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1611년(광해군 3)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작자의 나이 51세 때 작품으로 ≪노계집 蘆溪集≫에 실려 있다. 이본으로 끝부분이 떨어져 나간 필사본이 전한다. 4음보 혹은 3음보를 1행으로 헤아려 총 77행이다. 작자가 이덕형(李德馨)과 교유할 때 작자의 곤궁한 생활을 묻는 데 대하여 답으로 지은 것이다.
【학습】1598년(선조 31) 박인로(朴仁老)가지은 가사. 작자가 38세 때에 지은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노계집 蘆溪集≫에 실려 있다. 작자가 경상도 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의 지휘 아래 왜적을막고 있을 때 부산에 있던 적이 밤에 달아나자, 성윤문이 10여일 그곳에 머무른 뒤에 본영으로 돌아와 수군(水軍)을 위로하기 위하여 박인로로 하여금 이 가사를 짓게 한 것이다.
【학습】1598년(선조 31) 박인로(朴仁老)가지은 가사. 작자가 38세 때에 지은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노계집 蘆溪集≫에 실려 있다. 작자가 경상도 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의 지휘 아래 왜적을막고 있을 때 부산에 있던 적이 밤에 달아나자, 성윤문이 10여일 그곳에 머무른 뒤에 본영으로 돌아와 수군(水軍)을 위로하기 위하여 박인로로 하여금 이 가사를 짓게 한 것이다.
【학습】1611년(광해군 3)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작자의 나이 51세 때 작품으로 ≪노계집 蘆溪集≫에 실려 있다. 이본으로 끝부분이 떨어져 나간 필사본이 전한다. 4음보 혹은 3음보를 1행으로 헤아려 총 77행이다. 작자가 이덕형(李德馨)과 교유할 때 작자의 곤궁한 생활을 묻는 데 대하여 답으로 지은 것이다.
박인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의 가사 작품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 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水軍)으로 종군해서는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는데 표현은 소박해도 나라를 근심하고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하는 마음을 뜨겁게 나타냈다. '독락당(獨樂堂)', '소유정가(小有亭歌)'에서는 명승지를 찾아 그 유래와 경치를 찬양했고, '영남가(嶺南歌)'에서는 민심을 돌보러 온 관원의 덕치(德治)를 찬양하면서 임진왜란 후 백성이 조석(朝夕)을 잇지 못하면서 부역에 시달리는 사정을 나타내었다.
그는 유자(儒者)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심했는데, 이런 문제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노계가(蘆溪歌)'와 '누항사(陋巷詞)'이다. 이들 작품에서 박인로는 안빈낙도하는 이상적 삶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로움을 핍진(逼眞)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누항사'에서는 지금까지 가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언어를 대폭 받아들여 생동감과 구체성을 획득하는 탁월함을 보였고 그를 통해 조선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국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