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3·1 민주 구국 선언(三一民主求國宣言)
3·1 민주 구국 선언
자 료 실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3·1 민주 구국 선언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3·1 민주 구국 선언 (三一民主求國宣言)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일부 재야정치인들과 가톨릭 신부· 크리스트교 목사· 대학 교수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 구국 선언. 명동 사건 또는 삼일 민주 구국 선언 사건이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3·1 민주 구국 선언 (三一民主求國宣言)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 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일부 재야 정치인들과 가톨릭 신부· 크리스트교 목사· 대학 교수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 구국 선언. 유신 체제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선언 모임이었던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정부는 윤보선· 김대중·함석헌 등 재야 정치인들과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 전복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모두 구속하였다. 명동 사건 또는 삼일 민주 구국 선언 사건이라고도 한다. 수사부는 3월 10일 관련 인사 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김대중 등 11명을 대통령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으며, 윤보선·함석헌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 윤보선· 김대중·함석헌·윤반웅· 문익환· 정일형·함세웅·신현봉· 김승훈·이문영·서남동·이우정
◈ 지식지도
3·1 민주 구국 선언 (三一民主求國宣言) 1960년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김영삼 박정희 이승만 노무현 이희호 대한민국 대통령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3·1 민주 구국선언문 공공기록물 공공기록물 (23)
▣ 백과사전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 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일부 재야 정치인들과 가톨릭 신부· 크리스트교 목사· 대학 교수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 구국 선언.
 
유신 체제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선언 모임이었던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정부는 윤보선· 김대중·함석헌 등 재야 정치인들과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 전복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모두 구속하였다. 명동 사건 또는 삼일 민주 구국 선언 사건이라고도 한다.
 
사건 직후 검찰은 "구정치인들과 일부 재야 인사들이 반정부 분자들을 규합, 종교 단체 또는 사회 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수련회·집회 등의 종교 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 조치 철폐·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는 불법적인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기도회의 마지막 순서에서 낭독한 '3·1 민주 구국 선언'이었다.
 
선언의 내용은 당시 나라 형편의 전반에 걸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민족은 또다시 독재 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 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 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 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현 정권은 이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비원 인 민족 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민주 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일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 의식과 방향 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인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 구국 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 조치를 곧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언론· 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유신 헌법 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법권의 독립을 촉구한다.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민족 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이다."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은 윤보선· 김대중·함석헌·윤반웅·문익환· 정일형·함세웅·신현봉·김승훈·이문영·서남동·이우정 등이었다. 이 선언문 사건이 일어나기 전 1월 23일에 원주 기도회 사건 및 원주 선언, 2월 16일 전주 기도회에서의 김지하 관련 발언과 유인물 등이 이미 이러한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수사부는 3월 10일 관련 인사 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김대중 등 11명을 대통령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으며, 윤보선·함석헌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 사건으로 모두 18명이 기소되었으며, 1심에서 최고 징역 8년에서 2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최고 징역 5년에서 집행 유예까지의 선고를 받고 상고하였으나, 1977년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 의하여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는 이유로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상고가 기각되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법률적 체제 공방이 전개되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체제에 대한 거부와 항의가 강력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피고들이 사회적 지도 인사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미친 영향이 컸다. 이 사건의 한계는 1970년대 유명 인사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재야와 정치인, 신교와 구교, 우리 나라의 교회와 세계 교회가 서로 긴밀하게 공동 보조를 취하게 되었다.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