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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2021.08.05. 11:00) 
◈ 북옥저(北沃沮) - 1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주몽왕이 졸본(卒本)에 서울하고 고구려나라를 세워서, 나라이 팽창하고 백성이 은성하여, 동방의 대국의 기초를 쌓아 나가기 십 년, 그 십 년째 되는 해에 고구려나라는 한번 크게 움직였다.
북옥저(北沃沮) - 1
 
 
주몽왕이 졸본(卒本)에 서울하고 고구려나라를 세워서, 나라이 팽창하고 백성이 은성하여, 동방의 대국의 기초를 쌓아 나가기 십 년, 그 십 년째 되는 해에 고구려나라는 한번 크게 움직였다.
 
그 해에, 왕대(王臺)에 봉황〔鸞(난)〕이 와서 춤추고, 하늘에는 오색 서운(瑞雲)이 돌고,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는 징조가 연해 나타났다.
 
온 백성들은, 이 서조(瑞兆)를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련다고 모두들 기다렸다. 흥하는 나라요, 따라서 무슨 좋은 일이 늘 하늘에서 내린다고 굳게 믿고 있는 고구려라, 무슨 유다른 일을 만나면, 이는 좋은 일이 생기려는 하늘의 징조라고 단정하여 버리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그 여름, 주몽왕은 북옥저(北沃沮) 복멸의 원정(遠征)을 분부하였다.
 
사 년 전 행인(荇人)을 복멸할 때에, 서울 유수장(留守將)으로 남아있게 되어 울분해 하는 마리(摩離)를 이번 도원수로 부위 염(扶尉厭)을 군사(軍師)로 하여, 삼만 대군을 이끌고 정도에 오르게 하였다.
 
북옥저는 그 백성은 무론 단군 백성이다. 지나인의 교란으로 단군 왕권(王權) 쇠미했을 때에, 모국을 배반하고 따로이 딴 살림을 한 지 수 백년, 인제는 단 지방으로서의 기초도 튼튼히 잡혔거니와 모국과는 태산 준령이 가운데 끼여 격절되고, 도리어 낙랑(지나인의 식민지인)과의 거래가 많았고, 땅이 기름지고 해산물이 풍족하여 꽤 가멸고 넓은 지역이었다.
 
 
고구려에서 거리도 멀거니와, 딴 살림한 지도 오랬고, 게다가 가면 지방이라, 이전의 군소(群小) 국가들처럼 홑볼 지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북옥저에서는 고구려의 흥기와 팽창에 겁을 내어, 책을 수리하고 무기를 충실히 하고, 낙랑과 더욱 깊이 맺는 등, 경계를 게을리지 않아서, 좀체의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동방의 통일과, 단군 백성 총규합을 목표로 하는 고구려로서는, 이 넓은 지역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주몽왕은, 나라의 실력을 기르면서 가만히 기회만 엿보고 있던 것이었다.
 
조용히 힘만 기르기 십 년, 인제는 힘도 넉넉히 찼다. 게다가 금년에 생긴 여러가지의 길조(吉兆)로써 온 백성이 무슨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희망에 불붙는 이 기회에, 큰 일을 결행하려는 것이었다.
 
이 나라― 아니, 이 종족의 가장 큰 축제일인 시월 초사흗날, 고구려의 대군은 정도(征途)에 오르기로 날을 잡았다.
 
수만 석의 양곡이며, 수천 바리의 화살이며, 모든 치중(輜重)은, 여러 길로 나누여서, 국경까지 운반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해〔太陽(태양)〕를 도안화(圖案化) 하여 제정한 이 나라 국기와, 마리 장군의 장군기(將軍旗) 는, 바람에 펄럭이며 승리를 예언하는 듯 온 백성과 군졸의 의기를 돋구었다.
 
옥저는 고구려보다 남쪽 지방이요, 동쪽으로는 바다를 안았다. 그 새 수백 년간, 안온한 생활을 한 전통을 가졌다. 그러니만치 어려움과 추위에 견디는 힘이 고구려에 비길 바 아니었다.
 
