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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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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분당 (東西分黨)
조선 시대 선조 8년에 당시의 유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던 것을 일컫는 말. 분당의 시초는 당시 젊은 선비들의 지지를 받았던 김효원 일파와 명종 왕후의 동생으로서 노장들의 지지를 받았던 심의겸 일파 사이에서 비롯되었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동·서 분당 (東西分黨) 선조 8년(1575년) 유림(사림파)가 동인, 서인으로 갈라짐. 소장파의 지지 - 김효원 일파 (동인) 노장들의 지지 - 심의겸 일파 (서인)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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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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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조선 시대 선조 8년에 당시의 유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던 것을 일컫는 말. 분당의 시초는 당시 젊은 선비들의 지지를 받았던 김효원 일파와 명종 왕후의 동생으로서 노장들의 지지를 받았던 심의겸 일파 사이에서 비롯되었다.
 

동서 분당의 시초 유림 세력

우리 나라의 분당은 고려 말 유가의 도를 닦던 선비들인 유림의 정치적 진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림 또는 사림이라 불리는 이 선비들은 고려 말 부패한 정치에 반대하고 혁명을 지향하는 급진 개혁파와는 달리,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며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급진 개혁파가 고려를 멸망시킨 후 조선을 세우자, 중앙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가 고향 마을인 향촌의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 세조 때, 유림의 네 파 중 당시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훈구파는, 그 세력을 나날이 확대하여 온갖 비리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며 권력을 남용하였다. 자연히 유림들은 훈구파의 세력을 막기 위해 정치적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유림은 그들의 의사를 수렴시킬 새로운 정치적 구조를 모색했는데, 당시 성종훈구파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림들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홍문관'을 통해 훈구파의 권력 남용과 비리를 견제하였다. 또한, 중종 때는 '낭관권'을 새로이 만들어, 훈구파 재상들의 비리를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부터 막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유림들은 점차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보해 나가면서, 그 때까지도 고향에 머물면서 교육 에 힘쓰고 있던 재야 유림들을 정치에 진출시킬 수 있는 '천거제'를 실시했고, 성종은 '유향소 복립'을 통하여 향촌의 자치를 보장해 주었다. 또한,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권선 징악과 상부 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시골 마을의 자치 규약인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의 자치적인 힘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유림들의 이러한 중앙 정치 세력으로의 확대는, 정치 세력을 쥐고 조정을 뒤흔들던 훈신들과의 대립으로 무오사화기묘사화를 불러일으켰고, 정치 구조의 변화 속에서 세력이 확대된 권신들이 등장하여, 유림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방해하였다. 하지만 유림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이념이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하였으므로, 지지 세력이 확대되어 유림은 점차로 그 세력을 강화시키면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동서 분당의 발단

점차 세력이 강해진 유림은 '언관권'과 '낭관권'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정치 세력자인 재상들과 유림의 세력인 낭관들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이 생겨났는데, 점차 그 대립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재상과 낭관의 대립은,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대승 등 신진 세력들과 이준경·김개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결이었으나, 본격적인 분당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분당의 조짐은 1575년 선조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이준경 등의 뒤를 이어 유림이 재상에 오르게 되면서 중앙 정치를 주도하게 되고, 이렇게 재상을 차지한 선배 유림들과 낭관의 자리에 있던 후배 유림들 사이에서 분당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유림 내부의 갈등은 김효원심의겸의 개인적인 자리 다툼에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청빈한 선비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던 김효원은, 문과에 장원 급제한 뛰어난 선비로서 유림의 칭송이 자자했는데, 당시의 전랑 오건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전랑 자리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유림들 가운데 노장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심의겸은, 김효원이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권신 윤형원의 집에 머물렀다는 이유를 빌미로 하여 이 천거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효원은 얼마 후 전랑에 오르게 되고, 그는 그 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심의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더욱이 김효원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주위 사람들이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그 자리에 추천했는데, 김효원은 심의겸이 그의 천거에 반대했던 과거의 보복으로 심충겸의 천거에 반대하였다. 그는 외척의 신분인 심충겸을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랑의 자리에 올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이로 인해 김효원과 심의겸 두 집안의 대립과 반목은 본격화되었다.
 
이 때 유림들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분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분파로 나뉘어 분당이 형성되었고, 김효원 일파는 그가 서울의 동쪽 지역인 건천동에 살았다는 이유로 동인이라 하였고, 서울의 서쪽 지역인 정동에 살고 있던 심의겸 일파는 서인이라 불렀다.
 
동서 분당은 처음에는 김효원과 심의겸, 두 사람의 개인적인 불화로부터 싹텄으나, 집단적인 대립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동서 분당은 이후 서인들에 의하여 동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고, 궁지에 몰린 서인은 중심 인물인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이 같은 유림 세력을 주장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대결로 비롯된 붕당 정치는 이후에 사색 당파 로 발전해, 조선 시대 정치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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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