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고자 일어난 정치적 사건.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른 단종은 주로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런 배경하에 왕의 보필을 맡은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등과 집현전 출신 관료
수양대군은
1453년 단종 1년 10월에
계유 정난을 일으켜 재상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영의정의 자리를 차지하여 조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이러한 중신 제거와 권력 장악은 지방으로부터 큰 불만을 초래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김종서의 측근인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파면하였고, 이징옥은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왕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수양대군의 혁명에 대한 최초의 반란으로 민심을 크게 자극시켰다.
그 후 수양 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과 모의하여 혁명을 일으켜,
정인지·
신숙주 등의 추종 세력에 힘입어 1455년, 자신이 직접 왕좌를 계승, 세조가 되었다. 이 수양대군이 바로,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결국 단종은 폐위되어 왕의 자리를 물려준 상왕으로 남게 되었고,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들과 중신들은 매우 심각한 저항을 하였다.
이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
유응부 등은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고 세조를 제거할 것을 계획하였다. 1455년 세조 1년 10월 명나라의 책명사가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를 시발점으로 하여, 1456년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큰 연회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하에 이들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바쁜 움직임을 가졌다.
그러나, 세조 살해를 담당하였던 별운검을 갑자기 폐함으로서 거사는 발각되고 말았다. 계획이 탄로난 것에 두려움을 느낀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건에 대한 계획을 누설하여 이는 곧 세조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사건을 계획하였던 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들이 후세에 ' 사육신'이라 불리운 사람들이다.
이 밖에도
김문기,
박쟁,
성승 등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약 70명에 가까운 중신들이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원래 사육신이란
남효온이 지은 《
추강집》에 육신전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유응부보다
김문기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실 중앙의 정계에는 세조에게 협력하는 관료들만으로 충당되었고, 이들은 일등 공신으로 봉해지고 많은 토지를 받았다.
세조는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한 후에 유신들의 중심 기관인 집현전을 폐쇄하였고 새로운 유신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통한 집권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세조는 이를 위해 균역 제도를 개혁하였고,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새로운 체제 정비의 하나로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