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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金蛙王) 동부여(東扶餘) 북옥저(北沃沮) # 유화부인
【역사소설】
(2021.08.09. 11:00) 
◈ 북옥저(北沃沮) - 3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고구려의 병졸들은 왁작하였다. 마리 장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옥저 큰서울을 도륙하겠다고 날뛰던 젊은이들이라, 싸움 없이 큰서울을 점령하고자 진군하자 할 때에 부르쥐었던 주먹힘 처치치 못하여 두선거렸다.
북옥저(北沃沮) - 3
 
 
고구려의 병졸들은 왁작하였다. 마리 장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옥저 큰서울을 도륙하겠다고 날뛰던 젊은이들이라, 싸움 없이 큰서울을 점령하고자 진군하자 할 때에 부르쥐었던 주먹힘 처치치 못하여 두선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신왕(神王)이라고 애모하는 주몽왕이 이 삼만 군을 친솔하고 행군한다 하는데, 그들은 이 광영에 춤추었다.
 
고구려가 건국하여 우금 십 년에, 주몽왕이 몸소 싸움터에 나서서 용군한 일이 없었다. 매번 막하 장군들을 보내어서 정벌하였지, 임금은 제일선에 나서 보지 않았다. 임금이 친솔한다 하는 것은 고구려 생긴 이래의 처음 일이다. 게다가, 오이와 합부의 두 장군도 참가하여 ― 이것은 고구려나라의무력 방면 수뇌의 총규합이었다.
 
온 고구려병에게는 몸둘 곳을 모르도록 황공하고 감격적인 행군이었다.
 
버금서울을 떠나서 큰서울로 가는 길, 그들의 엄격한 군규도 잊고, 임금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하고자, 대오(隊伍)를 잃고, 임금께 집중하였다.
 
임금은 당신을 이렇듯 애모하는 병졸들의 적심을 알아 주어서 병졸들에게 간간 이야기도 던지며 행군하였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약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옥저 큰서울에서는 혹은 버금서울의 복멸을 낙랑에 보고하고, 구원병이나 청하지 않았는지. 큰 서울에서는 무슨 꾀를 베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은지. 멋모르고 들어오는 우리를 맞아 잔멸하고자 온갖 준비를 다 하고 있지 않은지.
 
분부 듣고 큰서울로 달려간 버금서울 태수가 제대로 보고를 하였으면 ― 그리고 큰서울 태수가 총명한 사람일 것 같으면 우리에게 반항을 한다든가 잔꾀 쓴다든가 하는 일이 결국에 있어서는 아무 쓸데없는 일이며, 우리의 노염만 사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 혹은 지나인이 뒤에서 뚱기쳐서 무슨 딴 꾀 부리면, 우리에게도 약간의 희생이 생길 것이다. 이 점이 성가시었다. 누구 한 걸음 앞서 보내서, 그 점을 진맥해 보고 싶으나, 우리는 모두가 천성이 순후정직하여 아직 그런 일을 눈치 떠볼만한 약은 꾀 안생긴 백성이다.
 
큰서울은 험준한 산간에 두었는지라, 버금서울을 떠난 이튿날부터는 길은 차차 험한 산간으로 뚫렸다. 산간이라 딴 곁길 없이 단 한 가닥의 길이 큰 서울로의 길이었다.
 
여기 들어서면서, 주몽왕은 눈치 있음직한 병졸 이십여 명을 뽑아서, 한 걸음 앞서서 큰서울로 향하게 하였다. 큰서울로 가면서, 좌우(큰길 및 길 없는 골짜기)를 잘 살펴 혹은 적의 매복이나 없나 혹은 함정 같은 것이나 없나, 수상한 무엇이 없나 답사하고, 무슨 수상한 점이 보이거든 곧 돌아와서 본대에 보고하게 하고, 도중 초부(樵夫)든 누구든 사람을 만나거든 곧 붙들어서 이리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또, 샛길로 한 패를 떠나보내서, 먼저 큰서울로 가서 큰서울 기색이 불안 초조해 하는지, 혹은 태평한지를 엿보아 곧 이리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아무 탈 없이 복병도 만나지 않고, 이튿날 낮, 이 대군은 큰서울 가까이 까지 이르렀다. 세상이 백설이 덮여 흰 천지에서, 분명히 눈에 뜨일 복병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울의 기색을 탐지하러 갔던 패의 보고는, 혹은 불안초조해 하더라 하며 혹은 태연자약하더라 하여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기색은 불안한 가운데도 무엇을 기다리는 희망을 품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낙랑의 구원군은 없는 모양이었다.
 