고구려는 나라이 북국 산간이요, 곡식의 산출이 부족하여, 절식(節食)에 단련되었고, 게다가 군사적 맹훈련을 겪는 백성이라, 웬만한 어려운 일을 어려이 여기지도 않는 민족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주몽왕은 바야흐로 엄동을 앞둔 시월에 동원을 한 것이었다.
 
소라성 우렁차게 삼만 대군이 졸본 서울을 떠날 때, 주몽왕은 홀로 이 시조묘(始祖廟 ― 단군묘)에 꿇어 엎드려 하늘께 기도드리고 있었다.
 
"하늘! 지금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아이들이 길을 떠납니다. 도우소서. 도와주소서. 소자를 위함이 아니오라 동방 천만 백성을 위함이로소이다. 동방 천만 백성이 자리를 같이하여 즐길 나라를 만들고자 함이로소이다. 이 백성을 어여삐 보아주소서."
 
주몽왕은 기도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서, 왕후 처소로 들었다.
 
 
왕후 처소에 들어 보니, 소서노 왕후의 안색이 예사롭지 못하고 약간의 흥분된 기색이 있다.
 
"왜 안색이 좋지 못하오? 무슨 일이 생겼소?"
 
주몽왕은 자리잡아 앉으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읍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나 ― 그리고 없었다는 듯이 태도지으려 하나, 분명 예사롭지 못하였다. 십 년간을 부부 생활을 해 온 주몽왕으로서 그맛 눈치 못 알아볼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료. 마음 언짢은 일이 있거든 펴놓고 서로 의논합시다. 오늘 큰 일을 차리려는 경사로운 날에, 역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소? 서로 감춤없이 의논합시다."
 
"나랏님, 제 동생에게 비상을 주었읍니다. 벌(罰)을 받으라고…."
 
"?"
 
소서노 왕후의 동생되는 여인이 일찌기 홀몸 되어 대궐에 몸을 의탁하고, 형님 왕후의 아드님인 두 왕자를 보육하며 있었다. 그 과부 동생에게 왕후는 비상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비상을 내려주단, 즉 사사(賜死)를 뜻함으로서 ‘죽기를’을 명하였다는 것이다.
 
왕후와 그 동생 형제간의 의는 유달리 좋았다. 더우기 홀몸 되어 대궐에 기탁하고 있는 신세를 가긍히 여기어서, 왕후는 늘 동생에게 후하였다. 그 사랑하던 동생에게 왕후가 죽음을 명하였다 하니 동생이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왕후로서는 큰 용단이었다.
 
사랑하던 동생에게 죽음을 분부하였으니, 분부하기도 가슴 아픈 일일 것이요, 죽음을 분부치 않을 수 없을 만한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도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단 하나의 동생에게 죽기를 명하였을까.
 
"그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좀 웬만한 일 같으면 눈감아 넘겨 보시구료. 대체 무슨 실수가 있었소?"
 
"나랏님께 아뢸 바 아니옵니다."
 
"내가, 크게 보자면 임금이요 작게 보자면 지아비이니, 나라에 대한 실수든 집안에 대한 실수든 어찌 무심하겠소? 말해 보시오. 더우기 당신이 비상을 주고도 그렇듯 심사 불평해 하니 어찌 무심하겠소?"
 
"……."
 
"시비를 불러서 문초해 알아볼까 ―?"
 
"…."
 
 
주몽왕은 두 번 세 번 왕후에게 곡절을 물었다. 그리하여 겨우 그 곡절을 알았다.
 
왕후의 동생되는 이는, 두 왕자를 보육하고 있느니만치 ― 더우기 그 신분이 과부이니만치, 젊고 넘치는 과부로서의 정열과 애정을 죄 두 조카(왕자)에게 붓고 있었다.
 
