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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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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 김약연(金躍淵) 룽징 시(龍井)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 명동서숙 # 명동촌 # 명동학교 # 북간도
【역사】
(2020.03.02. 09:32) 
◈ 간도개척과 항일투쟁의 중심지 용정을 가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만주국 영역은 중국 한족 땅이 아니라 ‘한민족의 통치영역’
오늘은 간도개척의 시작이 됐으며 항일투쟁의 중심이 됐던 용정시를 방문하기로 했다. 용정시는 해란강이 시의 중심을 흐르고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라 이미 여러 번 방문했던 곳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관지역에서 금지된 월강개척이 1869(己巳)년과 1870(庚辰)년의 연이은 가뭄으로 인해 홍남주 회령부사의 월강개척 승인이 계기가 돼 강북의 경작지가 급증함과 동시에 조선인 이주민도 급증했다. 이를 뒷받침 해준 인물이 1883년 서북경략사에 임명된 어윤중(魚允中)이었다. 그는 변견지역을 순시하면서 종전의 범월정책의 수정을 요청하고 변경 조선인의 간도 이주를 승인하게 만든 인물이다.
 
홍남주의 경진개척 시작 이후 간도지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ㆍ서 간도지역으로 구분됐으며, 동간도의 중심지는 세칭 북간도라 부르는 용정 일대이다. 이 지역은 동간도의 동부지역이다.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지역이다. 따라서 동ㆍ서 간도지역의 초기 이주 및 정치적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재 중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역사교과서에는 간도 부분을 매우 소홀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간도 이주의 초기 단계는 두만강변의 무산ㆍ종성ㆍ회령 등지에 월강해 해란강을 건너 부르하통하 이북까지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대표적 사례가 장재촌 일대의 명동촌 개척이었다. 또한 조선인들의 개척이 시작된 지역에는 벼농사가 처음으로 시작됐다. 두만강 너머 개산둔진의 천평 일대와 해란강변의 서전평야가 간도 조선인이 최초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이 가시화되기 전후에 이미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정치ㆍ사회적 이유로 인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경제수탈이 가중화되자 국권회복 도모 등의 정치적 망명자, 항일투쟁가들의 이주가 이뤄졌다.
 
이같은 집단이주는 해란강 일대의 명동촌 건설의 시작이었다. 1899년 2월 북간도지역의 명동촌에 가족들을 이끌고 이주한 김약연(31명), 김하규(63명), 문치정(40명), 남위언(7명) 등 총 25가구 142명이 용정촌 남쪽 40리의 장재촌에 자리 잡고 한인촌을 건설했다. 이듬해 1900년에 윤재옥 가문이 합류해 5가문의 공동체가 형성됐다. 1905년에 이르면 900호가 넘는 명동촌이 형성된다.
 
이들 이주 한인들의 교육은 1901년에 세운 장재촌의 규암재, 대룡동의 소암재, 상중용촌의 오룡재가 맡아 교육을 실시했다. 이 시기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 등이 항일투쟁 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1906년에 용정촌에 천주교도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세운 것이 서전서숙이었다. 이듬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해 귀국이 거부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등 재정난에 처하게 되자 통감부간도파출소 소장의 회유책을 거부하고 서전서숙을 폐교했다.
 
