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왕후(懿仁王后, 1555년 5월 5일(음력 4월 15일) ~ 1600년 8월 5일(음력 6월 27일))는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정비(正妃)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성은 박(朴). 5위도총부의 수장인 도총관과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하며 후일 영의정에 추증된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1555년 5월 5일(음력 4월 15일)에 출생하여, 선조의 즉위 2년째인 1569년에 열다섯 살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못하는 불임이었고 선조는 후궁인 공빈 김씨를 총애하였기 때문에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식의 생산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원찰(願刹)을 설치하였고 건봉사(乾鳳寺)와 법주사 등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었다.
1590년, 장성(章聖)의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후궁인 인빈 김씨만을 데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났고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떠났으며 이후에 한양이 수복되자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갔지만 의인왕후는 여전히 해주에 머물렀고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번에도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떠났지만 의인왕후는 왕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연이은 피난길로 몸이 약해진 의인왕후는 1600년 8월 5일(음력 6월 27일)에 46세의 나이로 소생없이 승하하였으며 선조는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덕망높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칭송하였다.
승하 이후인 1604년에 휘열(徽烈), 1610년에 정헌(貞憲), 고종 대인 1892년에 경목(敬穆)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능(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목릉으로 남편인
선조와 그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같은 경역내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