두 왕자가 지금은 아무 불만도 모르고 고이고이 자라지만, 두 왕자에게는 배다른 형이 있다. 그 형이 현재는 먼 딴 나라에 있지만 장차 이리로 오게 되면, 무론 이 나라의 태자로 책봉되고 장차에는 임금으로까지 될 것이다.
 
배다른 형이 임금이 되면, 배다른 동생들의 신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근심되고 마음에 걸려서, 늘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는 거기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였다.
 
베다른 형제가 모일 때에, 무슨 마음의 티각태각이 안 생기도록 이 점을 매우 삼가는 소서노 왕후는, 과부 동생이 조카들을 데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어서, 동생에게 늘 주의시키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오늘은 그 동생이 조카들과 의붓 형제의 새를 이간 붙이는듯 한 말을 하고, 역모(逆謀)를 교사하는 듯한 말까지 하는 것을 왕후가 지나다가 귓결에 들었다.
 
이것은 그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되는 왕후가 여러 번 주의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같은 암시까지 하는 것은 유유한 문제이다. 이 나라의 만년지계를 위하여, 왕후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었다. 그런 나쁜 교사자를 제거하여, 왕자들의 마음에 못된 생각 들지 않도록― 나아가서는 이 본보기로써 다른 궁인들도 경계할 겸하여, 왕후는 이 처분을 한 것이었다.
 
주몽왕은 왕후의 심모원려에 참 마음으로 감격하였다.
 
"지금쯤은 그 약을 먹었겠소?"
 
"한 각경쯤 지났으니까 먹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아직 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처분 거두시지 마세요. 후인의 본보기로―."
 
"안 거두겠소. 입 가벼운 사람에게의 본보기로, 왕후의 동생일지라도, 쓸데없이 입 가벼이 놀렸다가는 이런 일 겪는다고 알리기도 할 겸, 두 아이(왕자)에게도 이 뜻 마음에 아로새기게 하도록…."
 
주몽왕은 두 왕자를 이리로 불러 오라고 하였다.
 
그 왕자(아홉 살과 일곱 살이었다)에게, 어머님 왕후가 이모에게 내린 처분을 들려주고, 장차 부여땅에서 맏형이 올지라도, 언제까지든 이 어머님의 정신을 저버리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말도록 훈계하였다.
 
두 어린 왕자는 맹서하여, 이 정신 저버리지 않기를 약속하였다.
 
 

 
삼만의 원정군은 본국을 떠나서 북옥저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태산을 넘고 준령을 넘고, 내내 험한 길이었다.
 
금년따라 눈〔雪(설)〕이 일찍 내려서, 이 원정군이 고국 국경을 넘어서자 한 자에 가까운 큰 눈이 천하를 덮어, 사람의 세상은 백설아래 잠겼다.
 
등성이가 어딘지 골짜기가 어딘지 분간키 조차 힘든, 길도 없는 산골로 삼만의 원정군과, 거기 못지 않은 치중은 동으로 동으로 진군하였다.
 
본국부터의 향도자와 북옥저의 향도자를 합하여 사오십 명이 넘는 향도자가 머리를 모으고 의논하였지만, 깊은 눈에 덮인 천지에서 길을 찾아 낼 수가 없어서, 종군하는 일자(日者)의 지도만 좇아서, 방향만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어찌어찌하여 길을 얻어 만나 그 길로 하여 나아가면, 산간의 옥저 부락도 만난다.
 
연락졸(連絡卒)이 꽤 많았다. 이 연락졸의 임무는 끊임없이 본국 임금께 그날그날의 상태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길도 없는 산골을 진군하지만, 본국과의 새에는 연락졸로써 길이 생기고 정보가 교환된다.
 
눈에 덮인 천하이라, 아무 별다른 일 생기지 않고, 맹수도 있으련만 이대군에 질겁해서 굴에 숨어 나지 않고, 어쩌다가 옥저인(沃沮人)의 부락 이거나 성이거나를 만나서, 그를 쳐서 항복받는 것이 유일의 흥미요 행사였다.
 
