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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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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Napoleon戰爭)
나폴레옹 1세의 유럽 정복 전쟁. 1799년 12월에 제1차 집정 취임으로부터 1814년 제1차 몰락까지의 약 60 회의 전쟁을 말한다. 제2차 100년 전쟁 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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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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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나폴레옹 1세의 유럽 정복 전쟁. 1799년 12월에 제1차 집정 취임으로부터 1814년 제1차 몰락까지의 약 60 회의 전쟁을 말한다. 제2차 100년 전쟁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피치아 라올리노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항의하였다. 나폴레옹은 부모의 권유로 9세 때부터 프랑스 교육을 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6세도 안 된 나이에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고,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786년 9월에 코르시카로 돌아갔다가 1788년 6월에 연대 복귀하였는데, 그 때 이미 프랑스 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있던 1795년 왕당파가 새로운 법령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국민 공회에서는 진압 책임을 나폴레옹에게 맡겼고, 나폴레옹은 반란군을 무찔러 국민 공회와 공화국을 구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국내 사령관이 되었고 새 총재 정부에서 군사 문제 고문직도 맡았다.
 
1797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거둔 성공에 불안을 느껴 피에르 오제르자근을 파리에 보내 정부와 입법부에서 왕당파를 몰아 냄으로써 나폴레옹의 위신을 크게 높인다. 1799년 봄 프랑스 내에서 프레리알의 쿠데타로 온건파가 실각, 자코뱅파가 집권하였다. 상황은 여전히 혼란하였고 새 총재 가운데 한 사람인 M. 사이예드는 군사 독재만이 왕정 복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구하면서 권력도 잡으려는 생각에서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파리에 도착하였다. 1799년 11월 쿠테타를 일으켜 총재들을 사퇴시키고 입법부를 해산하였으며 새로운 통령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나폴레옹이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탈리아 전투

그 뒤 1799~1800년 겨울과 봄에 군대를 개편하고 러시아가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에서 떨어져 나간 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는 스위스 연합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그 곳에서는 본토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이든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이든 마음대로 옆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날의 승리에 비추어 이탈리아를 공격 목표로 택하였으며, 제네바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여 승리하였다.
 
1801년 2월 오스트리아가 뤼네빌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는 자연 국경, 즉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 그리고 피레네 산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원정에서 그는 군사적 성공에 의하여 5,000만 프랑과 미술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라인강 왼쪽 연안 및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나 영국도 곧 싸움에 지쳐 평화를 원하였다. 1801년 10월 런던에서 예비 조약을 맺은 뒤 1802년 3월 27일 아미앵 평화 조약을 맺었다.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고 1802년 8월에는 그를 종신 통령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는 관세도 낮추지 않고 유럽의 반을 프랑스 시장으로 삼으려 해 영국 상인들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의 팽창을 경계한 영국은 프랑스가 제노바에서 안트웨르펜에 이르는 해안을 독차지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화가 직접 깨진 계기는 몰타 문제였다. 아미앵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가 물러간 뒤 몰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원래 주인인 구호 기사단에게 돌려 주어야 하였지만 프랑스가 나폴리의 몇몇 항구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영국은 몰타를 떠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긴장되었고, 마침내 1803년 5월 영국이 전쟁 을 선포하였다. 1803~1805년 프랑스와 전쟁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프랑스로서는 육군이 영국에 상륙해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고 영국은 대륙에 있는 나라들과 동맹을 결성해야만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영국 침략을 준비하였다. 1803년 그는 브레스트와 안트웨르펜 사이에 군함을 2,000척 가량 끌어모았고 볼로냐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해협을 건너려면 바다를 장악해야만 하였다. 영국 해군보다 훨씬 약한 프랑스 해군은 에스파냐 해군의 도움이 필요하였지만, 두 나라 해군이 힘을 합쳐도 영국 해군이 거느린 함대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 정도였다.
 
에스파냐는 1804년 12월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하엿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함대는 앤틸리스 제도에서 만나 영국 함대 하나를 유인해 쳐부숨으로써 두 진영의 해군력을 비슷하게 만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해협 입구에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그 작전은 실패하였다.
 
빌뇌브가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에서 앤틸리스 제도로 갔을 때 에스파냐 함대는 오지 못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넬슨 에게 쫓겨 공격 한 번 못한 채 1805년 7월 유럽으로 되돌아가 카디스로 피하였고 그 곳에서 영국 함대에게 포위당하였다. 빌뇌브는 에스파냐 함대의 도움을 얻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려 하였으나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곶 앞바다에서 넬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 전투에서 넬슨은 목숨을 잃었지만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이김으로써 영국은 침략당할 위험에서 벗어나 마음껏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나폴리로 이루어진 프랑스를 대항하는 동맹 국가를 결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1805년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패배시켜 패권을 장악하였다.
 

