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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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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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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開化黨)
1870년대 중반부터 개화 운동에 급진적 성향을 가졌던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정치 집단으로 개화당은 온건 정책을 주장하던 민씨 세력의 수구당 또는 사대당에 견주어 부르던 명칭이다. 독립당ㆍ개화 독립당ㆍ개진당이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개화당 (開化黨) 1870년대 중반부터 개화 운동에 급진적 성향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중심 스승 박규수· 오경석 · 유홍기 <->온건 정책을 주장하던 민씨 세력의 수구당 또는 사대당에 견주어 부르던 명칭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 일으킴. 북학실학 등을 정치에 반영 주활동기간 1880년 ~ 1884년 영선사, 신사 유람단
◈ 지식지도
개화당 (開化黨) 북학 신사 유람단 실학 영선사 개화파 고증학 금석학 성리학 수신사 태극기 1894년 1881년 1882년 1884년 김옥균 박규수 박영효 서광범 오경석 유홍기 박영교 김기수 김만중 김윤식 김정호 김정희 김홍집 박정양 박제가 박지원 서재필 어윤중 오세창 유득공 유몽인 유형원 이완용 이익 이제마 정약용 조준영 최익현 한백겸 허균 홍영식 박원양 박종채 영혜 옹주 박선수 중추원 동경일기 삼한금석록 갑신정변 임오군란 갑오개혁 강화도 조약 운요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물포 조약 진주 민란 한성 조약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갑신정변 (11) 백과 갑오개혁 (10) 백과 김옥균 (10) 백과 박영효 (7) 백과 독립 협회 (4) 백과 김홍집 (3) 백과 만민 공동회 (3) 백과 서광범 (3) 백과 유홍기 (3) 백과 홍영식 (3) 백과 1898년 (2) 백과 노동야학독본 (2) 백과 대한 문전 (2) 백과 박규수 (2) 백과 박영교 (2) 백과 서유견문 (2) 백과 서재필 (2) 백과 이완용 (2) 백과 임오군란 (2) 백과 종두법 (2) 흥사단 (2) 백과
▣ 백과사전
1870년대 중반부터 개화 운동에 급진적 성향을 가졌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정치 집단으로 개화당은 온건 정책을 주장하던 민씨 세력의 수구당 또는 사대당에 견주어 부르던 명칭이다. 독립당ㆍ개화 독립당ㆍ개진당이라고도 한다.
 
임오군란 이 청나라에 의해 마무리되고 개화파가 급진적인 사람들과 온건적인 사람들로 나누어진 뒤에는 급진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들은 북학과 실학 등 학문으로서만 이어져 오던 개화 사상을 깊이 있게 공부해 이를 정치에 직접 반영하였던 정치인들이었다.
 

탄생과 활동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 등의 개화당 사람들을 직접 가르치고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박규수· 오경석 · 유홍기 등의 개화 사상가들이었다.
 
이들 개화당의 스승들은 저마다 신분이 달랐는데, 특히 박규수(1807~1876)는 일찍부터 기술의 중요성과 서양과의 왕래를 주장하였던 북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양반이었다. 박규수는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여러 번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통역관이었던 오경석(1831~1879)은 중국을 10여 차례 드나들면서 서양 에 대한 책들을 가지고 돌아와 친구인 유홍기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중인의 신분이었다. 오경석은 서양의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침략으로 무너져 가는 중국의 모습을 직접 보고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개화당을 키우게 된 것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개화 사상이 나라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반집 자식들 중에서 학생을 골라 가르쳤는데, 굳이 양반이어야 하였던 이유는 당시에는 양반들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 박영효·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 김윤식 등 학생으로 뽑힌 젊은이들은 주로 실학 사상 을 담은 《연암문집》과 스승들이 중국을 드나들면서 보고 들은 내용,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서양에 대한 각종 책들을 공부하였다. 특히, 김옥균은 20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젊은이였으며,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이리하여 실학 사상과 세계의 흐름, 서양의 경제 제도에 관한 공부를 한 젊은이들은 조선이 해결해야 할 문제점과 서양과 일본 이 발전하게 된 이유 등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강제로 나라를 개방한 이후 일본 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 (1853~1877)에 주목하였다.
 