성이나 부락을 만나서 이를 항복받으면, 그 성이나 부락의 백성을 삼분 일쯤을 고구려 본국으로 옮기고, 그만한 인원을 본국에서 갖다가 메우고, 주몽왕의 이름으로 그 지방을 고구려의 군현(郡縣)으로 고치고 그 지방의 치자(治者)를 고구려의 지방 태수로 임명하고 ― 이런 선무(宣撫) 와 동화(同化) 방침을 써 나아갔다.
 
민족이 근복적으로 다른 바가 아니요, 역시 단군 왕검을 국조(國祖)로 우러르는 백성들이라, 단군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의 나라이라는데 끝끝내 반항할 까닭이 없었다.
 
북옥저에 붙어서 옥저의 이름으로 세도하던 사람들은 그 세도를 잃기 싫어 버둥거릴지 모르나, 마리 장군과 부위염 군사는 잘 의논하여 그 위인을 보아서, 쓸만한 사람이면 그냥 눌러 주몽왕의 이름으로 본시의 지위를 계속하여 누리게 하는지라, 민심상 추호만한 흔들림도 없이, 선무 공작은 성공하였다. 일단 이번 원정군에게 정복된 지역은 진심으로 고구려에 돌아붙고 하였다.
 
이렇듯 옥저의 부락들을 선무하면서 진군하여 산간 지대를 지나서 옥저의 평원에 나서게 되었다. 평원에 나서면서, 비로소 길을 잘못 온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지나쳐서 동쪽으로 왔다. 도로 서쪽으로 좀 돌아가야 되겠다. 북옥저 서울은 도로 서쪽으로 돌아서 험준한 산곡간에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빼앗는 것이 전쟁의 목표라, 옥저를 복멸하기 위해서는,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야 되게 되었다.
 
다시 돌아서려 하다가, 이 원정군은 이번 길 떠난 이래의 처음의 저항 ― 반격을 받았다. 꽤 큰 도시였다. 여기서 지나 계통의 전법(戰法) 으로써의 저항을 받았다.
 
고구려가 지금껏 이웃 나라를 정벌할 때에 쓴 전법은 아류(我流)였다.
 
그 상대한 나라들이 모두 약소 국가라, 병술(兵術)이라 무엇이라 할 것이 없이 들이치고 할 뿐이었다. 그런데 옥저땅에서는, 지나 계통의 무던히 발달되고 훈련된 진(陣)법이라 전법으로써의 저항을 받았다.
 
이 지역도 본시 단군조선의 지역이다. 단군을 밀어 내고 자기네가 대신 들어앉았노라고 자신하는 지나인은, 옥저 지대도 본시는 단군조선의 한 귀퉁이요 따라서 기자조선, 그 뒤는 위만조선, 현재는 한(漢)의 식민지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있다. 그 지역의 백성이 단군 백성이요, 언어 풍속 신앙이 단군조선의 것을 그대로 절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 계통의 관부(官府)에서 행정에도 용훼 간섭하고, 관리 임명에도 낙랑(지나 정부의 조선 총독부격)에서 꽤 간섭한다.
 
그런 살림을 수백 년 하는 동안에, 지나 색채가 꽤 농후하게 침염되어 있었다.
 
지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어지러운 시대를 겪고 권모술수(權謀術數)도 꽤 발달되어 있는 나라이었다. 고구려의 정벌에 대하여 옥저는 지나식의 지혜를 여기 가져다 썼다.
 
순후하고 정직하고 오직 굳센 실력만으로 옥저땅에 들어선 고구려는, 여기서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전법의 저항을 받은 것이다.
 
성하(城下)에 이르러, 도원수 마리 장군은 예에 의지하여, 소라(나팔)를 입에 대고 큰 소리로,
 
"하늘의 아들 하백의 외손 고주몽님의 나라 고구려의 우두머리 장수 마리 장군이 생쥐새끼같은 너희들을 도륙하러 왔다. 성 안에도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겨루어 보자."
 