대륙 봉쇄와 포르투갈·에스파냐 정복

나폴레옹은 이제 영국 침략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영국의 경제를 질식시켜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는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몰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영국 국적 선박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그 식민지의 해안에 들리는 모든 배를 나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봉쇄에 성공하려면 유럽 전역에서 엄격히 이루어져야 하였으나 영국의 오랜 동맹자인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상업을 파멸시킬 봉쇄에 처음부터 협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에스파냐 의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군이 에스파냐를 지나가도록 허용하였고 프랑스군은 리스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북부 에스파냐에 너무 오래 주둔하자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패배한 것은 그의 위신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선 이베리아 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영국에게 큰 기회를 제공하여 아서 웨즐리가 지휘하는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연합군 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에어푸르트 회합 때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서 지원 약속을 받아내려 애썼으나 그는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1세의 이런 태도는 무엇보다 나폴레옹의 정책에 실망한 탈레당이 남몰래 그와 협상하고 있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809년 초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의 반란을 거의 진압하였으며, 그 뒤 4월에는 바이에른을 공격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 를 또다시 패배시켰고, 1809년 10월의 쇤브론 조약으로 일리리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륙 봉쇄 체재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원정

에어푸르트 회합 뒤부터 러시아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점점 더 협조를 하지 않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겁주기 위해 1812년 봄 폴란드에 군대를 모이게 하였다.
 
러시아와 마지막 협상이 깨어지고 난 뒤 6월 말에 나폴레옹의 군대,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서 빼내 온 부대를 포함해 총 45만 3,000명 가령의 군대는 러시아의 니멘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군은 도망을 가면서 가옥과 양식들을 다 태워 버리는 초토 전술을 펼쳤다. 그리하여 나폴레옹 군대는 9월 초에야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러시아군 미하일 쿠트로푸는 9월 7일에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뚜렷한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1 주일 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모스크바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후였다.
 
더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 협상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퇴를 해야 하였다. 때이르게 찾아온 러시아의 겨울 추위는 추위에 약한 프랑스군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러시아에 쳐들어갈 때에는 45만 3,000명이었으나 베제지나강을 건너 살아 돌아온 나폴레옹 군대는 1만 명도 채 못되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 군대가 무참하게 패하였다는 소식은 유럽의 모든 나라에게 나폴레옹에게 도전할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소식이 독일에 퍼지자 반(反) 프랑스 시위가 일어났고, 프로이센이 파견한 부대들은 12월에 프랑스군을 빠져 나와서 그들에게 총구를 돌렸다. 오스트리아도 나폴레옹에게 파견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점점 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사람들도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불만스런 움직임이 자주 나타났는데, 파리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치에 불안함을 느끼고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예전보다 더 독재를 심하게 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끌어모으며 새로이 군대를 소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동맹군에게 크게 패하자, 동맹군과의 교섭을 통하여 임시 정부의 수반 인 탈테랑은 나폴레옹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하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파리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도착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전쟁사의 관점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살펴보면 3가지의 중요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프랑스의 전쟁이 근대적 국민 전쟁의 형태를 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륙 여러 나라의 전쟁은 봉건적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제로부터 국민을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전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을 주로 소집하여 군대를 만들었으며, 시민이 담당하는 국민 개병에 의한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실시하였고, 다른 나라로의 원정은 프랑스 혁명의 수출 봉건적 제도로부터 시민의 해방이라는 측면과,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민의 명예를 높인 의식적 측면이 있었다.
 
둘째로, 나폴레옹의 군대· 군대의 물품 등은 모두 혁명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독일군인 클라우제비츠가 이야기하였듯이, 대륙 여러 나라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병력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간 것이다. 전쟁은 귀족의 일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일이 되었다.
 
셋째는, 나폴레옹의 전략이다. 그의 기본적 전략은 군대 가 움직이는 힘을 빠르게 하는 것과 병력을 한 곳으로 빨리 움직이게 해서 병력을 집중시키는 중앙 돌파인데, 이것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형성되었다. 중부 유럽의 구릉 지대에 적응시킨 것으로, 문명 농업 지역이기 때문에 현지에서 군대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산악 지대인 에스파냐에서와 러시아 평원에서의 전투 때에는 현지 자급 원칙을 실행할 수 없어 전투에 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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