성하 십리허에서, 주몽왕은 대군은 대오지오 정렬케 하여 뒤에 달고, 당신은 ‘흰미리’에 높이 앉아 막료 네 명을 곁에 달고, 입성(入城)의 체세를 갖추었다.
 
그때 큰서울 안에서는, 고구려 신왕(神王)을 맞고자 큰서울 태수와 그 의 동생(버금서울 태수)이 말을 나란히 하여 막료 몇을 데리고 나왔다.
 
형제 태수는,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차차 가까이 왔다. 주몽왕의 앞에까지 이르러서는, 한 무릎 꿇어 주몽왕께 절하였다.
 
흰 옷 입는 백성의 공통되는 경배법(한 무릎 꿇어 절하는 것)을 태수 형제에게서 발견하고, 종족의 전통은 벗지 못하는 태수 형제에게 얼마간 친애미를 느꼈다.
 
"애쓴다."
 
"여기까지 왕림하시기, 얼마나 고단하시오니까?"
 
"말에 오르거라. 길도 험한데."
 
그러나 형제 태수는 말에 오르지 않고 좌우 편에서 주몽왕을 모시고 차차 성으로 갔다. 곧 성하에 이르렀다.
 
그때 ‘씽’ 하니 살이 하나이 주몽왕을 향하여 날아왔다. 그 첫 살에 뒤 이어서, 연달아 십여 개가 날아왔다.
 
그러나 그 살은 하나도 주몽왕은 커녕 ‘흰미리’도 다치지 못하였다. 주몽왕이 말안장 곁에 상비해 둔 작은 칼을 어느 틈에 쥐었는지, 그 칼만이 공중에서, 반짝반짝 하는 가운데서, 살은 모두 촉이 잘려서 땅에 떨어졌다.
 
다시 날아오는 살이 없다고 본 뒤에, 주몽왕은 눈을 큰 태수에게 돌렸다.
 
"무슨 짓이냐."
 
의외의 변괴에 태수 형제는 덜썩 주저앉아 몸만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게 나를 맞는 대접이냐."
 
"소신들은 ―."
 
와들와들 떠는 가운데서 간신히 꺼내는 이 말과, 그들의 태도 표정 등으로, 주몽왕은 이 짓이 태수들의 지휘한 배 아니요 태수들에게도 의외의 변괴인 것을 알아채었다.
 
"너희들의 한 짓은 아니구나."
 
"― 소신들이 감히 ― 언감생심…."
 
"누구의 짓으로 짐작되느냐."
 
"소신들이 ―."
 
그냥 변명하려다가 생각난 듯 자기의 막료를 돌아보았다.
 
"누구의 짓 같으냐."
 
"알 수 없읍니다마는 혹은 낙랑인 ― 낙랑의 한노(漢奴)들의 짓이 아니 오리까 "
 
"옳아! 그러려니. 그놈들의 짓이로구나. 우리야 언감생심 신왕님께 ― 그래, 그래."
 
진범인이 발견되어 자기의 청백이 드러난 듯, 같은 소리를 중언 부언하는 이 곳 태수의 혼잣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주몽왕은 눈을 구을렸다.
 
"그래 나를 쏘려고? 내 몸에 한인 놈의 살이 박힐 듯 싶으냐. 괘씸한 놈들 같으니. 그래 얘들아, 이 큰서울에 한인놈들이 몇이나 있느냐."
 