개화당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기회는 개항과 함께 왔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나라의 문을 열게 된 조선은 외국과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화 사상을 공부한 관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치에 참여해 개화 사상을 기초 로 한 갖가지 일들을 벌이는 한편, 주변 사람들에게 개화 사상을 가르쳐 동지로 만들어 갔다.
 
개화 사상을 퍼뜨린 대상은 양반·중인·평민· 상인· 승려 등 다양하였는데, 궁중의 궁녀· 환관 등 왕의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참여해 개화당은 크게 성장하였다.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고종도 이들에게서 지식을 배웠다. 개화파 는 나라의 조직을 시대 흐름에 맞게 고치는 일과 일본·청나라에 시찰단을 보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개화 사상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일도 하였다.
 
수신사와 신사 유람단 일행이 일본을 다녀왔으며 영선사 일행은 청나라를 다녀와 일본과 청나라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기술과 과학 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군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오기 위해 수시로 유학생을 일본 에 보냈다. 그러나 개화파의 이러한 노력은 1882년 임오군란 이 일어나자 큰 어려움에 빠졌다.
 

임오군란 이후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일자리를 잃고 쌀 값은 오히려 크게 오르는 등 살기가 어려워진 낮은 계급의 군인들과 가난에 찌든 서민들이 일으킨 폭동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 5군영이 없어지자 하급 군병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남아 있게 된 사람들도 별기군과 비교할 때 훨씬 낮은 대우를 받았다. 13개월 동안 보수도 받지 못한 상황 에서 불만이 극에 달한 군인들은 1882년 6월 5일 선혜청 의 도봉소에서 보수로 지급하는 쌀에 겨와 모래가 섞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관리를 폭행하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주동자 체포가 이루어졌고 이들 주동자들이 사형당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군인들은 이들을 석방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처음부터 폭력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체포된 주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모인 군인들은 우선 관리들에게 이들을 풀어 달라는 글을 올렸다가 실패하자 선혜청 관리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기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 를 훔치는 등 폭력을 쓰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군인들과 상인, 수공업자들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포도청으로 가 주동자들을 구출하였으며, 그 밖에 다른 죄수들까지 풀어 주었다. 또한, 평소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별기군과 일본 공사관까지 습격한 후에는 명성 황후를 찾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폭동이 이렇듯 거세지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고, 대원군은 곧 해결책을 내놓았다. 보수를 제대로 주고 별기군을 없앨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임오군란은 청나라 군대 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두 나라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군대를 보냈는데, 특히 청나라의 경우 조선에 군대를 보낸 원래 의도가 조선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넣으려던 것이었기 때문에 임오군란이 끝난 뒤에도 군대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선에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임오군란 덕분에 다시 궁궐로 돌아온 대원군을 자신들의 군함으로 초대한 후 그대로 납치해 청나라로 데려가는 등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였다.
 
청은 옛날부터 조선이 자신들을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던 관계였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선의 정치에까지 간섭 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는, 특히 개화파가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개화파의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청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명성 황후와 그 주변 사람들도 이제까지의 태도와는 다르게 개화파를 억누르기 시작하였다. 명성 황후 와 주변 사람들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청나라 군대에 의존하는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대원군이 쇄국 정책 을 강력하게 실시해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있던 중 갑작스러운 개항이 이루어지자 필요에 따라 정치에 참여해 개화 사상 을 널리 퍼뜨리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명성 황후 일파와 청나라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 한편, 개화파는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라 2개의 무리로 나누어졌다.
 
