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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문무 대왕릉(文武大王陵)
문무 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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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 대왕릉 (文武大王陵)
[사적 제158호] 경상 북도 경주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바닷속 무덤. 사적 제158호이고, 대왕암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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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 대왕릉 (文武大王陵)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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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
용(龍)의 전설(傳說)은 뭐가 많을까?
【문화】 2024년은 갑진년으로 용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계룡(鷄龍)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탈해왕은 일찍이 28 용왕이 다스렸던 용성국(龍城國)에서 신라로 와서 신라의 4대 왕이 되었다. 또 신라의 거타지(居陁知)는 활을 쏘아 여우를 잡아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된다는 등 용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전설, 설화, 용왕굿 및 기우제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등록순
2024.01.08
용(龍)의 전설(傳說)은 뭐가 많을까?
【문화】 2024년은 갑진년으로 용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계룡(鷄龍)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탈해왕은 일찍이 28 용왕이 다스렸던 용성국(龍城國)에서 신라로 와서 신라의 4대 왕이 되었다. 또 신라의 거타지(居陁知)는 활을 쏘아 여우를 잡아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된다는 등 용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전설, 설화, 용왕굿 및 기우제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백과사전
경상 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바닷속 무덤. 사적 제158호이고, 대왕암이라고도 불린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 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 내어 삼국 통일을 완전히 이룩한 왕이다. 이와 같이 그 공로가 큰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인 681년에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 를 지내게 되었다. 그의 유언의 내용을 보면,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여 오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문무왕이 유언대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는데,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대왕바위 또는 대왕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물 속에 있는 수중릉은 해변에서 별로 멀지 않은 바다에 있는데, 원래부터 있던 그렇게 크지 않은 바위이다. 그 남쪽에는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그 둘레로 썰물일 때에만 나타나는 작은 바위들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자리잡고 있어, 마치 왕릉 앞에 세워 왕릉을 지키게 하는 호랑이 모양의 석상처럼 보인다.
 
대왕암의 둘레는 200m 정도로, 마치 동서 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는 물길을 터놓아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특히, 동쪽에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바위의 바깥 쪽에 부딪쳐 물길을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일어도 대왕암 안쪽에는 바다 수면이 언제나 잔잔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안쪽 수면의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는데, 길이 3.7m, 높이 1.45m, 나비 2.6m 가량이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는 문무왕의 유골을 어떤 장치를 하여서 보관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수중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되어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단지 사방으로 나 있는 물길과 더불어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위를 인공적으로 파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와 있듯이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은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을 건축한 양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을 만들어 놓은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낸 경우처럼, 불탑의 형식을 들여와 사방에 물길을 마련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무덤 양식은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새로 지어 부처의 공력으로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으려 하였다.
 
감은사의 황금· 백금을 칠하여 지은 불당으로 본존·고승 등의 영정을 모시는 감은사 밑에서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바닷물이 금당 밑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을 따라 금당까지 들어오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왕암이 바다와 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地)가 있는데, 신문왕은 여기에 와서 대왕암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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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