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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모스크바 대공국(Moskva大公國)
모스크바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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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대공국 (Moskva大公國)
중세 러시아에 있던 공국. 14~15세기에 러시아의 여러 나라를 통일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이룬 중앙 집권적 봉건 국가였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모스크바 대공국 (Moskva大公國) 러시아 연대기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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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러시아에 있던 공국.
 
14~15세기에 러시아의 여러 나라를 통일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이룬 중앙 집권적 봉건 국가였다.
 
처음에는 류리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류리크 왕조는 류리크(?~879)가 러시아 국가를 건설한 후부터 표트르 1세 때까지 키예프·모스크바의 대공(大公)·황제로서 러시아에 군림한 왕조(862?~1598)이다.
 
류리크는 《러시아 연대기》의 전설적 영웅이지만, 그의 아들로 생각되는 이고리 대공의 자손이 계승한 왕조로 키예프 시대에는 대공위, 12~15세기의 봉건적 분열 시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공국의 공위를 계승하였으나, 그들의 일족 중에서 배출된 모스크바 대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모스크바의 근무후로서 최고의 신분에 오르게 되었다.
 
이반 4세는 차르라고 칭하고 절대 전제를 확립하였으나, 그의 아들 표트르 1세는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21 세대를 최후로 9세기 이래의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3세기 북동 러시아 의 유력한 정치 단위체로 성장하여, 14세기 전반부터 영토 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1328년 이반 1세는 블라디미르 대공(재위 1328~1440)이 되어, 여러 공왕(公王)이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 왕국인 킵차크 한국(汗國)에 바치는 공납 징수 대행권을 얻어 냄으로써 세력을 키우고, 키예프에 있는 전 러시아 총주교부를 그가 거주하는 성 모스크바로 옮기게 하는 한편, 주변의 땅을 정복·매수하여 모스크바를 사실상 러시아의 정치·종교상의 수도로 만들었다.
 
'돈주머니'라는 뜻의 칼리타 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자비심이 후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인색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반 1세의 아들 세묜 고르디는 '전체 루시'의 대공이 되었고, 1380년 드미트리돈스코이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한국을 격파함으로써 몽골·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서 '루시'는 러시아의 옛 명칭이었다.
 
바실리 2세의 아들 이반 3세(1440~1505)는 1450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1462년부터는 단독으로 지배하였다.
 
야로슬라블· 로스토프·트벨리의 여러 공국(公國)과 북러시아 일원을 영유하고 있던 노브고로트 공국을 합쳐서,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동북 러시아의 영토적 통일을 거의 완성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지배하에 있던 서남 러시아의 수복에도 손을 대었다.
 
1480년 2세기 반 동안 계속된 킵차크 한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반대로 이 한국에서 분파된 카잔 한국 등에 세력을 부식시켰다. 또한 국내에서는 행정 기관 의 정비, 새 법전의 발표, 하층 귀족의 육성, 비잔틴식 의식과 군주관의 도입, 르네상스식의 호화로운 궁전과 사원의 건립으로 정치의 집권화, 군주권의 강화 등을 꾀함으로써 독재자라고 불렸다.
 
외교 문서 등에는 처음으로 차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리스의 왕녀와 결혼하여 스스로 비잔틴 제왕의 후계자라 칭하였다.
 
바실리 3세의 아들 이반 4세(1530~1584)는 1533년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것 때문에 1547년 차르라고 칭하며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로 선발 회의 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였다.
 
또한 전국 회의의 소집과 봉토(封土)의 하사 등으로 지방 귀족층의 지지를 굳혀, 1550년대에는 행정· 사법·군제· 교회 제도 등의 면에서 중앙 집권화를 위한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카잔·아스트라한의 두 한국을 정복하고 볼가강의 전체 수로를 제압하여, 북빙양(北永洋)의 내해인 백해(白海)에도 개항장(開港場)을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 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발트해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선발 회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리보니아 전쟁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T. 에르마크가 서시베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동방 진출이 시작되었다.
 
귀족의 세력을 타파할 것을 기도하였던 그는 1565년 극단적인 공포 정치 체제를 시행하여 '뇌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공포 정치는 중앙 집권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 타도에는 성과를 얻었지만, 이것의 피해는 농민과 시민에게도 파급되었다.
 
행정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를 초래하여, 농민이 새 농토를 찾아 이동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므로, 그의 만년에는 농민의 이동을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군주권의 신적(神的) 기원을 확신하였고, 크루프스키공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 등에서 그 사상을 전개하였지만, 좀 광신적인 면도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의심하는 버릇이 심하여졌다. 이런 까닭에 만년에 자기 장남을 말다툼 끝에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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