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적지. 사적 제155호이다. 이 유적지에는 현충사를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옛집,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을 모아 놓은 전시관 등이 있다.
현충사는 조선의 제19대 임금인 숙종(재위 1674~1720) 32년(1706)에 충청도의 선비들이 이순신 장군의 충성스러운 절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조정에 건의함으로써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해인 1707년에 임금에게 ' 현충사(顯忠祠)'라는 이름을 지어 받았다.
1865년(고종 2)에는 흥선 대원군(1820~1898)의 서원 철폐령으로 현충사도 한때 철폐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뒤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되고 왕권을 강화시키며 민폐를 줄이는 정책의 하나로 전국에 47개 소만 남겨 둔 채 서원을 모두 철폐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의 탄압으로 20여 년 간 방치되어 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동아 일보사가 주최하여 전 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 건물을 고치고 다시 영정을 모셨다.
1962년에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을 모아 유물 전시관을 세웠다. 화강암으로 만든 총 150평 건물 의 유물 전시관에는 거북선 모형과 《난중일기》 《임진장초》를 비롯하여 긴칼,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사실을 알리는 교지, 임금이 시호를 내려 주던 교지, 갓 위에 달던 옥으로 만든 장신구, 허리띠 등와 여러 가지 무기,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의 사진 등이 보존되어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이순신 장군이 개량한, 세계 최초의 쇠로 된 철갑선이다. 이순신 장군 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따르면, 거북선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이고, 그 아가리로는 대포를 쏠 수 있으며, 등에는 쇠못을 꽂았다. 또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며, 적의 배가 수백 척이나 된다고 하더라도 그 속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뒤에 거북선의 기술이 전해 내려오지 못하고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에 쓴 일기로, 빠진 부분도 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년까지의 일들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이 손수 쓴 것으로 현충사 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에 있다.
《임진장초》는 이순신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투가 일어나는 과정과 왜군의 상황, 진중의 경비, 그리고 준비 상황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은 당시의 해전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자료로,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6년에는 현충사의 영역을 넓히고 성역화하였다. 1967년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본전과 그의 옛집, 그리고 현충사 입구에 이순신 장군의 충성스러운 절개와 의리를 표창하고자 그의 집 앞에 세운 붉은 문인 홍살문, 유물 전시관, 활터 등이 모두 갖추어졌다. 본전은 총 62평의 건물로, 한국식 청기와를 올리고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으며, 옛집은 이순신 이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내던 곳으로, 집 앞에 충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1969년에는 이 곳을 관리하고, 여기서 치러지는 제사 의식에 대한 사항도 맡아 관리하는 현충사 관리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 밖에 현충사의 정문인 충무문과 현충사 본전으로 인도하는 문인 충의문이 있으며, 현충사 안에 연지라는 연못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