태수 형제는 마주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좀 어색한 듯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
 
"소신의 적은이(버금서울 태수)가 이리로 와서 신왕님의 높으신 분부를 전하기 전에, 소신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옵고, 낙랑에 구원을 청하온 일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한인놈들의 병졸이 이곳에 사오백 명 왔었읍니다. 그 뒤 적은 이가 이리로 와서 신왕님의 높으신 분부 전하옵기, 그 분부에 좇으와 한인놈들을 도로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 했사옵더니, 그놈들은 신왕님의 면용이나마 한번 우러롭고 가겠다고 하옵기에, 그러라고 해 두었삽더니, 그 놈들이 이런 짓을 했사옵니다."
 
"너도 은근히 바랐지. 한인들이 나를 넘어뜨려 주기를?"
 
"천만에. 소신이 언감생심…."
 
"너도 보았거니와 내 몸에는 살이 박히지 않아. 공연한 짓 하다가 너의 아우 같은 꼴을 겪지 말아라."
 
"언감생심 ― 언감생심…."
 
자기네의 경애하는 임금에게 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성 안으로 엄살해 들어가려는 병졸들을 주몽왕은 달래어 멈추었다. 그리고, 이곳 형제 태수의 옹위하는 가운데서, 주몽왕과 그의 장졸은 위의당당히 옥저성 안에 들었다.
 
성 안에 있던 몇 백 명 한인은 이곳 토민들이 고구려병을 아남하여 다니며 일일이 지적하여 고스란히 잡았다. 포로로서 고구려의 종〔奴(노)〕이 되어, 장차 이번 종군한 병졸들에게 상으로 하사될 것이다.
 
한 개 종족에게는 종족으로서 흐르는 피가 있다. 수백 년간 치자(治者)의 야심으로 인한 다른 정치체제 아래서, 다른 지역으로 갈려 살던 옥저도 마치 기름에 섞는 기름처럼, 고구려에 섞이어 버렸다.
 
북옥저도 없어지고 고구려의 한 현(縣)으로 편입되었다. 그 태수는 역시 고구려의 한 다물(多勿) 태수로 임명되었다.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북옥저를 삼킨 주몽왕의 만족도 컸다.
 
옥저도 삼키고, 단군의 옛터로 아직 고구려의 왕권 아래 들지 않은 땅은, 정 보잘것 없는 몇 개 나라(나라라기보다 부락이었다)와 그리고는 부여와 낙랑과 및 낙랑을 지나서 더 남쪽에 있는 한(韓) 땅뿐, 그 나머지는 차례 고구려의 안에 포옹되었다.
 

 
동부여는 아직 금와왕(金蛙王)이 그 임금이다. 부여 지대는 본시 이 종족의 발상지(發祥地) 다. 부여 지역에서 처음 발상하여 약 이천 년간 동서남북으로 확대되었다가, 지나인(기자)의 침략을 받아 허리를 끊겨서 남쪽 지대는 남방에 남기고, 지나인의 팽창에 차차 압축되어, 본시의 발상지인 부여 땅을 중심삼고 현재같이 압축되었다. 그러나 부여의 왕실만은 지금껏 미력(微力)하나마 엄존한 관계상, 부여의 옛 구역 안에 이 종족으로 이룩되는 국가들은, 관례상 부여를 종국(宗國)으로 우러르고 부여에 조공(朝貢)하고 한다. 마치 지나를 중심으로 한 제후국(諸侯國)처럼.
 
고구려는 장차는 이 부여도 집어삼킬 것이지만, 아직은 힘도 모자라거니와, ‘종국’이라는 관념이 아직 남아서 그냥 둔다. 그러나 현재의 임금인 금와왕(주몽왕에게 은의도 있다)만 승하한 뒤에는 고구려는 용서없이 부여를 집어삼킬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건국의 주요 목표요 국시(國是)다.
 