고 고함쳤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잠긴 채, 성 안에는 생쥐새끼도 없는 듯,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마리 장군은 막료 몇 명을 데리고 말을 타고, 성을 몇 바퀴 돌면서 같은 말을 고함쳤다. 성이 공성(空城)이 아닌 증거로는, 장군 일행을 향하여 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뿐, 역시 다른 반응은 없었다.
 
밤에야 비로소 두 군사는 마주쳤다. 그 첫 싸움에서 시작하여, 이튿날 또 몇 번 또 이튿날 몇 번, 두 군사의 새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이 충돌에서, 고구려군은, 그 적은 옥저군과 싸움에 매번 난전을 하였다. 기괴한 진(陳)법, 기습, 야습, 매복, 포위, 위패주(僞敗走) 등등, 지금껏 고구려가 마주 싸워 본 전쟁에서는 일찍 보지 못한 전법을 이용하여, 적은 군사로써 고구려군을 시달렸다.
 
고구려군은 강한 압력으로써 결국은 이기고 하였지만, 옥저군의 이 술책은 진실로 성가시고 귀찮았다. 그러다가 옥저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성안으로 도망 들어가 숨어 버리고 성문은 굳게 닫아 버린다.
 
이런 싸움을 몇 번 해 본 뒤에는, 옥저군은 죄 성 안에 숨어서 활질만 하고 다시 나지 않았다.
 
고구려군 지휘장 마리 장군의 가죽과 구리로 만든 투구며 갑옷은 용하게 그 살을 모두 튀기어 버렸다.
 
그러나 옥저군은 성 안에 숨어 다시는 나오지 않아, 고구려군으로서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숨어서 살을 쏘는 뿐,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건국 이래 지금껏 겪은 전쟁에서는, 이렇듯 싸움을 돋구면 으레히 적은 나와 싸웠다. 이렇게 성문을 굳게 닫고 숨어서 살만 날려 보내는 전쟁은 겪어 보지 못했다. 비록 반드시 질 줄 ― 전멸당할 줄 알면서도, 상대측에서 싸움을 돋구면 으례히 맞아 싸워야 한다. 이것이 지금껏 경험한 고구려의 전쟁 도덕이요, 단군 백성의 전쟁 도덕이었다.
 
몇 번 싸움을 돋구어 보다가 아무 반응도 없으므로, 마리 장군은 군사(軍師) 부위염과 그 대책을 의논하였다.
 
"싱거운 놈들이구료."
 
 
"하, 참."
 
"그런 싱거운 놈들이 어디 있담."
 
"아마 놈들은, 성이 튼튼한 걸 믿고, 저희네가 그냥 안나오면, 우리가 물러 갈 줄 알고 하는 노릇이겠지요."
 
"저 성을 허물 수는 없고 ― 정 놈들이 안나오면 하기는 도로 갈 밖에 없기는 하오이다마는…."
 
이런 때에 좋은 꾀를 베풀어야 할 책임을 띤 부위염이로되, 무슨 꾀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하루 이틀 지내 봅시다."
 
싸움을 돋구어도 나오지 않고 이 날도 벌써 저녁도 가까왔으니 오늘은 또 여기서 야영할 밖에는 없었다. 엄동에도 노숙(露宿)할 수 있도록 단련된 고구려 군사는 성을 포위한 채 저녁을 지어 먹고 그 밤도 노숙을 하기로 하였다.
 
그 저녁, 또 그 이튿날, 또 이튿날 ― 이렇게 나흘을 지냈다. 그러나 성문은 그냥 굳게 잠긴 채 사람 하나 얼씬치 않는다. 고구려의 삼만 군은 클클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나흘 뒤 하릴 없이 퇴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하려다가, 군사 부위염이 문득 마리 장군의 곁으로 왔다.
 
