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고대 왕국 중의 하나. 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에서 시작하여 3세기 말에는 고대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4세기부터 크게 발전하여 경기도· 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 강원도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등 세력을 뻗쳤으나,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과 신라와의 투쟁에 밀려 7세기 중엽에 멸망하였다.
건국과 발전 및 멸망
고조선이 망할 무렵에 북쪽에서 이주민이 한강 유역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 가운데서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이 차차 큰 세력을 이루어 백제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고이왕 때에는 한강 유역을 통합하여 고대 왕국의 기틀을 확립하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을 정복하여 호남 지방을 완전히 통합하여 남해안에까지 그 세력이 미쳤으며,
탐라국을 아우르고, 고구려와 충돌하여 대동강 유역에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한편 4세기 중엽에는 중국 진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일찍부터 진출하였던 일본과 산둥 반도, 그리고 본국을 연결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침입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문주왕 때에 서울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신라 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왕족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국력을 기르고,
성왕 때는
사비(지금의 부여) 천도를 단행하는 한편, 행정 구역을 정비하고 불교 를 장려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중국의 남조와 문물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에게 잃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으나, 또 다시 이 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김으로써 나제 동맹이 깨어지고, 성왕은 신라와 싸우다 전사했다.
그 뒤로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너무 잦은 싸움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의 항전도 보람 없이,
660년에
소정방 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게 서울이던 사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게 되었다.
통치 조직
북쪽 이주민이 모체가 되어 지배 계급을 이루었고, 고이왕 이후 부여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정치 체제는 일찍부터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관제를 정비하였다.
왕 아래에 16 등급의 관리를 두고, 중앙에 상좌평 등 6좌평을 두어 행정을 나누어 맡게 하였으며, 서울을 사비로 옮긴 후에는 새로 22부의 중앙 관서를 두었다.
서울은 5부로 나누어 각 부에 군대를 두고, 지방은 5방으로 나누었는데, 방의 장관을 방령이라 하였다. 방 아래에는 여러 군을 두어 군장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이와는 달리 지방 중심지를 담로라 하여 전국에 22개의 담로를 두었다.
조세 제도는 쌀로 받는 조와 쌀· 명주·베 등을 받는 세가 있었으며, 또 부역도 지게 하였다.
그리고 법률은 매우 엄하여 반역자, 전쟁에서 패한 자, 살인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을 보내는 동시에 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사회·경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 왕족과 귀족이 정치와 국방을 맡았으며, 평민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조세와 부역을 부담하고, 병정으로 뽑혀 나가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평민 밑에는 노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전쟁 포로들로서 이들은 일종의 재산처럼 다루어져 상속과 매매가 자유로웠다.
한편 남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히 하여 경제가 발달하였는데, 특히 수리 시설을 크게 확장하여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방직과 염색 기술이 발달하여 고급 비단을 짜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산물을 귀족이 독점하여 농민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상업도 어느 정도 발달하여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화폐는 쓰이지 않았고 곡물이나 베로써 대신하였다.
문화
백제의 예술은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우아하고 섬세하여 전체적으로 세련된 멋을 풍긴다.
그 지역이 신라에 흡수됨으로써 잘 보존되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그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어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불교
침류왕 때인 384년에 동진에서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한 이래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겸익 은 성왕 때 인도에서 율종 관계의 불경을 가져와 번역하였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많은 승려를 보내어 그 기초를 닦아 주었다.
학문
낙랑 문화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한학이 발달하여 오경 박사와 의박사·역박사가 있었으며, 한학 수준이 매우 높아 아직기·왕인 등이 일본에 건너가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개로왕 때 북위에 보낸 국서나 사택 지적비, 무령왕릉의 지석은 백제 한학의 수준을 잘 알려 주고 있다.
한편 한학이 발달함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근초고왕 때의 박사 고흥은 《서기》를 편찬하였다.
미술
유물과 유적은 많이 파괴되어 남은 것이 적으나, 금동불·석불·석탑 등을 비롯해 고분과 그 안에 그린 벽화·기와· 문양전 등이 약간 남아 있다.
웅진 시대의 공주 고분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소박한 맛이 남아 있다.
사비 시대에 와서는 귀족 미술이 크게 발달하여, 능산리 고분 을 보면 그 규모는 작으나 건축 기술과 벽화가 매우 세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석불 중 소박한 옷차림을 한 서산 마애 삼존 석불은 당시 백제인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석탑으로는 목조탑 형식을 모방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건축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사비 시대의 백제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시가와 음악
중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전하는 것이 없고, 시가로서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실려 전한다.
백제악이라는 고유 음악을 이루었고 일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