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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기자 조선(箕子朝鮮) 동북공정(東北工程)
【역사】
(2021.04.22. 14:07) 
◈ 중국학계의 기자조선의 진실에 대한 왜곡 실상(I)
[스카이데일리 연재]중국학계의 기자(箕子) 관련 주요 단행본 9편 분석
목   차
[숨기기]
중국에서 2007년 출판한 서적에는 “기자조선은 하나의 실존의 역사이며, 중국 동북문명사를 여는 단초(端初)이다. 기자(箕子)는 상말주초(商末周初)에 조선으로 달아나서, 한강 이북지역에 정권을 수립하여 1천년을 존속하면서 중원 국가의 조선반도 지방정권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최근의 중국학계의 주장은 동양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도이다.
 
더구나 중국의 고대 역사서는 사마천의 『사기』 이후 자국에 유리하게 윤색하여 기록하는 등의 중화주의(中華主義)라는 전통 아닌 고약한 전통이 전승되어지고 있다. 특히 고고학은 역사학의 보조학문이며, 출토된 유물을 통해 특정지역의 문화를 정의하고 고대 중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중화주의(中華主義)라는 민족주의에 기반으로 하는 중원중심적 시각은 정치적 역사적 부산물이다. 중국의 고고학 또한 그들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중화주의)를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로서 전파주의, 핵심부-주변부 이론 , 사회진화론 등 세 가지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중국학계가 왜곡된 문헌과 고고학 유물에 의거 기술한 기자조선 관련 왜곡 저서들을 분석해보면 위의 세 가지 이론이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씨는 중국의 고조선 연구의 전개과정을 시기 순으로 7단계로 나누었는데, 제5기의 80년대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6기, 7기인 9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러서는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고조선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두드려졌다. 기자가 고조선의 시발점이라는 중요한 의미부여 때문에 중국학계의 기자조선 연구는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에 비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한국이나 북한 학계의 경향과 대조적이다. B씨가 조사한 ‘중국학계의 기자 관련 연구 성과 논저’는 75권인데, 기자 관련 연구는 90년대부터 2000년도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북공정’을 전후한 시기 중국학계의 고조선 연구의 흐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국학계의 기자(箕子) 관련 주요 단행본 9편의 저서 중심으로 내용의 왜곡부분을 분석하고자 한다. 모두 9편의 내용을 B씨의 논문에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 『기자여조선론집(箕子與 朝鮮論集)』

 
‘기자(箕子)’를 다룬 최초의 단행본이며, 관련 논문 11편 수록. 저자 자신이 기자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요령성객좌현북동촌출토적은주청동기(遼寧喀左縣北東村出土的殷周靑銅器)」, 『고고(考古)』1974-6기(期)인데 이후 20여 년 기자조선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 저서의 핵심은 요서지역은 은(殷)의 발원지이며, 기자는 주(周)의 분봉을 받지 않은 은의 제후국으로 기후국(箕侯國)을 칭하다가 후대에 조선후국(朝鮮侯國)으로 개칭하였다. 기자조선 명칭은 옳지 않고 조선후국 중심지는 초기 요서에서 요동으로 이동하였다가 전국시대 연(燕)에 밀려 평양지역으로 옮겼다. 이에 대한 핵심적인 근거로 객좌현에서 발견된 ‘기기(箕器)’로 지칭되는 청동예기이다. 한·중간의 논쟁점인 ‘요서설(이동설)’의 기초가 되는 연구이다. 현재 중국학계는 ‘요서설’을 부정하는 경향이며, 저자의 이 연구는 자신의 지론인 ‘중화일체론’의 일환으로 기자조선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對遼西發現五千年前文明曙光的歷史蠡測(요서지역의 5천년 문명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 : 중국북방지역 문명의 ‘중원전파론’ 주장, 북방지역 선사문명은 중국문명의 한 갈래가 요서지역에서 시작, 하(夏) 건립 전후에 요서 홍산문화권에서 하가점하층문화가 형성되어 상(商)이 기원하고, 상(商)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하(夏)문화와 결합하여 상(商)문화가 형성됨. 상(商)말기에 상(商)족의 한 갈래가 기자의 인솔하에 다시 요서지역에 이르러 요하지역을 중심으로 조선후국(朝鮮侯國)문화 형성 주장.
 
2) 「殷人的起源地與孤竹國(은의 기원지와 고죽국)」
이 글에선 기자의 동천(東遷)은 상의 옛 땅으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하며, 은의 기원지와 고죽국의 실체를 살피고,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가기 이전, 동북지역과 은의 연관성을 강조함.
 
