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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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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극 (獨逸演劇)
독일어로 쓴 희곡을 극으로 만든 연극.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독일어권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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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쓴 희곡을 극으로 만든 연극.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독일어권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16세기 초 독일에는 다른 유럽 여러 나라의 종교극 과는 그 기원이나 성격이 다른 일종의 ' 카니발 축제극'이 생기게 되었다. 이는 크리스트교가 전해지기 이전부터 독일에 있었던 봄의 축제가 사육제 행사와 결합되어 생긴 익살스러운 극이었다. 이 극은 주변국으로부터 본격적인 연극이 소개되기 전까지 대중을 즐겁게 하였다. 이 소극은 로마의 연극과는 달리 퍽 포악하고 음란한 직설적인 극이었다. 이 극에서 가장 관객을 즐겁게 해 준 것은 나르라는 등장 인물이었는데, 후에 특히 남부 지방에서 한스부르스트라는 인물로 발전하여 독일적인 익살극의 영웅으로 인정되었다. 이 카니발 축제극은 주로 아마추어들이 공연하였으며, 시 공회당은 물론 시중 광장 같은 곳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입장료는 받지 않았으며, 영국의 종교극과 마찬가지로 나중에는 시장의 상인 조합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이러한 연극의 대본을 도맡아 쓴 사람이 H. 작스였는데, 르네상스기의 독일 연극을 대표하였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서는 영국 배우단이 독일에 건너와서 엘리자베스 왕조극을 소개하면서, 독일에 직업으로 배우를 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 극단이 들어와서 한스부르크 등 독일 고유의 광대도 생겼으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저속한 순회 극단이 탄생하였다. 이런 상황은 독일 연극의 본격적 형성을 기치로 들고 나온 J.C. 고트셰트와 C. 노이버가 공동 작업을 시작한 1725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계몽 시대로 들어선 때로서, 학자인 고이셰트가 고상한 연극의 확립을 지향하여 라이프치히에 거점을 두고 노이베린 극단을 조직,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문학적인 희곡의 상연을 시도하였고, 프랑스의 고전극 이론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모방에 지나지 않았고 이 무렵 계몽가 G.E. 레싱이 나타나 독일 연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새롭게 대두한 시민극의 입장에서 고전극 이론을 비판하였고, 그 이론을 《함부르크 연극론》에 쓰는 한편, 실제로 희곡과 각본을 창작하게 되면서 《미나 폰 바른헬름》 《현자 나탄》 등의 뛰어난 작품을 썼다. 이 극들은 같은 시대의 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것들이었다. 레싱의 시민극 운동은 2년도 채 안가서 좌절되었지만 운동으로서 큰 의의를 갖는다.
 
1770년대로 들어서자 빈의 부르크 극장 을 시초로 많은 궁정극장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질풍 노도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계몽 시대의 이성 중심주의에 반박하여 감정의 우위를 역설하고 천재 W. 세익스피어를 찬양하고, 규칙에 얽매이는 프랑스 고전극을 공격하였다.
 
독일 낭만주의 연극의 대가로 손꼽히는 J.W. 괴테J.C.F. 실러도 이 질풍 노도파에 속했는데, 괴테는 독일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심리극인 《타소》와 불후의 명작인 《파우스트》 등을 썼다. 실러는 《군도》를 써서 괴테에 이어 질풍 노도파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레싱이 관용극인 《현자 나탄》을 발표했던 1781년경에는 이 운동도 퇴조하고 말았다.
 
괴테는 바이마르 궁정에 머물게 된 다음부터는 고전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창작하였고, 1790년대부터는 실러와 협력하여 독일 연극에 고전적인 양식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8세기 독일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뚜렷한 현상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배우들이 양성 배출되어 대중과 밀착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K.E. 아커만·K. 에크호프 등이 대표적인 배우로서, 당시 배우 양성의 본거지는 노이베린 극단이었다. 1775년에 고타에 첫 국립 극장이 생겼고, 뒤를 이어 빈과 만하임에도 국립 극장이 생겼으며, 1767년에는 시민의 의지로 첫 국민 극장이 개장되었다. 1786년에는 후에 독일 연극에 큰 공헌을 한 베를린 극장이 건립되었다. 이 때부터 파리나 런던에서의 중앙 중심적인 연극에서 탈피하여 탈중앙적인 연극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독일 연극의 특징을 낳게 하였다.
 
