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 ~ 1633]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본관은 진주, 자 경임, 호는 우복·일묵,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경상 북도 상주에서 아버지 좌찬성 정여관과 어머니 합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성룡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고, 검열 ·봉교를 거쳐 사가 독서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공을 세웠으며, 정언·교리·정랑·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 감사가 되었다. 경상 감사 시절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도민들에게 양곡을 때맞춰 공급해 주는 한편, 풍속의 교화에 힘을 기울여 차츰 안정을 가져오게 하였다.
당시의 정계는 당쟁으로 몹시 시끄러웠는데, 정경세는 이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존애원을 설치하여 무료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여 주었다. 그는 또 상주의 지리적인 면과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는 점을 들어 상주에
도남 서원을 세웠으며, 정몽주· 이황 ·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 5현을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전라 감사가 되었으나 정인홍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직을 박탈당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정국이 일변되자 부제학·전라도 관찰사 · 대사헌·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630년 《광해군일기》의 편찬을 맡았다.
그는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나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이(李珥)의 설에도 찬동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인사 행정이나 임용에 있어 정도를 행하였고,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여 민속 을 바르게 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 《우복집》 《상례참고》 《주문작해》가 있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