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순수 무대 예술만을 그 사업 대상으로 삼는다.
국립 극장 은 다음과 같은 6가지 사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
첫번째는 자체 공연을 가진다.
두 번째는 극장을 빌려 주는 사업을 한다.
세 번째는 시상 제도를 실시한다.
네 번째는 연극 연기자와 전통 예술 계승자를 기른다.
다섯 번째는 무대 예술에 관한 조사와 연구를 한다.
여섯 번째는 무대 예술 을 보급하기 위한 선전을 하고, 국제 문화를 교류하기 위한 사업을 한다
는 것 등이다.
1950년 4월 29일 서울시 옛 부민관(지금의 서울시 의회) 자리에서 개관되었으며, 1957년에는 서울 명동에 있는 시공관을 전용 극장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1973년 서울시 중구 장충동 일대에 새로 지은 건물 을 전용 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민관 시절의 국립 극장
국립 극장을 만들어 세우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6년 1월부터였다. 그러나 이 때는 광복 직후였고 미군의 행정 아래에 있어 정치적·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따라 끝내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에 새로운 정부가 세워지면서 국립 극장을 세우려는 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1949년 10월 마침내 국립 극장 운영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맨 처음 국립 극장장으로 유치진이 임명되었다. 국립 극장의 자리로 옛 부민관을 사용하려 하였으나 부민관이 국회 의사당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시공관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에서 양보를 하지 않아 1년 정도 서로 줄다리기를 해 오다가, 1949년 말에 1,997석의 옛 부민관 건물이 국립 극장으로 정해졌다. 1950년 1월에는 전속 극단으로 신극 협의회(약칭 신협)가 창립되었으며, 전부터 있던 극협과 함께 두 개의 전속 극단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의 국립 극장 기구표를 보면 국립 극장 연예 담당 전속 단체로 두 개의 전속 극단을 가진 국립 극단 외에, 국립 국극단·국립 오페라단·국립 무용단·국립 교향악단이 있었다. 1950년 4월 29일에 개관식을 가졌고, 4월 30일에 개관 기념으로 유치진의 희곡 《원술 랑》을 허석의 연출로 공연하여 6만여 명의 관객을 끌여들였다. 그러나 제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국립 극장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1953년 초에 서항석이 제2대 극장장으로 임명되면서 대구의 문화 극장이 국립 극장으로 지정되었고, 윤백남의 《야화》를 재개관 공연으로 가졌다. 그러나 이 무렵 신협이 전속 극단에서 떨어져 나가 기획 공연은 부실해져 간신히 이름만 걸어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공관 시절의 국립 극장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자 1957년에는 국립 극장도 다시 돌아왔다. 서울 명동에 있는 1,180석의 시공관을 국립 극장으로 정하고, 신협을 다시 전속 극단으로 불러들였다. 1957년 7월에는 시공관에서 칼센헤르의 《신앙과 고향》을 서울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제1회 공연으로 가졌다. 또한, 연기인 양성소를 세워서 제1 기생을 배출해 냈다. 그들의 발표 공연으로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인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 인물》을 올림으로써,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 양성 기관을 거쳐 나온 신인들의 가능성을 알아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년 여 만인 1958년에 신협이 다시 국립 극장을 빠져 나갔기 때문에 1959년에 민극이라는 새 전속 극단을 두었다. 그 뒤 1960년에 4·19 혁명과 1961년에 5월 군사 쿠테타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당시 문교부에 속해 있던 국립 극장은 공보부에 속하게 되었다. 1961년 서울에 시민 회관이 개관됨으로써 국립 극장은 그 때부터 시공관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극장 건물도 크게 수리되었고, 1962년에는 해체되었던 국립 극단이 다시 발족되었다. 이어 국립 국극단·국립 오페라단·국립 무용단 등도 창단되어 다시 국립 극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같은 해에 개관된 드라마 센터와 함께 대표적인 연극 극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립 극장은 1960년대에는 예산이 부족하고, 민족 예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뚜렷한 정책이 없어 극장을 빌려 주는 것으로 겨우 구실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1년 가운데 대부분은 극장을 빌려 주었으며, 국립 극단의 공연은 두 세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극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라든가, 알려지지 않았던 극작가를 찾아 낸 것 등을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현재의 국립 극장
국립 극장은 1970년대에 와서 뚜렷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67년부터 정부는 민족 문화를 다시 일으킬 전당으로 서울 특별시 중구 장충동 일대에 종합 민족 문화 센터로서 국립 극장을 짓기 시작하여 1973년 7월에 완공시켰다. 새로 지어진 국립 극장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건물에, 대극장과 소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딸린 시설로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영사실·의상실·조명실·미술실·TV 중계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극장은 전체 면적이 904평이며, 무대 면적 100평, 객석 1,518석에, 조명실과 두 개의 분장실, 그리고 효과실을 갖추고 있다. 무대 구조는 지름 20m의 돌아가는 무대와 아래위로 움직일 수 있는 두 개의 무대,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무대로 이루어져 180도 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막의 중간에 쉬지 않고 무대 장치를 바꿀 수 있다. 또, 앞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연주석이 마련되어 연주자를 태우고 아래위로 움직일 수도 있다. 2,700개의 조명 장치로 여러 가지 빛의 변화를 일으켜 뛰어난 효과를 나타내며, 무대탑 공간에 세워진 조명 장치 등을 비롯하여 조명의 각도를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다. 이 밖에 객석 454석의 소극장, 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실험 무대와 여섯 개의 연습실을 갖추고 있다. 1973년에는 국립 가무단·국립 합창단·국립 발레단이 창단되었고, 1975년 국립 국극단은 국립 창극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립 극장에 속해 있던 국립 교향악단 은 1981년 8월에 KBS 교향악단으로 개편, 다시 발족하였다. 1973년 10월 17일에 개관 기념으로 이재현의 작품인 《성웅 이순신》이 허규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연습실이 공연장으로 바뀌고, 마당놀이를 위한 야외 무대도 만들어져 그만큼 공연 공간이 넓혀졌다.
1991년에 국립 극장은 국립 중앙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5년에는 국립 극장에 딸린 일곱 번째 단체로 국립 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