19세기에는 괴테· 실러의 뒤를 이어 고전주의를 흉내 낸 시대이며, 극장은 많이 융성해진 반면 희곡에서는 별로 뛰어난 것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교양적인 궁정극장에서는 실러를 모방한 역사극이 환영받았으며, 19세기 중엽부터 활발해진 오락적인 상업 극장에서는 '잘된 연극'이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863년에 씌어진 G. 프라이타크의 《희곡의 기교》라는 책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극작 지침서이다. 그 후 C.D. 그라베와 G. 뷔히너가 나타나 근대적 의미의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한 작품을 써서 사실주의 연극의 서곡을 울렸다. 특히,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과 《보이체크》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들의 희곡은 뛰어나며 현대적이면서도 19세기 말까지 무시되어 왔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시대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J.P. 헤벨은 G.W.F. 헤겔의 변증법적 사상을 연극에 적용하여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1878년 W.R.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서 시작한 축제극에서 공연에 악극론이라는 종합 예술을 실현시켜 독일 연극사에 매우 뜻깊은 자취를 남겼다. 또, 자신의 극단을 가졌던 작센 마이닝겐 후국의 통치자 게오르그 2세는 스타 배우 위주로 운영되던 당시의 극단 풍조를 버리고,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일치된 연기와 종합적 분위기의 조성을 꾀한다는 이른바 앙상블을 강조했다. 이 극단은 1874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 각지를 돌면서 순회 공연을 함으로써 널리 알려져 새로운 연극 탄생의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1880년대가 되자 북유럽에서 H. 입센의 사회극이 출현하자 연극은 사회 비판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독일의 연극도 이 영향을 받게 되어 진실을 추구하는 기법을 모색하였고, 프랑스에서 시작된 자유 극장 운동이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O. 브람은 1889년 베를린에서 회원 조직체인 '자유 무대'를 발족했으며, 사회극 《해뜨기 전》으로 G. 하우프트만 을 세상에 알려지게 했다. 브람의 자유 극장은 주로 상업 극장이 기피하거나 검열에서 항상 문제가 된 작품을 과감히 공연하였는데, 마침내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작가 G. 하우프트만 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우프트만은 처음에는 《직공》과 같은 자연주의적 작품을 썼으나, 후에는 《델피의 이피게니아》 등 고전에 바탕을 둔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신낭만주의·인상주의· 상징주의 등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고, 특히 빈에서는 A. 슈니츨러·H. 호프만슈탈이 독자적인 극의 세계를 펼쳤다. 연출에서는 극장의 마술사라고 불리었던 M. 라인하르트가 이 경향을 실천하였다. 라인하르트는 새로운 연극 공간을 개척한 인물로서, 소극장에서 서커스 가설 극장에 이르기까지 극 공간을 넓혀 나갔고 마임극·음악극·축제극도 시도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1910년 전후 독일 극작가들은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연극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표현주의 연극을 들고 나왔다. 대표적인 극작가로는 E. 톨러와 C. 슈테른하임·G. 카이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연주의 의 겉핥기식 묘사를 거부하고 영혼 깊숙한 곳까지 세세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등장한 R. 조르게·R. 괴링 ·W. 하젠클레버·F. 운루 등의 젊은 세대가 표현주의극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연출가 L. 예스너의 계단 무대와 K.H. 마르틴이 연출한 E. 톨러의 혁명극 《변전》 등의 표현주의 무대가 전 독일을 석권하였다. E. 피카스토르는 선전·선동극이라든지 정치 연극의 선주자로서 무대를 좌익적인 정치 교육에 이용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표현주의 연극은 M. 라인하르트와 E. 피스카토르를 거쳐 B. 브레히트에 이르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서사 연극으로 발전하였다.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이 중시했던 감정 교류· 동화 작용· 카타르시스 등에 대하여 반대하고 극에서의 이성· 판단·객관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관객 이 극중 사건이나 인물 속에 몰입되는 것을 반대하여 극과의 거리를 지킬 것을 내세웠다.
 
1949년 동·서독 분열 후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 아래 F. 볼프 등이 활동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극단 베를린 앙상블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브레히트가 계속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P. 헉스와 H. 뮐러, V. 브라운 등에게 변증법적인 연극 이 계승되어 뮐러는 현재까지 참신한 실험극을 발표하고 있다. 서독에서는 1960년대 전후부터 정치에 참여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극작가가 활약하게 되었다. 또 P. 바이스 ·R. 호흐프트·H. 키프하르트 등에 의해 기록연극이라는 장르가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한편, W. 힐데스하이머와 같은 부조리 연극을 시도하는 작가도 나타났다.
 
학생 혁명 전후해서는 194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가 등장했는데, 이 중 '순수 언어극'을 시도했던 P. 한트케는 정치 참여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정치적인 좌절감과 내면화 경향이 나타나 그 상실감을 잘 포착한 B. 슈트라우스, 파멸의 세계를 형상화한 T. 베른하르트의 작품이 빈번하게 상연되고 있다.
 
독일 연극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전통을 파괴하고 혁신을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 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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