전 서문)는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다만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함 만이 아니라 세계평화의 공적(公敵)을 없애버리기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한염(韓炎, 안중근전 서문)도 ‘안중근은 삼한의 현인이며 세계의 영웅이다’고 평가했다. 고관오(高冠吾, 안중근전 서문)도 ‘안중근의 기적은 족히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귀신이라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안중근은 세계의 영웅호걸이다. 전송을 하나, 하지 않으나 그의 업적은 천고에 빛날 것이다’고 했다.
 
더불어 안중근을 애도한 손문(孫文)의 만사와 양계초(梁啓超)가 쓴 ‘안중근 숭모 찬시’를 소개한다. 손문의 만사는 ‘功盖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弱國罪人强國相 從然易地亦藤侯’,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살아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등도 죄인되리’라고 했다.
 
중국 근대사의 정치가인자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의 ‘추풍에 덩굴 끊어진다(秋風斷藤曲)’의 내용은 더욱 유명하다. 그 중 발췌한 내용은 ‘폭풍이 야수마냥 울부짖고 싯누런 흙모래 대지를 휩쓸 때, 흑룡강 연안에 눈보라 휘날리고 북국의 엄동설한 살을 에는데, 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 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 대사가 이루어진 후 웃음소리 대지를 감동하게 하누나.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 마냥 빛나리. 나는 이 세상 살아 있는 한 사마천이 안자를 추모하듯 그대를 경중하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으리’라고 찬양했다. 안중근이 해와 달처럼 영원할 것이며 자기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겠다는 숭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주은래(周恩來)는 그의 저서에서 ‘한중 양국의 인민이 일제에 대항해 벌인 항일공동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한 후부터 시작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등영초(鄧穎超)는 주은래와 같이 ‘조선의 영웅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일을 칭송하는 안중근 또는 망국한이라는 연극을 함께 공연했다’고 서술했다(등영초-빛나는 한생)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이유에는 △명성황후 시해 죄 △고종 폐위 죄 △5조약과 7조약의 강제 체결 죄 △무고한 한국인 학살 죄 △정권 강탈 죄 △철도, 광산, 산림, 천택 강탈 죄, △제일은행권 지폐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의 외국 유학 금지시킨 죄 △교과서 압수 불태운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는 등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개의 항목을 들고 있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아베 수상 등이 침략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동양의 평화가 여전히 불안한 상태인데 안중근이 이토를 척살한 이유에는 무엇보다도 한국을 불법 병탄하기 위해 저지른 일연의 행위가 결국 동양의 평화를 해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당시 한국통감을 역임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한국 병합에 관련된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가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 우리 일행은 하얼빈역 광장에 도착해 84년 전 의거를 추억하고 안중근의 큰 용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곧이어 우리는 일본의 세균전 부대로 유명한 731부대로 이동했다. 창설 배경에는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의 일환으로 적은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세균전을 통해서만 중국대륙의 완전점령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첫 부임 의사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 불렸던 이 부대는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다. 일본의 패망 이후 이 부대의 과학자들은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돼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 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 부대의 악행이 유명해졌으며, 희생자들은 중국, 한국, 몽고,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로서 이들은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됐다. 또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됐다.
 
우리 일행은 731부대의 남은 일부 건물 안에 설치된 기념관을 둘려보고 소개 책자를 산 후 부대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제가 고귀한 인간을 실험대상인 마루타로 사용한 곳이었다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하얼빈 시내를 일주하면서 차창으로 하얼빈 시가지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얼빈 시도 평지에 발달한 도시로 보인다. 시가지에는 러시아풍의 건물이 자주 보인다.
 
일정에 따라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짐을 정리해 장춘행 버스에 싣고 날이 어두워지려는 오후 7시에 흑룡강대학을 출발했다. 잠깐의 만남에서도 서로간의 이별의 정은 애틋하기 마련이가 보다.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어두움을 뒤로 한 채 장춘을 향해 내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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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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