3) 「殷周遼西土着與客籍居民(은·주시기 요서지역 토착민과 이주민)」 : 은·주 교체시기 동북지역 토착민과 이주민 집단에 대한 고찰, 기자가 동천 가능한 문화적 기반 설명, 중국문명의 발원지의 하나로서 요서지역 중요성 강조, 기자가 이주한 지역은 요서지역임, 이주한 곳은 고죽국 지역이며 은문화의 발원지이며, 은·주교체기에 은의 유민이 이주하여 거주함.
 
4) 「箕子史略稽實(기자관련 사료의 검토)」 : 기자관련 사료를 검토하고 재해석하여 ‘기자부정론’을 비판.
 
5) 「箕子與洪範的硏究(기자와 홍범 연구)」 : 기자가 지은 홍범을 동해 기자의 사상과 행적이 일치한 점을 강조.
 
6) 「箕子八條之敎的硏究(기자의 ‘팔조지교(八條之敎)’에 대한 연구)」
기자가 만들었다는 ‘팔조금법’의 시행으로 ‘예맥에 땅’에 불과한 동북지역이 문명지로 도약하였으며, 기후국(箕侯國)과 후대 조선후국(朝鮮侯國) 사회의 기반이 됨.
 
7) 「燕亳與箕器銘文考釋(연박지역과 기기(箕器) 명문에 대한 해석)」
‘연박(燕亳)’의 지리적 위치의 확인과 청동기 ‘기기(箕器)’ 명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해 문화권의 존재 입증.
 
8) 「從箕器談箕與朝鮮東遷及史源問題(기기(箕器)를 통해 살펴본 기(箕)와 조선의 동천 및 그 역사적 연원 문제)」 : 동북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문헌기록의 연관성과 기자동천 및 연원의 문제.
 
9) 「從東北靑銅短劍看朝鮮侯國(동북비파형 청동검을 통해 본 조선후국)」 : 중원청동기와 예제(禮制)문명이 동북으로 전파되어 ‘현지화’ 되어 동북청동기 문화는 조선후국 문화임. 청동단검과 조선후국 문화유적이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기후국(箕侯國)의 국명이 후대에 조선후국(朝鮮侯國)으로 변경되어 중원왕조의 열후(列侯)가 됨. 동북청동단검 문화는 지방정권인 조선후국의 문화이며 중국문화에 대한 모방.
 
10) 「從政體看箕與朝鮮的歸屬(정치구조를 통해 본 조선의 귀속문제)」 : 기국(箕國)과 후대의 조선후국(朝鮮侯國)은 중국의 체제에 편제된 중국사의 범주임.
 
11) 「燕至漢初的‘遼東外徼’與古民族考略(연(燕)에서 한(漢)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요동외요(遼東外徼)’의 실체와 고대민족에 대한 고찰)」
연(燕)에서 한(漢) 초기 ‘요동외요(遼東外徼)’ 지역의 구성, 주민, 장성체계와의 연관성 문제 검토.
 
 

2. 2, 『기자평전(箕子評傳)』

 
인물전기 형식으로 구성되고 기자에 대한 상고시대 사상가로 집중 다루었고, 변방인 조선의 교화(개척)의 공적을 부각시켜 ‘기자조선설’의 강조에 기여함, 기자조선을 한국의 역사로 인식함, 은의 멸망 전 조선으로 갔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은의 멸망 후 동이의 지역인 한반도로 건너갔다고 봄. 기자의 도착 위치는 평양설을 주장하며, 기자가 고조선 민족에 융합되었다는 입장.
 
 

3. 3. 『기자조선사화(箕子朝鮮史話)』

 
이 책은 중국학계의 여러 주장들의 요지를 소개하고 있지만, 논리나 학술적인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논리의 허구성과 취약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고구리(고구려), 발해, 부여에 이은 고조선 영유권 주장이 주 의도임, 한국의 기자인식에 대한 괴리 지적,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이며, 평양의 기자릉, 여지승람에 기록된 ‘기자동천’ 사진, 산동성 기자묘, 객좌현 출토 청동예기 사진과 도판을 싣고 있다. 30개장으로 6장까지는 기자동천 기록과 은의 선주민 문화인 홍산문화를 소개함. 10장까지는 기자의 도착에 대한 낙랑군설, 압록강설, 요서설을 소개하나 저자는 요서의 고죽국과 기국(箕國)의 연관성을 언급하여 ‘요서설’에 비중을 두고 있음. 대릉하 지역의 기기(箕器)와 청동예기를 언급함. 기자가 조선에 갔다고 주장.
 
