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 가산리는 원래 근처 7개군의 조곡(세금으로 바치던 곡식)을 거두어 제물포로 운반하던 조창 (漕倉)이 있었던 곳이므로 조창 오광대라고도 한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73호이다. 형태와 내용이 진주 오광대와 닮기는 했으나 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가산 오광대 놀이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 9시경부터 자정까지 공연되는데,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일종의 고사와 같은 것이다. 가산리에는 가산 오광대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래 전 어느 봄날 남강(南江)의 지류로부터 궤짝 하나가 떠내려와 주민들이 열어 보니 그 속에 탈과 오광대 극본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당시 그곳 목섬에 귀양 온 서울 사람이 극본을 읽어 주고 놀이를 가르쳐 주어 그때부터 가산리에 오광대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산리 주민들은 가산 오광대의 역사가 300년은 넘는다고 하지만, 그 말을 뒷바침할 만한 기록은 없다.
가산 오광대 놀이는 다른 지방의 오광대 놀이처럼 춤과 대사와 노래 등이 있고, 거기에 꽹과리· 장구·북·징 등이 따른다. 등장하는 가면과 인물은 오방 신장(동·서·남·북의 사방과 그 중앙의 다섯 방위를 다스린다고 하는 귀신)· 영노· 포수· 문둥이·작은 양반·중· 말뚝이·할미·마당쇠·옹생원· 무당·봉사·어딩이·어울애기 등 약 35명이며, 전체 여섯 마당으로 펼쳐진다.
첫째 마당은 '오방 신장무'인데, 황제 장군(양반)을 중심으로 사방 신장이 흥겹게 춤을 춘다. 둘째 마당은 ' 영노(조선 시대 감영· 병영· 수영 등 관청에 딸렸던 노예)'로, 사자 모양을 한 영노가 춤을 추며 놀이판을 돌아다니다가 신장들을 차례로 물어 퇴장케 하고 마침내 황제 장군을 잡아먹는다. 그 순간, 포수가 등장해 영노를 쏜다. 셋째 마당은 ' 문둥이'이다.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진 문둥이 5명이 나와 춤을 추기도 하고, 장타령을 하기도 하고, 투전을 하며 싸우기도 한다. 넷째 마당은 ' 양반'인데, 양반이 아들 둘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는데, 하인 말뚝이가 등장하여 양반을 돼지에 비유하는 등 희롱을 한다. 양반은 이에 맞서 자기의 신분과 재주를 자랑하다가 함께 춤을 추며 퇴장한다. 다섯째 마당은 '중'이다. 파계승, 곧 불교의 계율을 깨뜨린 중에 대한 조롱이 주제이다. 여섯째 마당은 '할미· 영감'으로, 영감과 본처인 할미와 첩인 서울애기와의 관계를 통하여 봉건적 가족 제도에 대한 불만을 토해 낸다.
가산 오광대에는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오방 신장무가 있는 것이 특색이며, 탈은 대부분 종이로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나 양반과 말뚝이, 그리고 문둥이 탈만은 바가지로 정교하게 만든다.
1980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예능 보유자로는 한계홍·김오복·한윤영 등이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