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주자)가 이룬 유학의 한 흐름.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 하며, 성리학, 또는 송학이라고도 불린다.
성립
북송의
주돈이에서 시작된 성리학의 기틀은
정호,
정이 형제를 거쳐 남송의
주희가 이를 집대성하였다.
내용
성리학이 나오기 이전까지의 학풍은
훈고학이었는데, 이것은 문자와 글귀의 해석에 치중하던 유학이었다.
주자학은 이에 반대하여 우주와 인간의 근본 문제를 연구하려는 철학적인 성격을 지녔다. 곧 주자학에서는 이(理)와 기(氣), 그리고 양(陽)과 음(陰) 및 5행(五行)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이 중 만물의 근원은 이(理)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은 일종의 유교 철학으로 주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반대 학파의 비판으로 큰 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 뒤 중국과 우리 나라 유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 주자학의 발전과 쇠퇴
주자학을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고려 충렬왕 때의
안향이며, 고려 말기에는
정몽주,
이색,
이숭인,
길재와 같은 유명한 주자학자들이 나왔다.
정도전,
조준과 같은 신진 사대부들은 주자학에 입각하여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고려 문화 전반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신진 주자학자들은 《
주자가례(주문공가례)》를 들여와서 유교 의식을 보급하였다.
이같이 주자학은 조선 시대 유학 의 주류를 이루어 정치, 사회, 교육, 윤리, 도덕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우리 학자들에 의해 소화 되고 우리 학문으로서의 특색을 나타내게 된 것은
이황,
이이 등이 활동한 16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었다. 영남 학파의 스승으로 불리는 이황이 이룬 주자학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기호 학파의 스승인 이이는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주자학의 발전과 더불어 각지에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이 만들어져, 주자학의 지방 전파와 지방의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유교적 예의 풍속 이 지방 곳곳에까지 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지나치게 주자학의 이론만을 따지다 보니, 실제 나라와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소홀하게 되는 폐단이 생겨 나라의 힘을 약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주자가 가르친 가례(家禮)를 지키는 데도 지나치게 형식에 사로잡힌 감이 없지 않았다.
한편 이론에 치우쳐 불교를 배척하고, 계급, 파벌을 형성하여 마침내는 당쟁을 초래한 원인(遠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