11장부터 21장까지는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기후국과의 관련성과 단군 실존여부 논쟁을 소개함. 기자의 행적과 사상을 소개하면서 ‘중국문화사상 제일인자’로 칭송함. 기자의 중원문명 전파와 평양의 기자릉 및 제사시설을 소개함. 22장에서 27장까지는 ‘기(箕),수(宿)’의 전통적인 별자리 명칭과 기자의 후손이 왕을 칭하는 전국시대, 연과의 충돌, 위만의 왕위 찬탈,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 등 역사를 개관함. 연(燕)과의 충돌에서 요동과 한반도 지역을 상실하여 연의 세력이 한반도 북부까지 이름. 근거는 연의 명도전의 대량 발견을 들고 있음. 위만의 정체성 문제로 남북한은 조선인으로 보나 중국학계는 연(燕)인으로 보고 위만조선은 한인(漢人) 중심의 다민족국가이며, 한(漢)의 요동태수 관할지에 예속된 중국의 지방정권임.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는 한반도의 한화(漢化)를 가속화시킴.
 
28~30장은 기자 집단의 혈연계승과 한·중 양국의 고조선 영유권 문제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귀속문제에 대한 양국의 인식차이를 소개하면서 중국 귀속논리의 정당성을 주장함. 그 근거로는 기자의 분봉 기록 및 조공책봉체계를 제시함. 특히 수·당이 고구리 침공의 정당화를 위해 표방한 ‘고중국지(故中國地)’를 주장하면서 기자조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함. 마지막으로 기자의 조선 도착 여부와 남북한의 ‘기자부정론’은 전통시대의 인식에 위배됨을 주장. 중국 동부 연해지역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이며, 한자(漢字)도 한국인이 창제하고 공자도 한국인이라는 재야학자 주장을 언급하면서 그 황당함을 비판함.
 
 

4. 4. 『동북고족고국고문화연구(東北古族古國古文化硏究)』

기자관련 논문 8편이 수록됨, 이 저서는 기자조선을 중국문화를 토대로 건립된 지방정권이며, 중심지역은 평양설을 취하면서 기자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제한하려고 한다. 고조선 문화로 인식되어 온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 문화를 북방초원지대 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등 고고학 상식에 어긋나는 추론을 거듭하였으며, 기자조선의 귀속문제를 지리적 위치와 자체 문화가 아닌 새로운 문화를 전래한 집단의 정체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1) 「朝鮮箕氏考(조선기씨고)」에서는 갈석(碣石), 패수(浿水), 번한(番汗)등의 지리적 핵심 위치가 한반도 중부지역에 위치 비정, 기자조선의 실재 역설,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청동기와 고인돌, 토기 등은 은문화의 영향.
 
2) 「箕子探硏(기자연구)」에서는 기자부정론은 옳지 않으며, 요서에서 발견된 청동예기의 금문 분석을 통해 기후(㠱侯)집단은 기자와는 별개 존재이며, 장박천의 요서설을 부정함. 기자는 은·주교체기에 조선에 이르렀고, 주 무왕이 그를 제후로 봉했고 기자는 중앙정권에 조공하였다. 기자는 은상(殷商)문화의 대표자이므로 그가 건립한 국가 역시 중화문화의 한 갈래로서 고조선 문화의 시초가 된다.
 
3) 「周易中的箕子(주역에 등장하는 기자)」에서는 『역경(易經)』의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는 기자가 조선에 이주한 사실을 기록한 가장 이른 문헌 자료로 ‘명이(明夷)’는 동방의 일출지역인 한반도를 지칭함.
 
4) 「箕子洪範的文化해설(기자가 지은 홍범에 대한 문화적 해설)」에는 『서경(書經)』 홍범편의 진위 여부 검토로 그 진실성을 주장하고, 중국문화사상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기자조선의 문화도 중국문화의 범주임.
 
5) 「箕子朝鮮與‘君子國’(기자조선과 군자국)」에서는 공자가 ‘군자거지(君子居之)’라고 한 ‘군자국(君子國)’은 고조선이며, 기자가 은(殷)문화를 토대로 문명권을 형성하였으며, 홍범의 사상을 조선에 시행했다는 ‘팔조지교(八條之敎)’를 비교하여 양자의 연관성을 부각함. ‘군자국(君子國)’의 위치는 조선반도이며, 列水(열수‧지금의 재령강 비정) 이북지역은 중화문화권으로 구획됨. 기자가 특유의 군자국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이는 한반도 문화의 기반이 됨.
 
6) 「箕子與㠱侯史事考索(기자와 기후(㠱侯)에 관한 역사 사실 고찰)」에서는 기자집단과 기후(㠱侯)와는 별개이며, 1973년 객좌현 북동촌 출토된 ‘기후아오(㠱侯亞吳)’ 명문 청동예기는 기자조선의 위치가 요서지역으로 비정하는 근거로 이해되었으나, 저자는 이를 기자가 아닌 별도의 기후(㠱侯)의 유물로 보고 가자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주장함.
 