낙랑― 낙랑은 무론 고구려의 가장 성난 철퇴가 내릴 곳이다. 나라 땅을 두 토막에 내고, 종족의 허리를 끊어, 종족의 적지 않은 수효를 남방에 격리한 지나인의 세력 구역 낙랑― 주민(住民)인 토민(土民)은 역시 흰 옷 입고, 해와 하늘과 바위를 절하며, 한 무릎 꿇어 경배하는 종족이지만, 치자(治者)인 지나인은 토민의 위에 임하여 이곳을 저희네 땅으로 여기고 더우기 지나 본국 정부(만 리 밖에 있는)에서까지 간섭한다. 지금 고구려의 힘이 아직 낙랑(전쟁 기술이 꽤 발달된)만 못하니 버려 두거니와, 이 고장은 뼈를 갈아서라도 내 손에 찾아야 할 지역이다. 더우기 이 낙랑 때문에 허리 끊겨 남방에 떨어진 지내는, 낙랑이 가운데 끼여 있기 때문에, 소식도 불분명하거니와 연락도 할 수 없다.
 
고구려나라만이 아니라, 종족을 위하여 때려부수지 않을 수 없는 땅이다.
 
그 낙랑에 격리되어 남방에 떨어진 한(韓) 땅. 이 종족이 지나인에게 허리를 끊겨 남방에 격절된 지역이다. 북방(이 종족 발상지를 중심삼은)과 남방의 중간에는 지나인의 침략 식민지인 낙랑이 끼고, 본국인 북방에서 멀리 격절된 남방 지역을 ‘한(韓)’이라 불렀다. 그 ‘한’이 마한 진한 변한〔馬(마), 辰(진), 弁韓(변한)〕의 삼한으로 갈리었다.
 
중간에 끼여 있는 낙랑 땅만 고구려가 엎으면, 그때는 고구려는, 한(韓) 땅(같은 피의 종족의 땅인)에 연접하게 된다. 한 땅 가운데 일부분인 마한 땅에도, 지나인(기자의 후손)이 가서 왕 노릇 한다 한다. 본시 단군의 옛 터를 모두 합쳐서 한 임금의 아래 넣고, 이 땅에서 딴 종족을 내쫓으려는 주몽왕의 이상이라, 이 땅 안 한귀퉁이에 지나인이 왕 노릇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바이다.
 
단군의 옛터에는 그 밖에 또 색채 다른 땅이 있다. 본시 하도 넓은 지역이라, 그 지역의 어떤 귀퉁이는, 오랜 세월을 거듭하는 동안에, 풍습과 언어가 원줄기와는 인제는 아주 딴판으로 달라진 지역이 있다. 그 지역은 언어 풍습이 달라지느니만치 딴살림을 하노라니, 자연 문화 정도도 달라져서 원 줄기와는 썩 뒤떨어진 문화 정도의 생활을 경영하고 있다.
 
숙신(肅愼), 그 뒤는 읍루(挹婁) 또는 말갈(靺鞨)이라고 불리는 종족이다.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뒷간과 거처실의 구별이 없으며, 원 줄기인 부여(및 그 계통 종족)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인 미개한 생활을 경영한다.
 
이 종족도 태고적 옛날은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라 하여, 주몽왕은 남같이 안 생각되어, 품안에 끌어넣을 공작을 늘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주몽왕의 동방 민족 총규합의 큰 운동은 착착 진척되고 있었다.
 
주몽왕 건국 제십사 년 여름, 동부여에서는 가장 슬픈 소식이 고구려 왕궁에 들어왔다.
 
주몽왕이 늘 생각하며 사모하여 마지않던 어머님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부여 임금 금와왕은 유화부인의 별세를 조상하고 겸하여 새 나라 고구려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유화부인의 주검을 태후(太后)의 예에 의지하여 후히 장례지내고, 또한 신묘(神廟)를 세워서 제사케 한다 하는 것이었다.
 
금와왕의 이 호의가 고마왔다. 동부여로서는 고구려국의 발흥과 팽창에 겁내어, 볼미〔人質(인질)〕 셈으로 유화부인을 그냥 동부여에 억류하여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화부인께 대한 정의도 있고, 신흥 고구려에 대한 경의(敬意)도 있는 위에 겁도 겸하여, 유화부인을 그의 아드님의 나라로 보내지 않고 그냥 멈추어 두었을 것이다. 대접은 내내 극진하였다 한다.
 