1908년 김약연은 규암재 등의 사숙을 통합해 명동서숙을 세웠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이듬해 명동학교로 개명했다. 1911년에는 여학부도 설치하는 등 1925년까지 12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됐으며 이 중에는 수많은 항일투쟁가들이 나왔다. 이같이 명동학교가 간도의 민족항일운동가의 요람으로 알려지자 1920년 봉오동ㆍ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폐한 일본군은 간도참변 당시 명동학교를 불 태웠다. 이로 인해 학교운영이 여의치 않자 1925년 중등교육과정은 은진중학교와 통합됐다.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해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명동중학의 폐교로 인해 명동중학 재학생들이 대거 전학했던 은진중학이 민족교육의 산실이 됐다. 은진중학은 캐나다 선교회가 만든 학교였지만 1945년까지 용정의 민족항일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각 분야에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명동촌에 이주한 한인들은 서전서숙, 명동학교, 은진중학 등 교육기간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등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또한 간도지역 최초로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를 결성해 간도 한인들의 법적지위 향상에 노력했다. 당시 북간도나 명동촌 등에 이주한 한인들은 이 지역이 다른 나라의 영토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며 역사상 우리의 고토로서 우리 민족이 당연히 거주해야 할 영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정부도 1901년 변계경무서를 회령에 두었고 교계관 2명을 임명해 경무관이 이를 겸임토록 했다. 또한 무산 및 종성에 분서를 두고 간도 한인을 보호 관할하고 사법‧행정‧위생을 담당해 고시문을 내고 일지를 기록했다.
 
1902년 5월 21일 이범윤은 간도시찰사로 임명받아 이병순, 이승호를 대동하고 6월 23일 간도에 진입해 한인을 위무하니 백성의 판적에 든 자가 2만7400여호이고 남녀 10여만명이었다. 그러나 간도 한인의 보호를 위해 파병을 요청했지만 정부가 불허하자 이범윤은 스스로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하고 모자산, 마안산, 두도구 등에 영소를 설치해 간도 한인의 보호에 앞장섰다.
 
반면 서간도 지역은 청이 1667년부터 1875년까지 봉금을 실시했으며 조선은 1881년 봉금 해제했다. 이 지역은 백두산의 서쪽이며 1700년대부터 조선 월강민이 작은 부락을 형성했으며 이미 봉황성 일대까지 조선의 관할이 미친 곳이다. 연행록에 사실들이 나타난다. 또 서양 고지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872년 봉금지역을 답사한 군관 최종범, 김태홍이 답사한 후 기록한 ‘강북일기’에 의하면 노령산맥 남쪽의 간도지역은 이미 ‘회상제’라는 자치기구가 조직돼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세종시기인 1432년과 1437년의 2차 파저강 토벌작전으로 압록강 대안의 여진족을 토벌해 4군을 개척한 지역이다. 세종 12년(1467년)에 건주여진을 협공했는데 강순, 어유소의 두 장수가 압록강 너머 회인현 부근을 공략해 이만주 부자를 포함한 280여명을 잡아 죽이는 등 여진을 완전 소탕했다.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한 이후에도 봉황성 이동 압록강 대안 사이의 무인지대의 관할권이 계속 조선에 있었다. 심지어 조선 근해의 경호권과 도선장 관할권도 조선이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한광지대는 실제적으로 조선에서 그 관할권이 소속돼 있었다. 즉 경원 및 훈계 월변(越邊) 2, 3리에 집을 짓고 거주하는 자의 철퇴를 요구하니 청(淸)에서는 가옥을 철거하고 강 근처에 집을 짓고 경작하는 자를 엄히 금지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실제 백두산정계비 건립 전에도 이 지역은 조선이 관할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정계비 건립을 전후한 실질적인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Du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했으며 천하대총일람지도에는 압록강 대안지역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변책이 표기돼 있다. 그리고 Kaoli Koue ou Royaume de Coree 지도와 The Kingdom of Korea 지도에는 'PING-NGAN'이라는 지명이 만주에서 평안도에 걸쳐 표기돼 있다. 청의 황여전람도를 원본으로 한 1750년의 보곤디, 1794년의 윌킨스 등 수많은 서양지도에도 압록강 북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 연변 일대로 이어지는 동간도 지역으로 국경 표시가 돼 있다.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여 서간도 한인을 보호토록 했으며 1900년 경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郡)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해 이주민을 보호하게 했다. 한편 서간도의 서상무도 1902년 호적을 조사해 ‘변계호적안’을 작성했는데 총 7개 면의 1176호에 남녀 총 3374명이었다. 면단위의 호수는 리, 통으로 행정 체계화됐다. 통에는 통수를 두었으며 각 통에는 10내지 20여호를 관할하는 촌락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동ㆍ서 간도지역에서는 1897년에는 서간도와 1902년에는 동간도 관리사를 파견하는 등 통치력이 미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과서에는 이같은 사실을 생략하고 있다. 이 시기 조선은 1881년 봉금이 해제됐다. 두만강 대안과 내륙 경계지역으로 조선인이 대량 이주했고 1910년대 간도지역의 8할 이상이 조선인이었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1937년 조선인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으며 소수의 고려인이 구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돌아와 거주하고 있다.
 