7) 「箕子朝鮮晩期史事考索(기자조선 후기 역사 사실 고찰)」에서는 기자조선 후기 연(燕)·진(秦)과의 관계 및 위만의 찬탈 등 역사사실과 연과의 충돌 결과 연 세력이 만번한(滿番汗:청천강 비정)까지 진출하였으며, 심지어 패수(浿水:대동강 비정) 서부지역까지 세력권이었음을 주장함, 그 근거로 문헌자료와 북한 경내에 발견된 연장성(燕長城) 유적과 명도전 등 출토 유물을 제시함. 기자조선은 주(周)·진(秦)·한(漢) 역사 전개에 중요 역할을 했기에 중화사(中華史)의 중요한 구성부분임.
 
8) 「古朝鮮硏究中的誤區(고조선연구의 오류)」에서는 ‘요서설’과 ‘이동설’ 비판과 ‘기자조선 부정설’을 비판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역사를 한국(조선)의 역사로 볼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중국사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 즉 기씨조선, 위만조선, 낙랑군 문화 및 고구리, 발해 등은 중국의 지방정권이며, 마땅히 중국 동북사의 범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거로는 기씨조선은 은(殷) 족속이고 주(周)의 책봉을 받았으며, 화하(華夏)문화를 수용하고 있기에 중국사의 범주이다. 한(漢)과 위만조선의 전쟁은 중원왕조와 외신(外臣) 즉 지방정권과의 충돌이며, 당과 고구리의 충돌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유독 남부의 삼한(三韓)만이 중국과 다른 정치집단이다.
 
현재의 국경을 고대사의 귀속문제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고구리의 도읍이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해서 고대 정권의 속성이 중국사에서 한국사(조선사)로 바뀐다고 볼 수 없으며, 고구리는 지속적으로 중국문화의 한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주체민족, 문화연원, 정권의 성격 등 요소를 통해 한 정권의 귀속문제를 판단해야 한다. 기자조선의 경우는 은(殷) 유이민 집단이 주체이며, 문화상으로 은(殷) 문화를 계승하였기에 중국 동북사의 범주에 넣어야 타당하다.
 
청동단검 문화의 기원에 관한 기씨조선후국설을 비판하고 동호(東胡)문화가 주변 집단으로 전파 및 변형된 형태라는 것이다. 즉 청동단검의 분포지역이 아주 넓게 나타나기 때문에 특정집단의 유물로 보기 어려우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유사유물과 비교해보면 산융-동호 지역에서 기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 5, 『중국동북강역연구(中國東北疆域硏究)』

 
이 저서는 기자(箕子)와 관련된 역사 문헌 중 왜곡된 후기 기록에 근거하여 기자조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중화주의(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핵심부-주변부 이론을 적용하여 기자조선은 물론 발해까지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하고 있다.
 
한 장(제4장)을 「箕子朝鮮-東北疆域史的開端(기자조선-동북변방역사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기자조선의 강역과 귀속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 머리에 ‘기자조선은 서기전 11세기 한반도 한강 이북에 건립된 중화(中華) 지방정권으로서 그의 출현은 동북고대강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제1절의 「箕子朝鮮的政權性質(기자조선정권의 성격)」에서는 서주 초기에 기자가 은의 백성을 데리고 한강 이북의 은의 동방 속지(屬地)인 진국(辰國)에 이르러 기자조선을 건립하였으며, 주(周)의 분봉을 수용하고 칭신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기자가 주(周)에 입조한 사실이 서주시기 갑골문에서 확인된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은 민족적으로 화하(華夏)족이고 주(周)·진(秦) 시기에 한반도에 위치한 지방정권이었으며, 문화상으로 은(殷)-한(漢) 문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제2절, 「箕子朝鮮的疆域(기자조선의 강역)」에서는 연장성(燕長城)의 동쪽 시작 지점을 평안북도로 보고, 연(燕)과의 투쟁에서 실패하여 연(燕) 세력이 한반도로 본격 진출하였음을 주장한다. 후대 발해 역시 중국의 지방정권이므로 7~10세기 중엽까지 중국과 조선(신라)의 변경은 재령강, 예성강, 임진강 일대라고 한다. 제3절, 「衛氏朝鮮的疆域(위씨조선의 강역)」에서는 위만조선은 연 출신 지도자와 중원 유민이 건국하였기에, 기자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며, 전성기에는 요동군 동부지역에 이르렀고, 남쪽은 한강 이북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4편은 다음에 계속)
고조선(古朝鮮) 기자 조선(箕子朝鮮) 동북공정(東北工程)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중국학계의 기자조선의 진실에 대한 왜곡 실상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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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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