이들이 주로 의견을 달리하였던 점은 개화를 하되 얼마나 빨리 할 것이며, 조선에 군대를 두고 조선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고 있는 청나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명성 황후 일파와 청나라로부터 한꺼번에 탄압을 받고 있던 개화파가 개화의 속도를 빠르게 한다든가,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경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개화파는 개화의 속도도 늦추고 청나라의 요구도 들어 주면서 천천히 개화 정책을 실시하자는 쪽(온건 개화파)과 사회 와 과학 모든 부분에 걸쳐 개화 정책을 실시하고 청나라와 명성 황후 일파에 맞서자는 쪽( 급진 개화파)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온건 개화파에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이 참여하였으며, 급진 개화파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속하였다.
 
온건 개화파의 주장을 살펴보면 첫째,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되 기술과 과학에 대해서만 받아들이고 그 밖의 문화나 풍습, 제도 등은 받아들이지 말며, 둘째,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해 간 것은 조선을 무시하는 행동이긴 하지만 대원군은 개화에 반대하는 사람이니 굳이 문제삼을 필요가 없고, 셋째, 청나라는 예로부터 예의를 갖추어 대하던 나라이니 이제까지처럼 아버지의 나라로 대우하며, 넷째, 개화파가 탄압을 받고 개화 정책의 실시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첫째, 기술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제·사회· 문화 등 어떤 제도라도 뒤떨어진 것이면 모두 바꾸어야 하며, 둘째, 대원군이 개화파가 하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해도 왕의 아버지인데다 한때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함부로 납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용서할 수 없고, 셋째,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니 청나라가 조선에 있는 군대를 귀국시키지 않는 것이나 정치에 간섭하는 것 모두 막아야 하며, 넷째, 만약의 경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정치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개화파가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누어진 후에는 급진 개화파만을 가리켜 개화당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급진 개화파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명성 황후를 비롯한 일가의 정권을 맞서 싸워야 할 상대로 여겼기 때문에 민씨 정권을 사대 수구당, 급진 개화파를 개화 독립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1884년 5월 청나라는 안남(지금의 베트남의 일부)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청·불 전쟁)을 하게 되자 조선에 있던 군대 중 1,500여 명을 전쟁터로 보냈다. 청나라가 결국 패배한 이 전쟁은 개화당이 갑신정변 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갑신정변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서도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게 된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개화당 에게 때마침 일본이 접근해 개화당이 정변을 일으킨다면 이후의 활동에 필요한 군대를 지원해 주고 돈까지 빌려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자 마침내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갑신 정변을 일으킨다. 정변 직후 개화당은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한다.
 
요약하면 첫째, 청나라와의 관계를 끝내고, 둘째,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셋째, 신분의 구분 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고, 넷째,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는 처벌하고, 다섯째, 경찰 제도를 실시한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변은 곧 이은 청나라 군대의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삼일 천하). 이 과정에서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대에 살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개화당은 사라졌다.
 
일본으로 간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을 모른 척하는 일본의 냉대 속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갔으며, 1894년 3월 상하이 동화 양행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이후 민씨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을 등에 업은 갑오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옛 명예를 되찾게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 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 을 주도하였고, 1895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업적

개화당은 1880년에서 1884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주로 활동하였는데 군사적·제도적·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정책을 새롭게 실시하였다. 1879년 이동인을 일본에 보냈으며 영선사라는 사절단을 꾸려 청나라로 견학을 보내고 일본으로는 신사 유람단을 보냈다.
 
이 신사 유람단 은 1881년 새로운 문물 제도의 시찰을 위하여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으로 박정양 등 신사 10여 명과 수행원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880~1884년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보내 근대적 군사 교육을 받게 한 후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키우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뒤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와 김옥균 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돈을 빌리고 인쇄 기술자를 데려와 1883년《한성 순보》를 발간하였다. 또한, 홍영식은 근대적 우편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해, 1884년 우정총국이 설치되자 총판을 맡았다. 이 밖에도 1880년 신식 행정부인 통리기무아문 을 만들고, 1881년 신식 육군을 창설하였으며, 1882년에는 기무처를 설치하였다.
 
또한, 1883년에는 최초의 신식 학교 인 원산 학사와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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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