백두산정계비도(규장각 28876호)와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 15504호)에서도 송화강-흑룡강선 안의 연해주도 우리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다. 1932년 일제에 의해 만든 만주국의 영역은 심ㆍ요지역을 포함해 금주성과 북쪽의 흑하성 등 10개 성으로 구성됐다. 이는 1909년 간도협약 체결 당시 영역을 벗어나 전 만주지역을 만주국으로 규정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모든 지역을 답사ㆍ조사해 만든 것으로 이 만주국 영역이 역사적으로 중국인의 한족 지역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즉 만주국의 영역은 중국의 한족의 땅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통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를 의미하는 간도지역은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중국이 전후 혼란시기에 만주국 지역을 일방적으로 점유했으며 1949년 중공이 불법 점유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1년 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간도협약을 무효 조약임을 규정했음에도 중국은 현재까지 간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국은 1909년 체결한 국제법상 무효조약인 ‘청ㆍ일 간도협약’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대부분의 친일식민사관에 물든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하기로 하자. 우리 일행은 용정시의 대성중학교로 향했다. 윤동주가 다녔다고 한다. 2층에는 용정 출신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인물 사진도 보인다. 부근의 용정인민정부와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 건물을 찾아 답사한 후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인 용정(龍井)과 용문교를 찾았다. 그리고 윤동주 생가로 향했다. 윤동주 생가는 1970년 문화혁명 시기에 파괴됐지만 1994년에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이 복원했다.
 
윤동주 생가 터에는 김약연 목사 기념비가 서있는데 명동기독교회 교생 김석관(金錫觀)이 짓고 쓴 것으로 새겼다. 건립 시기는 앞부분이 마모되고 ‘0 德 十年 四月’이라 새겨져 있다. 우리 일행은 생가 부근 남쪽의 콩 타작하는 농부 집으로 들어가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40대 후반의 송길연(宋吉連)ㆍ송길남(宋吉男) 형제가 74세의 어머니인 김명숙(金明淑)을 모시고 7대째 살고 있으며 부인은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했다. 어머니는 54세 때 만들었다는 연분홍 한복을 보여주기도 했다. 송 씨 형제의 아버지는 명동중학 출신이었다고 했다.
 
이곳의 간도 한인 마을에서도 탈 농촌 현상이 불어 닥쳐 어린 자녀를 둔 채 한국으로 돈 벌려 간 가정이 많다고 했다. 부근의 사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으로 향했다.
 
본래 일송정에 있었던 아름드리 큰 소나무는 없고 작은 소나무를 심어 두었다. 오래 된 소나무는 고사했다고 했다. 6년 전 처음으로 비암산에 올라 아름다운 해란강의 모습을 보았던 경치를 다시 보게 돼 감회가 깊었다. 정상 부근에는 1999년 7월 9일 LG그룹 허동수 사장의 방문기념 표지석이 보인다. 하산하는 도중에는 군데군데 한자로 새긴 무덤의 비석이 보인다. 아마 초기 간도개척의 한인 주인공의 무덤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은 다시 연길의 숙소로 향했다. 내일의 백두산 등정이 기대된다.
간도(間島) 김약연(金躍淵) 룽징 시(龍井)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 명동서숙 # 명동촌 # 명동학교 # 북간도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다시 오르다
• 간도개척과 항일투쟁의 중심지 용정을 가다
• 봉오동 전투현장과 두만강가 ‘사이섬’으로 가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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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