"장군님."
 
"?"
 
"물러가는 ‘체’만 해보면 어떠리까. 물러가는 체하면 혹은 놈들이 우리 뒤를 쫓아 안 올까요?"
 
장군은 머리를 가슴에 묻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무위히 물러간다 하면, 군졸들에게 대해서나 장차 귀국해서 임금께 대해서나 면목이 없다.
 
그러나 성문 닫고 나오지 않는 적을 어찌하랴.
 
부위염 군사의 말을 따라서, 물러가는 체하면 혹은 적은 우리 뒤를 쫓을지도 알 수 없다.
 
"참 그래 봅시다. 그렇게 하자면서 생각해 보니, 또 우리 군졸 몇 백 명을 성문 밖에 꼭 숨어 있게 했다가, 저놈들이 문을 열면, 일변 그리로 쫓아 들어가서 무찌르면 어떻겠소?"
 
"참 좋은 꾀입니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그들에게는 이맛 것이 아주 귀신의 꾀같이 보였다.
 
날래고 힘센 군졸 이백 명은 딱 성문 밖에 기어가서 매복하였다.
 
목소리 큰 막료 한 사람은 갑옷 튼튼하게 차리고, 말 타고 성 밖을 돌며 성 안을 향하여 꾸짖었다.
 
"이 더럽고 겁 많은 놈들 같으니. 그래 종내 싸우자고 나오는 놈이 없단 말이냐. 너희 같은 놈들과 헛 세월 보낼 수 없어서 우리는 간다. 더러운 놈들!"
 
그러는 일방 차차 대오를 지어서 퇴각을 시작하였다.
 
마리 장군은 몸소 일지군(軍)을 인솔하고 성벽에 가서 붙어 숨어 있었다.
 
고구려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면 그때야 옥저군도 성문을 조금 열고, 병졸을 달려 보내서,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엄습하여, 고구려군을 큰 혼란 상태에 빠지게 하렬 것으로 알았다. 퇴각하는데도 그냥 성문을 굳게 닫고, 보기만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벽에 붙어 숨어 있는 마리 장군과 그 막료들은 이제나 이제나 성문이 열리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문은 그냥 닫긴 채, 간간 옥저사람들이 성 위에 올라가서 고구려의 퇴각을 구경하고 있는 듯 두련두련 사람의 소리만 간간 들렸다.
 
성벽에 붙어 숨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여 보매 성 위에 올라서서 고구려의 퇴각을 구경하고 하는 무리 가운데는, 무색 옷 입은 사람들도 적지 않게 섞이어 있었다.
 
지나인 ― 적어도 지나인을 본뜨려는 옥저사람들일시 분명하였다. 이 종족이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흰 옷을 안 입고, 지나인을 흉내내려는 무리들일 것이다.
 
마리 장군은 가슴에 치받치는 불쾌를 느꼈다. 고구려가 건국한 지 십년, 그 새 옛터를 회복하느라고 졸본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에는 끊임없이, 혹은 회유(誨諭), 혹은 토벌의 손을 뻗쳤다. 주몽왕 건국 이전부터의 동무로, 내내 주몽왕을 모신 마리 장군은 많이 보고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종족은 옷은 흰 옷밖에 안 입는다. 먼길을 간다든가, 무슨 경사스런 일을 할 때거나, 사냥에 나선다든가 하는 때 밖에는 무색 옷을 안 입는다. 그런 천성이요 습관이라 따라서, 이 종족이 세우는 도시는 반드시 강을 끼고 자리잡고, 부락 마을은 반드시 개천이나 시내 등을 끼고 만들어서, 빨래에 편리하도록 터잡는다.
 
이것은 주몽왕이 늘 막하들에게 들려주는 바이요, 마리 장군이 귀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들은 바이다.
 
이 옥저 지방도 흰 옷 입는 백성이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누런옷 푸른 옷 등의 무색 옷을 입은 백성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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