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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 ~ 1709]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시인, 작가, 서예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字)는 윤보(潤甫)·휴징(休徵), 호(號)는 송곡(松谷)·송파(松坡)·구계(癯溪)·계옹(溪翁)이다. 166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공조참판(工曹參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으며, 예송 논쟁 당시 남인(南人)의 논객 중의 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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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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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 ~ 1709]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시인, 작가, 서예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字)는 윤보(潤甫)·휴징(休徵), 호(號)는 송곡(松谷)·송파(松坡)·구계(癯溪)·계옹(溪翁)이다. 166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공조참판(工曹參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으며, 예송 논쟁 당시 남인(南人)의 논객 중의 한사람이다.
고산 윤선도와 백호 윤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는 후일 허목· 윤휴의 학통을 이익과 오상렴, 채팽윤, 채제공 등에게로 전수하였다. 본래 대북(大北)계열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남인(南人)으로 전향했다. 1651년(효종 2) 생원(生員)이 되고,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북인가문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관직 출사에 제한을 받았으나 문장으로 허목과 윤휴의 천거로 청요직에 올랐다. 이후 남인으로서 1675년(숙종 1) 사간원정언(正言), 1679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냈으며 서인(西人) 송시열, 김수항의 예론을 비판,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의 공격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 14년) 의주부윤으로 특별히 임명된 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내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1689년 승지(承旨), 사간원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내고 그 후 황해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92년 좌의정 목래선(睦來善)의 천거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올랐다. 이듬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직(削職), 1697년 복관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사복시첨정 증 예조판서 이경항(李慶恒)의 아들이다.
외직으로는 경기도,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역임했고, 청렴하여 강릉, 부령, 동래부사로 재직중 선정을 베풀어 인정비가 세워졌다. 서예와 글씨에 능하여 여러 명인들의 비문과 행장을 찬하였다.
문인 국포 강박은 그의 외손이고, 이익의 문하이자 천주교비판론자인 신후담은 그의 외증손이다.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그의 외외증손이 된다. 윤선도, 이민구, 허목, 윤휴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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