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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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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 (萬人疏)
조선 시대에 1만 명 내외의 유생(儒生)이잘못된 정부 시책에 대해 집단적으로 연명하여 올린 상소.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만인소 (萬人疏) 수신사 위정 척사 운동 1880년 1884년 1871년 1875년 1855년 1823년 1792년 1881년 김홍집 이만손 황준헌 명성 황후 이시영 개화당 조선 책략 갑오개혁 아관 파천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한·미 수호 통상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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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1만 명 내외의 유생(儒生)이 잘못된 정부 시책에 대해 집단적으로 연명하여 올린 상소.
 
조선 시대는 전제 군주 국가이지만 조정의 시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유생들은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상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유생의 집단적인 상소는 16세기 전반기까지는 성균관과 4학 즉 세도가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한양의 네 곳에 세운 학교를 말한다. 중학· 동학·남학· 서학이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나, 16세기 중엽부터는 지방 사족(士族)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유생 집단인 사림(士林)이 형성되면서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집단 상소의 규모도 처음에는 수백 명이 연명하던 작은 규모였으나 뒤로 내려가면서 1,000명대를 능가하는 규모로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이후에는 1만 명 안팎이 집단적으로 연명한 대규모의 상소로까지 발전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흔히 만인소라고 하였다.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에 이우를 대표자로 한 영남 유생 1만 57명이 사도 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신원을 위한 2차례의 상소였다.
 
그 뒤 1823년(순조 23)에는 김희용을 비롯한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의 유생 9,996명이 서얼도 차별 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855년(철종 6)에는 경상도 유생 이휘병 등 1만 명이 장헌 세자의 추존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가장 유명한 만인소는 개항 뒤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한 봉건 유생 이 1881년(고종 18)에 올린 만인소이다.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 의 참찬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 책략》을 왕에게 올렸다. 이 책의 내용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으려면 청나라와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조선의 외교 정책의 방향을 담은 것이었다. 정부는 조정 회의를 거쳐 《조선책략》에서 제시한 외교 방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청에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할 뜻이 있음을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안동·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은 전통적인 위정 척사론을 내세우면서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81년 2월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이 대표가 되어 안동·상주 등의 영남 유생이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고 개화파를 비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영남 만인소이다.
 
이들은 척사론의 입장에서 "러시아·미국·일본 등은 모두 오랑캐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차이가 없다. 병인·신미양요 때 많은 피를 흘려가며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냈는데, 이제 와서 이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들이 조선에 들어와 통상과 토지를 요구하면 조선은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일본의 간교함과 일본과의 결탁이 초래할 위험성, 미지의 미국을 끌어들여 그들의 꾐과 요구에 말려 처하게 될 어려운 국면, 그리고 쓸데없이 러시아를 자극하여 오히려 침략을 자초할 우려 등이 있으니 황준헌이 주장한 외교 정책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지적하여 비판하였다.
 
영남 만인소는 각 지역의 봉건 유생들의 호응을 받아 그 해 5월에는 경기·충청 유생이, 윤 7월에는 강원도 유생이 《조선책략》을 반대하는 척사 상소 운동을 펼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처음에는 유생이 가진 정치·사상적 기반과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이들이 연명하여 올린 만인소를 받아들여,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근거로 한 외교 정책 을 일시적으로 철회하였다. 그리고 《조선책략》을 소개한 책임을 물어 김홍집을 해임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난 1882년에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의 척사 표명은 봉건 유생을 회유하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잠정적인 조처였다.
 
한편으로는 힘을 앞세운 일본 과 서구 열강의 통상 압력에 대해 자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만인소 종류

1792년(정조 16) / 사도세자 신원(伸寃) 만인소 / 이우(李堣) / 10,057명 (영남유생)
- 사도세자를 신원시켜 달라는 내용의 상소
1823년(순조 23 ) / 서얼차별 철폐 만인소 / 김희용(金熙鏞) / 9,996명 (전국유생)
- 서얼의 관직 진출을 허용해 달하는 상소
1855년(철종 6) /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 이휘병(李彙炳) / 10,094명 (영남유생)
- 사도제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상소
1871년(고종 8) / 서원훼철 반대 만인소 / 정민병(鄭民秉) / 10,027명 (영남유생)
-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을 취소하라는 상소
1875년(고종 12) / 대원군 봉환 만인소 / 1차: 정민채(鄭民采)→이중진(李中振), 2차: 류도수(柳道洙)→이중진(李中振) / 불명 (영남유생)
- 실각당한 대원군의 봉환을 요구하는 상소
1880년(고종 17) / 척사 만인소 / 1차: 이만손(李晩孫), 2차: 김조영(金祖永), 3차: 김석규(金碩奎) / 불명 (전국유생)
- 척사위정 정책의 강력한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
1884년(고종 21) /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 이재교(李在嶠) / 8,849명 (영남유생)
- 고종 21년에 단행된 복제개혁을 취소하라는 상소 (*갑신정변으로 이 조치 자체가 취소되자 제출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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