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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정엽(鄭曄)
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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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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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 (鄭曄)
1563~1625 조선 중기의 문신.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정엽 (鄭曄) 기호 학파 서인 예학 주자학 성혼 송익필 이이 김자점 김장생 김집 백광홍 백인걸 신 사임당 안방준 어숙권 유몽인 류성룡 이귀 이산해 이항복 이황 정철 조헌 최경창 최입 성수침 이우 한교 이서 송사련 이명준 격몽요결 경연일기 사서율곡언해 성학집요 율곡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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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1563 ~ 16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회이고, 호는 수몽·설촌이며, 시호는 문숙이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똑똑해서, 3세 때부터 글을 읽었고, 4세 때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이이는 어린 정엽 을 보고 신동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정엽은 송익필에게 먼저 예의로 지켜야 될 규범과 성리학을 배워 학문의 기초 를 쌓았다. 그리고 나서 성혼이이의 학생이 되었다. 그는 두 학자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그들의 집에 드나들던 학자들과도 두루 사귀었다.
 
1583년 별시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 문서를 맡아 보는 기관인 승문원의 관리가 되어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서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문한직을 맡았다. 1587년에는 감찰· 형조 좌랑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황주 지방의 판관으로 있었는데, 왜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워 중화 부사가 되었다. 전쟁을 끝내려는 조선과 일본의 화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때 정엽은 예조 정랑으로 있었는데,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명나라에서 돌아와서는 수원 지방의 부사가 되었다. 수원은 전쟁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전쟁의 피해를 두루 살피고 주민 들을 잘 다스려 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사성· 승지· 형조 참의·나주 목사· 대사간의 벼슬을 지냈다.
 
17세기 초 조정의 정치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세력이 강해진 북인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북인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임진왜란 때 일본과 화해하려고 한 성혼을 탄핵하고 벼슬을 빼앗았다. 이 때 성혼의 제자였던 정엽도 종성 지방의 부사로 밀려났다. 그는 종성에 있으면서 지방민의 교육 에 온 힘을 쏟았다. 때마침 오랑캐가 쳐들어 왔는데, 그는 계략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성균관의 최고관인 대사성 이 되었다. 그는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유학을 담당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쳤다. 1612년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학문을 소홀히 하자 이를 고치도록 말하다가 호조 참의로 벼슬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참판에 올랐고,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있어났는데, 이 사건은 영창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여 일어난 사화이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죽음을 당하고, 영창 대군은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정엽은 계축 옥사가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사실을 밝히려고 하였으나, 어머니가 말려 포기하고 스스로 도승지의 자리를 버렸다.
 
1617년 인목 대비를 몰아 내자는 논의가 있을 때도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의 횡포한 정치에 반대한 사람들이 광해군을 몰아 내어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을 때, 그는 조정에 나와 광해군을 모시던 신하로서 곡(哭)으로 보내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대사성에 동지경연· 원자 사부의 벼슬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상소를 올려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게 하였다.
 
1624년 인조 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이괄이 공신으로 낮게 책봉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 때 정엽은 인조에게 공주로 피난할 것을 제안하였고,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난이 끝나자, 인조는 그를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 의 자리를 주고, 아울러 우참찬의 자리도 주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여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죽은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엽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서, 기호학파의 성리학 이념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인조가 왕이 된 후에는 인조에게 "군주는 성리학에 정통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왕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과 화해하는 데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근사록석의》 《수몽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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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