유화부인도 지난날의 신세도 있고 또한 정든 땅이기도 하고 해서, 무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부여땅에 그냥 있다가 임종까지 그곳서 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화부인인들, 당신의 아드님이 졸본땅에서 한 나라를 이룩하고 그 임금이 되었고, 그 나라이 활발하고 굳세게 생장한다는 소문을 들을 때 얼마나 이리로 오고 싶었으랴. 거룩하고도 씩씩한 아드님의 용자와, 강하고 옳게 생장하는 새 나라 모양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랴.
 
그러나 부여나라와 새 나라의 새에 무슨 감정상의 알력이라도 생길까, 이런 방면으로 생각이 미쳐 그냥 부여땅에 머물러 있었다.
 
부여는 그래도 동방 모든 나라의 종국(宗國)이라, 종국이 임금이 새 나라 왕모(王母)를 그만치 후히 대접한다 하는데, 주몽왕으로서도 어머님을 굳이 옵시사하기도 어려웠다. 금와왕 승하하고 그 태자 대소(帶素)가 등극했으면 주몽왕으로서도 동부여나라에 아무 관대함도 안 보였을 것이지만….
 
금와왕이 어머님 유화부인을 그냥 동부여에 붙들어 둔 점을 충분히 이해하는지라, 증오심이나 적개심은 일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님 생전 단 한번이라도 더 어머님께 뵙고 싶었다. 무르익고 크게 된 ― 한 개 나라의 임금으로 된 당신을 어머님께 단 한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어린애 다운 응석으로 ‘어머님, 저를 보세요’ 하고 어머님 앞에서 외쳐 보고 싶었다.
 
그럴 기꺼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어머님의 부보(訃報)가 주몽왕께 이른 것이었다.
 
아직 오십 미만의 한창의 나이로 왜 벌써 돌아가셨읍니까, 이 자란 아들을 왜 한번이나마 보시지 않고 돌아가셨읍니까.
 
인제는 영원히 ‘아들’이라는 지위는 누릴 기회를 잃은 당신이었다. 지아버님이며 아버님이며 할아버님이며, 현재와 장래의 당신께는 이같은 무수한 지위가 있지만, 아들이라는 지위는 다시 볼 기회가 없다.
 
어머님께 보이고자 나라를 이룩하고 늘리고 한 바는 아니지만, 어머님을 잃고 보니 그런 일 하기도 맥이 빠지는 듯하였다.
 
금와왕이 어머님께 한 대접이 고마워서 주몽왕은 방물을 보내어 그 덕을 사례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마리 삼아 고구려와 동부여의 새에는 친선관계가 맺어지고 친선사가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동방 모든 나라의 종국으로 자타가 허하는 동부여의 임금인 금와왕은, 주몽왕 ―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종국 같은 존대(尊大)풍을 부리지 않고, 대등의 나라로, 대등의 임금으로 대접하였다. 더우기 주몽왕은 아직 잠저(潜邸) 때에 금와왕의 한낱 말〔馬(마)〕간수인이었던 데 지나지 못하거늘 그 주몽왕께….
 
아마 금와왕으로서는, 당신은 해모수님의 왕자인 해부루님의 양자로 지금 왕위에까지 올랐고, 주몽왕은 해모수님의 아드님이라는 역사적 관계로 주몽왕을 얕보지 않는 것이겠지만, 주몽왕으로서는 옛날 일찌기 나랏님으로 우러르던 금와왕의 지금의 대등적 대우에 감격하고 감사하였다.
 
동부여에 그냥 살고 있는 안해 예씨(그새 어머님 유화부인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는 소식은 늘 들었다)와 예씨의 품아래 있는 유리(瑠璃) 소년은 어머님 그냥 계시니 버려 두었지만 어머님도 떠나신 지금에는 동부여에는 아무 인연도 없다. 곧 이곳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이 역시 금와왕의 그런 호의에 어머님 세상 떠났다고 그 날로 이리로 부르기도 좀 어떠하여, 장차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그냥 두었다.
 
고구려와 부여는 서로 저퍼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삼가는 나라로서, 서로 건너다보기만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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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